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69) 生活(생활)과 意志(의지) ②
발행일1964-10-18 [제443호, 4면]
「타이피스트」는 나하나인데 보통 서너시간 찍을 일 밖에 없었다. 남는 시간은 설합 속에 준비했던 책을 꺼내 읽었다. 가끔 젊은 남자직원들이 모슨 책을 읽느냐고 드여다 보기도 했다. 모 대학교수가 쓴 철학개론을 읽고 있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는 말이 많았으나, 진호가 읽어 보라고 빌려준 것이라 몇가지의 뜻만이라도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야아, 상당히 어려운 책을 읽는데』
이렇게 말하며 도망치는 남자도 있고, 수세미 같이 생긴 T라는 남자는 한바탕 철학이 무엇이냐 하는데 대해서 연설조로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상당히 유식하다고 감탄을 했더니 나중에 어느날 도서실에 있는 철학사전을 펴보니 그의 한 말이 고대로 적혀 있었다. 또 A라는 남자는 월부로 산 세계문학전집 한권을 자진해서 빌려주는 등, 대체로 남자들은 나에게 친절했다.
여직원의 수효는 사오명 되는데, 처음에는 눈동자 색갈이 다른 나를 수소문 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남자들 틈바구니에 몇명 안되는 여자의 수효라 서로 오손도손한 우정감이 있었다.
나는 그들 앞에서 나의 약점을 활짝 열어보였다. 즉 나는 미군 장교가 아버지인 퇴기라는 나의 출생을 미리 광고를 해두었다.
그들은 나를 중상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우정과 호감을 표시해 왔다. 나는 그들과도 곧 친해졌다. 학교는 그러첨 가기가 싫더니 직장은 나에게 즐거운 마당이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총총이 옷을 입고 집을 나설 때면 하루 하루 신선한 호흡이 가슴의 근육속에 부풀어 올랐다.
직장은 마치 하나의 비단 방석이고, 아침마다 뜨는 햇살은 그 비단방석에 수놓을 청실 홍실 같았다.
갑자기 나는 내 생활 전체가 충실해진 듯 했다. 황혼에 직장을 나설 때의 그 흐뭇하고도 가벼운 발걸음의 감촉! 그것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하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동료들은 이따금 영화구경을 가자고 권했으나 「해우」라는 다방 앞에서 6시에 기다리는 진호를 만나기 위해서 나는 그 축에 한번도 끼지를 않았다.
하루는 동료 하나가 「해우」 앞까지 같이 왔다가 보고 나를 부러워 했다.
내가 직장에 나간지 한 보름되던 날 저녁인데 그날도 진호와 「해우」 앞에서 만나서 서로 차값도 아쉬웠으므로 찻집에는 못들어가고 발닿는대로 한동안 걷다가 헤어져서 집에 돌아오니 양부가 찡그린 얼굴로 이런 말을 한다.
『월급을 미리 좀 돌릴 수 없니?』
『처음 들어가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나도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다만…』
양부는 말꼬리를 흐린다.
『…월급이 작아서 어디 쓰겠니?』
양부는 나를 보지 않고 중얼거린다.
(「비어홀」이나 「빠」에 나가란 말인가?)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으나 입밖에 말은 내지 않았다.
나는 건너방으로 돌아와서 머리통을 두어번 흔들고 우울한 생각을 떨어버리는 시늉을 했다.
치료비와 생활비로 돈돈 하는 집안의 분위기 땜에 신선한 내 기분을 더럽히고 싶지가 않았다.
열한시까지 책을 읽으며 진호의 휘파람 소리를 기다렷다. 열한시반이 지나고 자정 「사이렌」이 울려도 매일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돌아올 때 들르던 진호가 그날따라 오지를 않았다.
이튿날 저녁에 「해우」 앞에 갔더니 역시 진호의 자취가 안보였고 그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XX공장으로 찾아갔더니 간밤에 높은데 올라가서 일을 하다가 떨어져서 낙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공장 사람이 일러준 1「킬로」 가량 떨어진 꽤 큰 외과병원에 가보니 진호는 예상한 것보다 입가에 미소를 담고 반가히 맞이한다.
한 이주일간 치료를 요하는 부상인데 자칫하면 오른쪽 다리가 영영 절룩 거릴지도 모른다고 한다. 진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남의 얘기하듯이 말한다.
나는 그후 매일 퇴근 시간에는 병원에 들렀다. 진호는 누워서 언제든지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전과 같이 명랑하게 그와 얘기를 하였으나 속으로는 그의 다리가 걱정이 되었다.
진호는 다리가 불구가 되는 것 보다 앞으로 「아르바이트」에 지장이 생긴 것을 걱정하는 정도였다.
『주님이 계시다면 왜 진호씨와 같은 착한 사람에게 이런 불행을 내리실까?』
하루는 내가 생각던 말을 했다.
『주는 그 사랑하는 자를 시려한다고 하셨으니까?』
진호의 입가에는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괴로움을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할 수 없어요.』
나의 불만을 솔직히 말했다.
이때 진호는 누워서 고개를 져으며 시의 한귀절이나 읽듯이 입을 열었다.
『주의 가호가 없었더면 나는 5「미터」나 되는 높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야!』
그리고 며칠 후 그날은 월급날이었다. 「레지」때는 미리 푼푼히 꾸어다 써서 월급을 받는 기분이 안났었고, 「비어홀」에서는 그날그날 「팊」을 주어 모으기에 바빴던 나로서 봉투에 들은 삼천기백원의 목돈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 돈으로서는 한달 생활에도 부족했으나 액수보다는 사회의 정상적인 대열속에 나도 끼었다는 자부심이 생긴다. 길에서 오십원 주고 꽃다발을 하나 사고, 과일도 사들고 총총걸음으로 병원에 들어섰더니 진호는 침대 위에 앉아서 묵주를 손에 끼고 벽에 달아논 성모상 카드 앞에서 무언지 기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열었던 「또어」를 다시 소리 안나게 닫고 그의 기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들어섰다.
나는 「백」 속에서 아홉들이 빈 잉크병을 꺼내서 물을 떠다 꽃을 꽂았다. 직장에서 휴지통에 들어 간 빈명을 깨끗이 가시어서 미리 「백」 속에 넣고 왔었다. 그말을 듣고 진호는 자개 박힌 고급 화병보다 낫다고 말하며 화병이 된 잉크병을 바라보았다.
과일을 깎아 먹으면서 진호가 무엇을 기구했는가 궁금했다. 다리 때문일 것이라고 혼자 짐작을 하며 병원을 떠날 무렵 물었다.
『아까 무얼 기구했어요?』
『미스양을 위해서』
진호는 야윈 얼굴에 웃음을 담고 나를 바라본다.
『나를 위해요?』2
나는 놀랐다.
진호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주님은 「미스」양을 지켜주실꺼야』
그순간은 별로 감명을 받지 않았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진호의 기구하던 옆 모습과 그의 말이 뇌리에서 되살아낫다. 어쩐지 나는 그다지 믿지 않던 주의 사랑의 빛이 나를 흐뭇이 감싸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날밤 나는 교통비와 용돈으로 오백원을 빼고, 남은 돈을 아버지에게 주고는 행복된 기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여늬때 모양 활기있는 걸음으로 직장에 들어서서 「타이프」 앞에 앉아서 「타이프」의 먼지를 닦고 있자니, S씨가 좋지 않은 기색으로 나타나서 잠깐 얘기할 것이 있다고 하며 응접실로 데리고 간다.
S씨는 매우 난처한 얼굴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한 열흘전에 국장이 __는데 그 국장이 「타이피스트」를 한명 새로 채용했다. 「티오」가 없으므로 「미스」양이 사표를 내는 도리밖에 없이 되었으니 미안하지만 그렇게 알라는 것이었다. S씨는 미리 「타이프」에 찍힌 사직서를 내밀며 도장을 찍으라고 한다. 사직서의 문면을 읽어보니 가정사정에 의하여 사직을 원하오니 허락해 주시기 앙망하나이다 했었다.
『이 글을 보면 저가 원해서 사직하는 거 아니냐요…』
『사직은 모두 그런거야?』
『난 싫어요, 이런 종이에는 도장 안찍겠어요!』
무언지 모르게 분개심과 반발심이 치밀었다.
『그만두라면 그만두겠지만 그런데에 도장은 안찍겠어요.』
나는 이렇게 말하며 내 자리에 와보니 서무과장과 함께 호박같이 생긴 여자가 하나 「타이프」 앞에 빙그레 웃으며 서 있었다. 나는 「백」과 설합의 책을 챙겨갖고 「타이프」 앞을 떠나 밖으로 나왔다. 저만큼 가다가 현대식 그 고층 청사를 한번 돌아보았다. 건물은 깨끗했으나, 무언지 구질한 것이 그속에서 나를 향하여 던져진 것 같은 굴욕감을 느겼다.
『이것이 주의 사랑이고 가호인가?』
나는 힘없이 걸으면서 어제 진호가 기구하던 모습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