프로테스탄 修道院(수도원) 訪問記(방문기)
왜 修道院을 再建했을까
聖體 불 켜놓고 朝拜까지
발행일1965-02-28 [제460호, 4면]
루터는 자기 수도회에서 나간 한 옛 수도자였다. 칼빈은 수사들을 비난했고 수도원 생활은 「그리스띠아니즘」의 원칙에 반대되는 것처럼 선언했다. 이렇게 종교개혁이 구라파를 휩쓸었을 때 많은 수의 수사와 수녀들이 수도복과 규율을 버렸다. 그 때부터 여러 「프로테스탄티즘」 가운데 수도공동생활이 극소수로 줄어졌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교적 체험의 가장 이상한 현상 중 하나는 「프로테스탄티즘」 안에서 진정한 수도생활이 재현한 것이다. 즉 프로테스탄 공동체가 태어난 것이다. 왜? 진정한 그리스도 신자들은 거의 1800년 전부터 자기 신앙을 깊이 하면서 선남선녀들을 수도원으로 인도하는 이유를 발견했고 또한 그들은 재산을 공동으로 처리하고 독신으로 웃어른께 순명하면서(어떤 때 서원을 바하면서) 공동 생활의 지상명령을 재발견했기 때문이다.
「때제」는 종교개혁 이래 세상에 나타난 프로테스탄 공동체 중 하나이다. 나는 그곳에 가 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리옹」의 안셀주교의 지도하에 「쁘라도」의 사제들과 함께 거기 가서 피정한 행복과 은혜를 말하고 싶다.
나는 작년 2월 어느날 저녁, 불란서에서 천년 전에 구라파를 형성하는 정신을 낳은 「부르고녀」 지방을 지나 「때제」에 도착했다. 사실 약 10「킬로」 지점에는 수천명의 베네딕도 수도자들을 울타리 속에 은익(隱匿)시켰던 「끌류니」의 유명한 수도원의 장려하고도 당당한 폐허를 아직도 볼 수 있다.
저녁 일곱시 나는 「때제」의 조그마한 「로만」식 성당에 들어갔다. 성체불이 반짝인다. 뒤편 의자엔 방문객들이 묵묵히 앉아있다. 지성소에 흰 장백의를 입은 수사들이 한 사람씩 그리스도께 깊은 경배를 드린 후 제자리로 간다. 그들은 불어로 「만과경」을 창(唱)할 것이다. 그들의 그림자가 현실에서가 아닌양 13세기의 이 성당 아주 낡은 돌 위에 어른거린다.
그들은 제자리에서 깊은 침묵에 잠겨있다. 어떤 이는 장궤하고 있고 어떤 이는 서 있다. 모두 기도하고 있다. 원장의 신호에 따라 「성무일도」를 시작한다. 예수회 젤리노 신부의 성영이 프로테스탄 성가에 이어 나온다. 다음에 원장의 목소리가 온후하고도 깊숙하게 들려온다. 『주여 박해를 당하는 자들을 기억하소서. 민첸티 추기경을, 중국의 신자들을 기억하소서. 오늘 아침 「바이욘」의 주교로 성성(成聖)된 원선시오 주교를 기억하소서…』 그는 또한 루터교파 주교들과 정교(正敎)의 총주교, 인종과 종교의 차별 없이 불란서 사람이나 외국 사람 등, 모르는 이름을 열거한다.
세계를 감싸는 기도이다. 갑자기 불이 꺼진다. 침묵의 기도시간이다. 이 짙은 절대한 정적(靜寂), 현실처럼 집요(執拗)한 침묵이다. 마지막 노래가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기쁜 환성처럼 메아리지는 60명 가량의 남성의 「알렐루야」 소리. 「올겐」이 여음을 남기는 가운데 작은 문을 통해 종교개혁 이래 처음 있는 이 첫 프로테스탄 수사들이 한 사람씩 어두움 속으로 사라져간다. 강력한 인상아래 나는 「오띤」의 러브런주교가 「때제」 공동체에 관대한 마음으로 빌려준 이 성당 안에 잠시 혼자 남아있었다. 나는 내일 이 목적으로 한 프로테스탄 수사가 준비해준 이 제대에서 미사를 올릴 것이다. 또 나는 이 원천정 밑에서 아홉 분의 가톨릭 주교와 65명의 목사가 같이 기도한 1960년 9월의 그 날을 상기했다. 이렇게 「빡시」의 회담 이후 4백년간 끊어진 대화가 부활되었다. 그때부터 이 자리에서 또 다른 회우들이 「로마」의 완전한 허가하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때제」란 어떤 곳인가. 모든 절망 가운데 이곳의 한없는 희망은 어디서 나왔는가? 모든 것은 1940년에서 시작된다. 스위스의 「로쟌」에서 신학을 연구하던 로제슛즈가 일종의 프로테스탄 평신자 3회를 일으켰다. 불란서의 패배는 그의 어머니가 불란서 사람인 이 스위스 사람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그는 불란서에 가서 살기를 결심했다. 그리고 「부르고녀」에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아니했던 큰 집 한 채를 사들였다. 그는 일부러 「끌류니」 부근을 골랐다.
먼저 그는 혼자서 「때제」에다 보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를 위한 피난처를 마련했다. 그는 거기서 독일군을 피해온 피난민과 유태인과 「레지스땅스」를 받아들였다. 이 곳은 1942년까지 이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었다. 이 때 「게쉬타프」의 감시로 하는 수 없이 로제슛즈는 「때제」집을 폐쇄하고 스위스로 다시 돌아갔다.
「슈네브」에서 그는 다른 학생 셋을 만났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신학자 맑스 트리안이었다. 이들과 함께 그는 한 공동체를 마련했다.
그들의 매일의 생활은 이미 성무일도와 기도로써 정해져 있었다.
1944년 불란서가 해방이 되자 이 작은 공동체가 「때제」로 돌아왔다. 맑스 수사는 신학자, 베드루 수사는 미장이, 다니엘 수사는 도자기(陶자器)공이었다. 그들은 자기 노동함으로써 생활해갔다. 얼마 후에 네째로 「빠리」에 있는 의사 로벨이 왔다.
이 작은 「구룹」은 차츰 진짜 수도생활 형태로 발전하여 1949년 부활날 아침에 「때제」의 일곱 첫 수사들이 종신·청빈·정결·순명의 서원을 발했다. 그때부터 소명(召命)은 더 많아졌고 현재 이 수도원은 60명 이상의 회원을 가지고 있다. 약 40명이 「때제」에서 아침 7시와 정오, 그리고 저녁 일곱시에 아주 짧은 「성무일도」를 염할 때만 수도복을 입는다. 그 외에 그들은 수도복을 입지 않고 세속에 깊이 들어가 거기에 섞여 살고있다. 어떤 이들은 인쇄인이요, 혹은 도자기공, 화가, 조각가, 의사 혹은 농부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둘씩둘씩 짝을 지어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전교하는 수사들도 있다.
또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과 삶을 나누고 또 「알제」와 「꼬방뜨리」 「아비쟌」 「리옹」에서 월급쟁이로 일하는 수사들도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