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信徒(평신도) 눈에 비친 美國(미국) 겉 핥기錄(록) - 美國(미국) 가톨릭 안팎 (32) 검정 김치
발행일1964-11-01 [제445호, 3면]
미국에 온지 몇10년이 됐다는데도 김치의 맛을 잊지못하고 있는 한국인의 생리가 있다.
냉장고 한구석에는 잘 밀폐된 유리병에 담가놓은 김치가 있다.
매일 먹는 부식이 아니라 특별한 별식으로 준비했다가 동포가 손님으로 오면 내 놓기 마련이다.
물론 김장김치 모양으로 다채로운 양념을 넣은 것이 아니다.
기름기 많은 서양음식만 먹다가 한국김치를 먹고나면 한결 개운해지고 입이 개운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음식생각이 나면 염치 불구하고 뉴욕 101가에 살고있는 김상만씨댁을 찾곤했다.
아가다 아주머니는 「우리들」의 한국식 위장을 위해 갖가지 시중을 해주었다.
「우리」란 대구이 김 가오로 신부와 대신학교 부학장인 김창렬 신부를 가리킨다.
우리는 가끔 전화로 김상만씨 댁을 급습하자는 모의를 했고 이 뜻을 김씨댁에 전달하는 섭외는 번번이 창렬신부가 맡았고 굩통제공은 동한 신부가 도맡고 나는 번번이 입과 한국을 잊지 못하고 있는 「위장」만을 준비하고 가곤했다. 가정방문의 「에치케트」를 위해 예약전화를 맡은 창렬 신부는 번번이 그 절차를 밟기 위해 가벼운 고민까지 하곤 하였다.
『김선생님 댁입니까? 동한 신부랑 태민씨가 또 친정엘 가자고 하는군요… 네, 네, 아이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김상만씨댁을 친정이라고 불렀고 아가다 아주머니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불고기 한점을 자시고는 『아니 정말 아가다의 요리의 솜씨가 보통이 아냐』를 서너번씩 연발하는 김동한 신부.
상치쌈과 생선회를 양념초장에 찍어 눈물겹도록 자시다가 그만 배탈까지 난 실적마저 갖게된 창석 신부는 다음주 「스케줄」을 꾸미시느라고 머리를 써야만 했다.
아가다 아주머니와 김상만씨는 「뉴욕」 주재 구매관으로 있다가 그만둔 뒤로는 그리 유복한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 「3총사」(?)들을 곧잘 맞아 주었다.
몸이 약한 아주머니는 우리들을 위해 한국 식탁을 마련해 놓고는 가끔 코피를 흘리곤 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집요하게 방문을 한 우리들이었다. 참 고마운 삼총사의 친정이었다.
우리는 그다음부터는 약속시간 전에 가서 콩나물 깍지를 벗기기도 하고, 생강과 마늘을 사기도 했다. 부엌일을 돕는다는 미명아래 부엌 옆 식당에 가서 「한국의 전통론」을 말하기도 하고 「고독론」을 이야기 하면서 김이 훨훨 오르고 있는 「담북장」에 군침을 삼키군했다.
나는 여기서 자취생활의 지도를 받았다. 미국에서도 큰 도시에서는 한국 음식을 해먹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고추장도 있고 진간장도 있고 마늘, 파, 생강, 김장용 배추 그리고 두부, 콩나물, 숙주나물 심지어는 새우젓(잘 삭지 안했지만) 잘 삭은 멸치젓도 팔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김치를 담그어 봤다. 소금은 어떻게 간을 맞출 수 있었지만 맛있게 한번 해보겠다고 필립핀제의 멸치젓을 넣다가 그만 「아파트」주인한테 들켜 나는 무슨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모양으로 재빨리 멸치젓병이 마개를 막고 이상야릇한 웃음을 띠었다.
주인은 잠시 웃는듯 하다가 바로 안색이 변하더니 『아니 이게 무슨 냄새요?』하고는 코를 손가락으로 꽉쥐고는 나가버린다. 잘 삭은 고랑젓 냄새가 그들에게는 「독가스」나 되는 것처럼 느껴진 모양이다. 난 시치미를 떼고 주인없는 틈에 김장작업을 계속했다. 이런 모험을 해가면서 만든 처녀김치(?)는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젓국물 넣는 비율과 생강이나 마을을 넣는 손대중이 없기 때문에 조그마한 병에 젓국물과 생강을 너무 많이 쳐서 그만 김치 빛갈이 먹물처럼 되어 검정 김치가 되고만 것이다.
국수도 그 굵기가 40여종이나 된다. 한국서 먹던 국수같은 것을 찾으려면 번호를 알아야 한다. 자취를 해보니까 서양음식의 반값으로 살 수가 있는 것을 알았다.
한국에서는 몸에 좋다고 귀히 여기는 쇠꼬리라든지, 집에서 닭을 잡으면 의례히 어른상에나 놓게 되는 닭의 똥집이라든지, 대폿집에서 인기 좋은 족탕용 소나 돼지의 다리 같은 것들이 미국서는 형편없이 싸다.
고깃간에는 비니루봉지에 닭다리는 달다리대로 똥집은 똥집대로 열개정도 모아 이렇게 분류해서 팔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난한 한국유학생들은 즐겨 꼬리 곰탁국을 매일 먹다싶이 하고 닭똥집의 조림을 곧잘 해먹는다.
꼬리곰탕 끓이는 법도 이웃에 사는 연대교수 P씨한테 「코치」를 받았다. 큰냄비에다 쇠꼬리를 넣어 「가스」불을 조그맣게 틀고 네시간 동안 조리고 먹을만큼 먹고는 나머지는 아가리 넓은 유리병에 넣어 냉장고에 보관해둔다. 하루는 P씨가 우리 「아파트」에 놀러오는데 흰고체가 든 병을 갖고온 적이 있었다. 『뭣이냐?』고 물었더니 『이것말요? 이것 곰탕이죠』하는 것이었다.
언제든지 먹고싶을 때는 굳은 이 곰탕덩어리를 수저로 파내어 불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바쁜 생활하는 P씨나 게으른 나같은 사람에게는 꼭 알아둘만한 속성조리법 같기만 했다.
어떤 유학생이 가끔 쇠꼬리를 사가니까 식료품 상점원이 『선생님댁엔 개를 몇마리나 기르시기에 이렇게 바쁘게 사가십니까?』하더라는 소릴 듣고서야 「한국의 꼬리곰탕」도 눈치껏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