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재일치」란 표지(標識)는 이 지상(地上) 교회가 그 일치를 온전히 실현하는 날까지 산 이념(理念)으로써 우리들에게 임할 것이다. 그럴것이 교회의 일치를 반대하고 나설 사람은 교인(敎人)중에 신자치고서 크리스챤이라면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상 크리스챤이란 하나이신 하느님을 믿고 한분이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서미기에 하나인 세(洗)를 받은 사람들의 호칭(呼稱)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를 염원(念願)하고 실현하려는 마당에 있어서는, 대화(對話)의 필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가능성 여부도 논하기 보다 먼저 대화가 가능하도록 애써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대화가 이루어질 것인가? 보다도 어떻게 하면은 대화할 수 있게될 것인가? 무릇 대화는 이해(理解)를 예상(豫想)하고, 이해는 오해를 풀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실지에 있어서는 첫째 대외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우리들은 외교인(外敎人)들에게 많은 오해를 주어 왔고, 지금도 오해를 풀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소위 하느님을 믿는다는 교인들이 서로 갈리고 나누어져 있고, 사랑의 교회안에 분열된 형제가 서로 상종도 안하고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두고 우리들은 전교할 때에 외교인 즉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뭐라고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둘째 대내적으로 반성해 볼 때 가톨릭신자나 프로테스탄 교인을 막론하고 나로서는 그 신심생활면에서 이해가 안가는 점이 없지 않다. 전자로 말하면 성경을 알아보지 않음이요, 후자로 말하면 성사(聖事)를 몰라본다는 점이다.
도대체 천주를 믿고 바로고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어찌 천주의 말씀을 볼라보고 그렇게 할 수 있으랴?
요리문답(要理問答)에도 첫머리에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라고 밝혔는데, 신자로서 천주를 알고, 잘 알고, 더욱 더 잘아는 길중에 제일 가까운 길은 천주의 말씀을 읽어보고 그 말씀의 뜻을 생각해보고 그 천주의 말씀을 알아들은대로 행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 웟도 모르고 믿는 것보다 어떤 것인지 알고 믿는 것이 더 확고(確固)할 수 있는거와 같이 천주를 사랑한다 함에도 알면알수록 더욱더 열절(熱切)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천주를 바라는 사람이 기구(祈求)하고 간구(懇求)하고 간청(懇請)만 하고 천주의 말씀을 떠들떠 보지도 않고 익히 보지도 않고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면 천주께서도 좋와하실 리가 있겠는가? 성경을 본다는 것은 천주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천주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는 무슨 책보다도 성경을 애독(愛讀)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느님을 진실히 믿기에 성경책을 애독한다는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예수님의 말씀중의 말씀인 성체성사(聖體聖事)를 도무지 몰라보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나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말을 들어보면 화체설(化體說)이니 상징(象徵)이니 기념(紀念)이니 하는데, 이렇게 되고 보면 소위 신학자(神學者)니 산학설(神學說)이니 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들의 순진한 믿음을 어지럽히고, 겸허(謙虛)한 신앙을 왜곡(歪曲)하는 결과를 자아내는 역할 밖에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니, 아무나 제멋대로 해석(解釋)하거나 마음대로 풀이하기 전에 말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닌가 절대적(絶對的)이고 전능(全能)한 말씀 앞에 무슨 구구한 설(說)과 상대적(相對的)인 이견(異見)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묻노니 예수님은 무엇때문에 「최후의 만찬(晩餐)」을 베푸셨는가? 무슨 생각으로 예수님은 뒤에 남을 제자들 곧 사도(使徒)들에게 그와같은 말씀을 하시었을까? 당신의 말씀과 같이 주시는 살과 피를 받아 먹어라 받아 마시라, 이를 행하라, 함은 무엇을 뜻함일까? 갓난애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사랑과 비길 바도 아닌 그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다면은 대관절 성경말씀을 어떻게 읽고 알아듣는다는 것일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끝으로 세간(世間)에 들리는 말에 귀기울일때 크리스챤들은 가톨릭 프로테스탄을 포함하여 각자 자숙(自肅)해야 할 점을 나로서는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그 하나는 가톨릭신자가 갖는다는 신교(信敎)이고 또 하나는 프로테스탄 교인들이 자칭하는 신교(新敎)란 낱말이다. 세상에 암만 「빽」이 좋다해도 하느님 앞에서는 그 「빽」이란 맥을 못출 것이다. 신앙은 각자의 영혼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정환경이 좋와야 물론 자녀들도 잘 자라 차하게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 자녀들이 모두 다 잘된다는 것은 아니다.
종교란 영원한 절대자(絶對者)인 신(神)에 관련된 것이다. 하느님 앞에 무슨 신교(新敎)가 있고 구교(舊敎)가 있겠는가?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 안에 또 무슨 새로운 교가 있고 낡은 교가 있겠는가? 도대체 문자(文字) 그대로 신교 구교에 해당하는 유럽말을 영 · 독 · 불 사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인가? 제삼자인 믿지않는 사람들은 신교니 구교란 말만 듣고 그 낱말 어의(語義)대로 새겨듣는 이가 태반이다. 참으로 우리한국 -아마 일본에서도- 에서나 볼 수 있는 답답한 것 중의 하나다.
왜 그런 중대한 낱말을 허투루 마투루 내세우는 것일까> 심지어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뿐만 아니라 교단에서도 강의중에 번역어도 아닌 막말을 쓰는 것일까? 부지(不知)의 소치(所致)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다 아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는 양선(良善)함과 겸손(謙遜)함을 나에게 배우라고.
金奎榮(東國大學校 철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