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86) 虛實(허실) ⑨
발행일1965-02-28 [제460호, 4면]
『다방에 「레지」로 나간 일이 있었나?』
말씨는 부드러우면서 어딘지 살살 파고드는 질문이었다.
『다방의 「레지」로 있었냐구요?』
나는 일부러 반문하면서 「예스」와 「노」, 어느 대답을 취할 것인지 망서리었다.
『「레지」하는 친구를 찾아 몇 번 놀러간 일은 있었어요.』
『직장은 어디를 다녔지?』
『… 직장에 나간 일 없어요.』
승우 어머니는 잠시 화제를 돌리더니 다시 화살을 나의 신변으로 견준다.
『친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는지 모르나?… 미국서 편지가 오나?』
『………』
나는 대답할 말이 막혔다. 아버지가 미국인이라는 것은 이미 내가 부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승우 어머니는 또 한 번 넘겨잡는다.
『저의 아버지가 왜 미국에 있어요?』
나는 짐짓 배에 힘을 주고 똑똑한 어조로 반문했다.
『미국 사람일거라고 「미스」양의 동창생이 그러던데?』
『동창생 누가요?』
『김춘자가 동창이지?』
가슴이 덜컥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오장육부까지 부끄러움에 떨었다.
『춘자는 어떻게 아세요?』
나는 잠시 멍멍하다가 겨우 물었다.
내 말소리는 목에 걸려 찢어져서 나왔다.
『춘자는 우리 외가쪽으로 조카벌 되는 아이야…』
부인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길가 가게집 불빛에 비친 두 눈동자는 (요년, 그래도 능청을 부릴테냐?)하고 쏘아보는듯 했다.
세상은 좁았다. 교문을 등지고 나오면 춘자들과는 인연이 끊어질줄만 알았는데 교문 밖까지 그들의 손톱은 나를 따라왔다. 피가 나도록 얼굴에 손톱자국이 난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눈치가 샅샅이 내 뒷조사를 한건만 같았다. 내 꼴은 마치 고양이에게 몰린 쥐나 다름 없었다.
『그럼 뭐 저한테 물으실 것 없이 춘자한테 물어보시는게 더 빠를거에요. 나보다 내 일을 춘자가 더 잘 알고 있거든요.』
우리 집이 바라다 보이는 언덖까지 왔을 대 나는 내던지듯 말했다. 떨리는 가슴의 고동은 오히려 멎고, 내 마음은 다시 밑바닥에 푹 주저 앉았다.
『아버지는 미군이라면서?』
부인은 어디까지나 부드러운 말로 내 아픈데를 향하여 다가선다.
『네에. 미국 사람인가봐요.』
『확실히 말해 보아요.』
(나도 확실히 모르는걸 어떻게 확실히 말할까요?)
이 말이 입 끝까지 나온 것을 삼켜버리고,
『확실히 저의 친아버지는 미국 사람이야요.』
『어머니는 어디 계신가?』
『돌아가셨어요.』
『양어머니 말고, 친어머니 말야!』
『………』
그것은 내 자신도 걷잡을 수 없는 안개속에 엉킨 과거였다.
8·15를 당하여 전락한 한 일인 여성이 미군을 만나 나를 낳았다고 하지만, 얼굴조차 모르는 그 여성에게 어머니를 느낄 수가 없었다.
어머니로서의 추억은 돌아간 양모가 전부였다. 설사 그가 양모라 하더라도 어머니의 초상으로서 내 마음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나의 기분이 승우 어머니에게도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부인의 눈초리는 냉엄한 사실만을 캐내려고 하고 있다.
『… 좋도록 해석하게요. 내가 어떻게 이 땅 위에 굴러 떨어졌는지 나도 잘 몰라요.』
자조를 섞어 뱉듯이 말했다. 부인은 어조가 거칠어진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저희 집은 비바람이 치면 날아갈 오막사리야요. 그나마 세들고 있는거야요. 먹고 살기 위해서 낮에는 명동에 나가서 구두닦이를 하고 있어요. 그건 아직 모르시죠?』
『누가 구두닦이를 한다구?』
『제가요』
『「미스」양이?』
부인은 반신반의 하며 묻는다.
『정직하게 말하면 다방의 「레지」도 했어요. 손님한테 저녁도 얻어먹고 옷도 사주는걸 받은 일도 있에요…』
부인의 눈이 땡그래진 것을 어둠 속에서도 느꼈다.
『…「비어홀」에서 술도 따룬 일이 있었어요. 그 전에는 어떤 미군과 같이 연애한 일도 있었어요. 실연한 뒤에는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기도 했어요』
이렇게 말을 하고나니 내 마음은, 어떤 압박에서 벗어난 것 같다.
부인은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중간쯤 언덕길을 따라왔던 부인은 돌아가버렸다.
집 문전에 서서 잠시 부인이 사라진 산 아래 어둠을 바라보았다.
나의 아픈 상처가 밤 어둠 속에서 밟히고 차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문득 죽고싶다.
그 날 밤은 좀처럼 잠이 안 오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는데 아홉시쯤 잠을 깨니, 내 기분은 새로왔다.
밖에 나와서 세수를 하며 봄빛어린 맑은 아침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침은 실로 신비롭다. 어제 죽고싶던 괴로움을 씻어주는 힘이 있었다.
아침의 의미(意味), 그것은 어제의 괴로움이 희미해지고, 어제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어떤 출발점을 나에게 주는듯했다.
조반을 지어먹고 열한시쯤 휘파람을 불며 구두닦이 도구가 들은 「빽」을 들고 집을 나섰다.
생각하면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진호였다. 그에게는 내 자신을 가장할 필요가 없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를 그는 알고 있다.
저녁에 돌아오자 과외공부를 가르치러 가지는 않고 진호네 집을 찾아갔다.
진호는 승우 어머니를 만나서 이미 어제 일을 알고 있었다.
『과외선생, 딴 사람 구하라고 이르세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진호는 아무말 않고 고개를 끄덕했다.
『왜 세상 사람들은 남의 아픈 자리를 쑤시고 싶어 할까요?』
나는 진호에게 말했다.
『그 댁 어머니는 「미스」양을 모르니까 알려고 하였을거야』
『그 부인은 재판관이고 나는 피고만 같았어요.』
『「미스」양, 걱정마세요. 사람은 사람을 심판 못 해요.』
『나는 심판을 받은걸요?』
『신(神)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지요. 죄인이 어찌 죄인을 심판합니까?』
『신은 나를 어떻게 심판하실까?』
『신은 심판을 안 합니다. 신은 다만 사랑을 주실 뿐이지요』
『거짓말. 내가 신에게서 얻은 것은 고독 뿐이야요.』
『사람은 고독을 느낄 때, 신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내 고독의 광장을 메울 수가 없어서 교회를 찾고, 그리스도를 찾은거야요.』
나는 내가 걸어야 할 어두운 나의 고독의 광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고 다만 나와 나의 그림자 옆에 조금 떨어져서 진호가 서있는듯 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는 한가닥 광선 비슷한 뽀얀 안개줄이 흐르고 있다. 뽀얀 안개줄은 어느듯 흰 옷자락으로 변했다.
얼굴은 확실히 보이지 않으나 옷자락이 움직이면서 자비스런 손이 나를 부르고 있다. 이 환영은 금시 꺼졌으나, 내 마음 한 모퉁이에 다소곳이 그 자국을 남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