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과학자들은 매일 매일의 연구과정에서 천주님을 대면합니다. 신은 바로 그 과학안에 언제나 「액팅」(ACTING)하시거던요.』 이 말은 독실한 신자로 칭송받는 세계적 화학자 알렉시스 이(李泰圭) 박사가 한 이야기다.
9월 20일 미국서 잠시 귀국한 이 박사를 일간신문들이 그를 이구동성으로 「열심한 가톨릭신자」로 부른데 대해 그는 『아니지요. 사실은 구교우집안 태생인 집사람(박인근 女史=金泉출신)에게 나의 신앙생활이 끌려 다녔다.』고 본사 사장 스테파노 김(金壽煥) 신부와의 대답에서 그의 개종담과 오늘의 신앙생활을 설명했다.
일본 유학당시 감리교에 다녀보았다는 이 박사는 개종후나 청년시절에서 오늘까지의 자기신앙을 두텁게 하는데는 정말 돈독한 부인의 신덕이 큰 뒷받침이었고, 박사의 가정이 단란하고 모두가 열심한 경신생활을 하게한 것도 부인 박 여사가 자녀교육에 가톨릭 주부다운 세심한 노력을 쏟았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당년 62세인 이 알렉시스 교수는 자기와 같이 삭막한 물질만을 다루고 연구하는 과학자 생활만큼 정신적 위안을 필요로 하는 것도 드물다면서 『우리처럼 무미한 것만 다루는 생활을 하는 사람일수록 어디엔가 의지하고 싶지 않을 수 없다.』면서 자기가 가톨릭 신자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1927년 일본 「교도」 제국학생시절, 지금은 이북에 납치되어간 정지영씨(이 박사의 대부)의 권유로 성당을 찾아 비로소 자기가 구하던 안식처를 발견했다고 회상하면서
『물론 과학의 계수로 신을 증명은 못합니다.』 그러나 도대체 이사셍이나 과학하는 사람이 『우연이다』 『저절로 생겼다』고 믿을 수 있거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모교서 교수생활을 하며 8·15를 맞았고 그 후 즉시 귀국해서 대한화학회를 세웠고 서울대학서 교편을 잡다가 1948년 연구차 도미한 후 「유타」대학에서 지금도 주임교수로 있으며 화학계의 태두(泰斗)로 세계에 공헌해온 이박사는 1남3녀를 무도 또 과학계에 내보냈다. 「과학과 종교」라는 너무도 흔한 질문을 받고 이박사는 『물론 종교를 과학의 공식으로야 설명못하지요. 그러나 신학이나 과학이 각기대로의 논리를 훌륭히 가졌읍니다. 과학은 어느 시점에서 「점핑」을 하여 모순없는 신학에로의 일치를 합니다.
(마치 과학에도 3차 4차원이 있는 것처럼) 과학이 논이적일 수 있는 것은 자연법칙 그것이 바탕이고 자연 법칙은 바로 신의 의시가 아닙니까?』고 반문하면서 과학안에 생활하시는 천주님은 그의 모든 법칙과 함께 너무도 훌륭하여 사사건건 탄복 않을 수 없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그런데 박사님 생각으로는 과학을 어떻게 이용하면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읍니까?』고 묻자 신부님이 종교아닌 그런것에 관심을 가져주었다고 만면에 웃음을 띠며 다시 열을 띤 어조로 과학과 산업발전을 함께 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생활 주변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쓸 수 있는가?를 애써 찾고 연구 · 발전시켜야 하며,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힘차게 말했다. 『과학자라고 불러주는 내눈에 비친 16년만의 조국은 분명히 그리고 천양지차로 전했다.』는 것이며 이러하니 우리도 꼭 잘 살 수 있다고 굳게 믿고있었다.
체한 1개월간에 11회의 강연과 25개처의 학교 · 연구소 및 공장 등을 시찰한 이교수는 우리과학계도 이젠 제궤도에 올랏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서 남은 것은 「과학하는 백성」이 돼야겠다고 전국민이 믿고 실천하는 길 뿐이라는 것이다.
언제 귀국할지는 확실치 않으니 잘못 말했다가는 『신부님께까지 거짓말하게 되니 확약을 못하겠다.』는 노 화학자는(화학계 인사에 의하면 박사가 곧 귀국 못하는 이유는 국내 연구시설 등의 미비한 것이 원인이라 한다) 서강대학을 극구 찬양하고 가톨릭도 이제 4개 대학을 세웟으니 정말 만족스럽고 『신부님의 제의로 힘이 닿는데까지 가톨릭과학도를 미국에 유학시킬 길을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아일보사와 대한화학회 공동 초청으로 9월 20일에 귀국한 이태규 박사는 10월 20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