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71) 生活(생활)과 意志(의지) ④
발행일1964-11-01 [제445호, 4면]
며칠후에 나는 ○○의료기구 제조회사의 종업원이 되었다. 내가 퇴근할 시간에 진호는 일하러 왔다. 야근하는 사람은 진호를 넣어 두사람 정도였다. 진호가 하는 일은 주로 외국제 의료기구를 본떠서 만들 수 있도록 도면설계를 하고 있었다. 가끔 그의 옆에서 일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일이 끝날 무렵까지 책을 읽다가 같이 돌아오기도 했다.진호와 나 사이는 결혼문제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했으나, 이심전심으로 우리는 서로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딕슨은 한국을 떠날 때 울면서 떨어지기를 슬퍼했었다. 그러던 그가 일단 모국으로 돌아가자 깨끗이 외면을 하고 말았었다. 특히 떠나던 뱃길에서 편지마다 『아이 러브 유』를 되풀이하던 그에 비하면 진호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않으면서, 그의 애정은 눈이 녹아 땅 속에 스며들듯이 내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나의 외로운 인생길의 길동무는 진호 하나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그가 직장으로 올 시간이 되면 생기가 돌았다. 나에게는 하루를 매듭짓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누가 묻는다면 그 순간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산다고 하고 싶었다. 산다는 것이 크게 의미를 깨닫게 한 것도 진호의 흐뭇한 애정이었다. 나의 한달 월급은 불과 3·4천원이었고 아버지는 신에 안찬 표정이었으나 나의 허전한 마음의 공간은 따뜻한 양지가 깃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이 양지에도 검은 그림자가 깃들기 시작했다.
두달째 월급이 일주일이나 밀리더니 우리의 직장은 자금난으로 갑자기 문을 닫게 되었다.
진호와 나는 겨우 월급의 반액을 받고 거리의 고아가 되어버렸다.
직업을 잃은 타격은 가슴이 아팠으나 사랑의 믿음이 있는 내 마음의 양지를 지워버리지는 못했다.
때는 마침 십이월중순 경이다. 거리는 「크리스마스」 앞경기가 요란스러웠다. 「크리스마스 카드」와 「츄리」가 쏟아져 나오고 양과자점에는 교회의 형을 뜬 큰 「케잌」이 「윈도우」에 장식되고 상가는 흥청거렸다. 「크리스마스」 기분은 해마다 짙어가는 듯 했다.
『몇년전만 하더라도 「크리스마스」는 쓸쓸히 왔다 쓸쓸히 갔는데 이제는 서울도 그렇지가 않아! 주의 탄생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두터워졌다는 증거야….』
진호는 기뻐했다.
『우리는 거리의 고아가 되었으니 「크리스마스」 축복을 못받았지 뭐여요!.』
나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엄청난 정가가 붙은 어느 양과자점 진열장의 커다란 「케잌」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크리스마스」는 남을 위하여 축복하는 날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남을 축복할래도 비싼 「케잌」을 살 수 없는 우리는 남을 축복할 수도 없지 않아요?』
『…왜 우리에게 「케잌」 살 돈이 없어. 하나 살까? 조그마한걸로』
진호는 웃으며 말했다.
『누구 주려구요? 진호씨의 양친께!』
『아니 「미스」양의 아버지께!』
『…그만두어요?』
나는 머리를 저었다.
양부는 「케잌」을 좋아하지만 돈벌이가 적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지라, 나는 「케잌」을 들고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며칠전에도 양부는 이런말을 하였다.
『진혼가, 그 사람하고 너무 가까이 하지마라! 마음을 주지는 말아라, 여자는 돈있는 집에 시집 잘가는 것이 제일이다. 너의 짝은 아버지가 고를테니 아예 네가 단독으로 정할 생각은 말어라!』
양부의 표정은 위협적이었다. 그때 나는 양부에게 아무말도 안했다. 반대했댔자 얘기만 길어질 것 같아서, 속으로만 내 생각을 굳게 지니고 양부의 말은 똘똘말아 내던졌다.
『진호씨의 양친에게 갖다 드릴려면 사세요!』
『집이 어머니는 외려 그런걸 사오면 야단을 하셔! 그돈으로 「노트」 한권 책한권이라도 사라고 하시니까!』
우리는 복잡한 거리의 물결 속을 천천히 걸었다.
종로2가에 왔을 때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소녀가 진호를 보고 아는 척을 한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니, 너 복희 아니냐? 지금 어디 사니?』
『청량리 밖에 살아요!』
『어머니 안녕하시고 동생들도 잘있니?』
『네에』
『지금도 야학에 다니니?』
『다니다가 그만두었어요!』
『왜?』
『놀고있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가 없어요!』
『먼저 다니던 곳은?』
『사환은 안쓰게 되어서 그만두었어요?』
『그럼 지금도 어머니가 바느질 하시니?』
『네에』
나는 이 대화에서 소녀의 환경에 대강 짐작이 갔다.
『누구야요?』
진호에게 나직히 물었다.
『우리 이웃에 살던 아이야…』
진호는 길가의 달구지에 잔뜩 쌓놓고 파는 과자를 80월주고 한근 하서 소녀에게 들려준다.
소녀는 처음에 안받으려고 하다가 진호가 가슴에 안겨주니깐 얼굴을 붉히며 받았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몇번씩이나 하고 과자봉지를 들고 돌아가는 소녀의 뒷모습은 내 눈에도 흐뭇했다.
진호는 그 소녀가 사람 틈에 사라질때까지 입가에 미소를 담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오늘밤 저애를 만난 것이 참 다행이었어!』
『왜요?』
『만약 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애는 아무것도 손에 들지 못하고 집으로 가야했을거 아냐요, 몇푼어치 안되는 과자나마 내가 사줄 수 있었다는 것이 기뻐요. 저런 아이들한테 주의 축복을 빌고 싶어요.』
진호는 이렇게 말하며 성호를 그었다.
받는것에 대한 기쁨보다 주는 것에 대한 기쁨을 나는 진호의 얼굴에서 느꼈다. 받는다는 것에 주려있던 나는 지금까지 주는 기쁨이란 것을 몰랐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진호에게 무엇인가 나의 것을 주리라고 맘 먹었다.
집에 가서는 아직 월급을 못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반액받은 월급을 감추어둘 생각을 했다.(그런데 내일부터는 어떻게 할까?)
나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었다.
경제적으로 핍박한 집안에서 양부의 얼굴을 마주보며 도사리고 앉았기도 우울했다.
(진실로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이것이 불안한 내일을 비치는 빛갈이었다. 이 빛갈이 꺼지지 않는 이상 나는 견디어 나갈 결심이었다.
진호와 헤어져서 집에 들어서니, 손님이 온 기색이었다. 밖에서 양부에게 왔다는 기척을 보내고 건너방으로 들어갔다.
조금후에 양부가 건너와서 건너방에 온 손님과 인사를 하라고 한다.
『누구야요?』
『젊은 사람인데 아주 유능하다. 앞으로 내 일도 도와주겠다고 한다. 너를 가끔 길에서 보았다고 하는데…』
양부는 말을 낮춘다.
『…너와 결혼하고 싶어한다. 와서 한번 얼굴이나 보아라!』
『내가 어느새 결혼이야요?』
나는 꽁무니를 뺐다.
『당장 결혼하자는 것이 아니니, 얼굴이나 알아두고 인사쯤 하기 뭐 어렵니?』
양부가 잡아끄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먼저 가계시라고 하고 조금 후에 안방문을 들어섰다.
사나이는 이마박이 밭으며 눈에는 흰자위가 많았다. 옷은 비교적 단정하게 입었으나 어딘지 거칠고 부드러운 교양같은 것이 없어 보였다.
나는 입 없는 돌같이 말한마디도 않고 방바닥을 본채 가만히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