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성지를 찾아서] 배론성지
표말 하나 없는 유적지
배론신학교 · 최 도마 신부 묘소 있는 곳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발행일1964-10-04 [제441호, 3면]
여기는 「배론」(舟論=忠北 堤川郡 風陽面 九鶴里), 제천읍서 25리 거리의 두메산골이다. 우리나라 제2대 사제 도마 최(崔良業=鼎九) 신부의 묘소가 있고 비록 사제로의 서품자를 내지는 못했으나 한국교회의 기틀을 닦으려 세워졌던 한국최초의 신학교 배론신학교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기차 · 자동차 등 교통기관이 발달로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걷는 길은 구학역(九鶴)서 서쪽으로 고개하나 없는 불과 2km길이긴 하나 막상 「배론」 마을을 들어서는 길은 아직도 전근대적, 구학역에서 3백 「미터」 지점의 「배론」입구 개울물은 9월중순의 비로 물이 허리까지 넘실거리는 다리하나 없는 산골이다.
돌밭은 걸어 20분을 가면 왼편으로 돌아서서 쳐다보이는 북녁하늘에 4백 「미터」가 넘는 주론(舟論)산 준령이 ㄷ자로 눈앞을 가로막는다. 기차 · 자동차가 없던 순교당시(1백년전)를 상상하면 정말 심산유곡중의 산골이다. 세론과 인기척을 피하며 그리스도 선양할 길을 모색하던 1850년대의 한국교회 본거지, 황사영이 옹기굴 지하실서 그 유명한 「황사영 백서」를 썼던 곳, 그러나 오늘 어느 다른 산간촌락과도 다른 것은 없고 있다면 8년전에 세워진 공소강당(전 초가공소는 6·25때 소실)이 그나마도 산비탈에 얕으막하게 세워졌을 정도, 여기가 천주교의 한 본산이 있다고는 무엇으로나 알길이 없다.
그러나 배론길을 들어서며 배론을 어떻게 가느냐고 물으니 교우가 아니라는 그 동리에산다는 한 부인은 대뜸 『아 천주교회를 가십니까』라는 반문이다.
70여호에 3백50여명이 산다는 마을이 지금도 산밑을 찾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그저 산길 주막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동리다(신자는 동민의 3분의 1)
논이라곤 추산해서 겨우 30마지기, 그외엔 모두가 강원 · 충청도 고산지대 특산인 굵직굵직한 옥수수대들이 우수수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동리를 가리우고 있는 한촌이다.
소년시절 교우촌을 찾아다닌 부형들과 이곳으로 이사왔다는 도비아 이(道用) 회장은 『죄를 진 것 같이 송구스럽기는 하나 우리가 알고있는 것은 최신부님의 산소 그리고 배론신학교 터 뿐, 황사영이 숨었던 옹기굴, 당시의 옹기점, 신학교신부님들이 학교 뒤안에 굴을 파서 숨어 미사를 지냈다는 곳, 최도마 신부님이 신유 기대년 등 순교사를 쓰고 교리문답 공파를 번역하며 12년의 전교 본거지로 삼았던 거쳐, 순교선열들이 천주님을 흠숭하고 진리를 논하고 전하던 곳, 체포직전 소매(袖) 접에 감추어 다니며 모아 파묻은 성물들이 어디에 있고 그 옛자리가 어느곳인지 도무지 모릅니다.』라는 것이다.
집집마다 조·만과 소리가 매일 들리고 들판에서 드리는 삼조이도의 모습이 이곳서는 이상할 수 없다면서도 못내 송구해 하는 이 회장께 더묻기가 오히려 미안할 정도로 성지의 표적들이 전혀없다.
『재작년 최신부님이 제1백주기에 미국사람인 제천본당 주임 「메리놀」회 이신부가 미사를 드렸고(이때 최신부님의 종손녀 복자회 최 발바라 수녀 참석) 노 대주교님이 과거 두어번 다녀가신 것 외는 매년 추사이망 때 최신부 묘소를 동리 교우들이 제각기 참배하는 것이 고작이』라는 것이다.
시골집들의 돌로된 뜰만이 앙상하게 남았을 뿐 고구마가 심어진 배론신학교터, 표말하나 세워져 있지 않는 집터를 쳐다보며 황량한 들녁에 서서, 숨소리도 제대로 못내며 썩는 냄새로 가득찬 방속에 갇혀 사제양성과 전교길을 모색하던 왕년의 순교자 신부를 그려바도 환상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여기 어디에 목숨을 걸고 피를 바쳐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증거하던 선열들이 살았던고.
산설고 물설고 생명마저 앗으려는 이 고장을 쏘다닌 불란서 신부들, 8도(道) 강산을 샅샅이 뒤지며 교우들을 찾고 복음을 전한 최신부, 앞장서서 천주를 증거하며 이들 성직자의 온갖 뒷바라지를 정성껏 하다 숨져간 선열들이, 「한껏」 어느 세계교회사고 순교자가 뿌린 피를 바탕으로 하듯 순교 선열들에 의해 오늘의 뻗어나는 「한국교회」로 자랏다는 것만으로 최대의 「추앙」을 삼으며 안일해 버리는』 우리를 꾸짖는 것 같애 고개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