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自由(자유)와 無規律(무규율)
(承前) 1930年傾까지도 物質主義의 權化라고 할 수 있고, 「프락마티즘」 誕生地이며, 進步主義 敎育 運動의 發生地 美國의 이러한 精神主義的 敎育이 나타나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 있다. 그러나 膨脹一路를 걷고 있는 物質主義 理論에 대한 反動이 필경 오고야 만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學習이란 苦痛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듀이의 追從者들은 그의 哲學을 歪曲하여 40年間 美國敎育을 改造하는 한가지 理由가 그들이 생각하는 敎育은 學生이나 敎師들 兩者가 모두 比較的 苦痛이 적은 것을 追求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美國에 있어서 듀이도 역시 參與한 所謂 進步主義 敎育이 盛行하게된 重要한 理由는 學生들이 學校 안에서 滋味있게 놀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데 美國과 같이 兒童中心의 社會에 있어서 學校에서 苦痛을 주는 일을 强調한다는 것은 당연히 어떤 抵抗을 받기 마련이다.
自由와 無規律의 同一視는 「컬럼비아」大學校의 버틀러씨의 약간 어마어마한 말을 빌리면 「토끼교육 학설」이라는 것이다.
『어떤 아이들일지라도 둘러싸인 들판을 돌아다니기를 좋아하게 되고 여기 저기서 어떤 꽃나무 뿌리나 풀뿌리를 조금씩 씹어 먹이면 잠시동안 그의 注目을 끌거나 그의 食慾을 刺戟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버틀러씨는 말을 좀 바꾸어서 다음과 같이 附言하였다.
『이러한 種類의 敎育事業을 進步的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自己네들이 낯선 바다위에 航海圖나 羅針盤 혹은 심지어는 키(𦩋)도 없이 바다에 떠 있다는 것을 暴露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分明히 「키」도 갖지 않는 토끼들이 現代世界의 混亂을 통해서 우리들을 끌고 가는데 依支해서는 안된다. 學生들을 經濟的으로 獨立하게 해주는데 우리들의 努力을 集中함으로써 自由精神을 達成할 수 있을지 疑心스럽다.
우리들은 利益을 順序에 의거하여 얻으려고 하는 自由精神을 바란다. 主로 自己네들의 私的 經濟的 利益만을 追求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奴隸가 되고 또한 우리들을 奴隸化 하려고 애쓰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自由精神을 원한다고 할 때 그것은 올바르게 움직일 줄 아는 精神을 우리들이 바란다는 것을 意味한다. 人間精神이 가지는 長点과 短点은 그것이 어떤 일을 決定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음대로 좋은 일과 나쁜 일에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움직이는 自由가 되기 위해서는 精神은 그것을 좋은 일에 固定시켜 주는 習慣을 要求한다. 그러기 때문에 聖 아우구스띠누스는 德이나 좋은 習慣은 우리들의 自由의 올바른 使用法이라고 말하였다.
自由精神에 必要한 것은 紀律, 즉 精神을 올바르게 움직이게 하는 習慣을 形成하는 紀律이다. 그러니 自由精神은 무엇보다도 먼저 단련된 精神이다. 교육에 있어서의 첫 段階는 좋은 習慣을 精神에게 준다는데 있다. 自由精神의 敎育에 있어서의 다음 段階는 무엇이 善인가 하는 것을 理解하는데 있다. 精神은 만약 그것이 惡의 奴隸일 때 自由로울 수가 없다.
反面에 精神이 善의 奴隸일 때 自由로운 것이다. 善과 善의 順序를 決定하는 것은 모든 道德的 敎育의 제일 첫째 目標이다. 이러한 問題와 부딪친 적이 없는 사람이 좋은 市民이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을 바랄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問題에 부딪치지 않고서 大學校의 最高 知力에 到達하는 것이 完全히 可能하다.
이러한 問題를 그 關心의 中心으로 하지않는 敎育制度는 전연 敎育制度가 아니다. 그것은 대규모의 建築 모험이다. 그것은 젊은이들이 職場을 가질 때까지 나뿐 場所에 가지 않게 하는데 效果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自由精神의 生長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젊은 世代가 現代의 重大問題를 해결하는 것을 돕지도 못한다. 우리들의 時代의 重大한 問題는 道德的, 知的 그리고 精神的 問題이다. 많은 財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以前보다 더 행복하지 못한 것은 이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 敎科課程과 個人差에 대한 迷信
個人차에 대한 迷信은 美國敎育이 가지는 根本的 迷信의 하나이다. 이것은 即 모든 사람은 相異하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相異한 敎育을 必要로 한다. 따라서 그 敎育이 어떠한 見地에서 同一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은 相異하다는 事實을 無視하고 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同一한 책을 몇권 읽는 것이 좋다고 아무도 示唆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은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책을 읽는 것이 좋은 것이다. 이와같은 迷信은 美國의 敎育者들의 精神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은 大學의 總長마저 本校에는 敎科課程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자랑하는 소리를 때때로 듣는다. 學生들은 各者가 自身의 個人的 必要와 興味에 適合한 學習課程을 짠다는 것이다.
18歲의 學生에게 그 自身이 받을 敎育의 實際 內容을 스스로 決定할 것을 許容하는 것이 좋은가 어떤가 하는 問題는 時間을 끌면서 길게 論議할 것이 못된다. 우리들은 젊은이의 知力을 過小評價하는 傾向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經驗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의 經驗이라든가, 그들의 興味와 必要라는 表現의 意義를 過大評價 하는 傾向이 있다. 敎育이 무엇인가에 대해 敎師들은 그들의 學生들보다 더 잘 알고 있어야 한다. 敎育의 技術은 大部分의 사람들이 當然히 興味를 가져야 하는 事物에 興味를 갖도록 하는데 있으나 實은 그렇지가 못하다.
『교육의 任務는 먼저 敎育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發見하고, 다음에 學生들의 興味를 그 方向으로 引導하는 方法을 發明하는데 있는 것이다.』
도대체 敎育이라는 것이 存在하느냐? 個人差라는 迷信을 信奉하는 사람들의 答辯은 『없다』는 것이다. 相異한 個性을 가진 사람의 數만큼 相異한 敎育이 存在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必要한 혹은 適合한 一定한 敎育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權威主義的」이라는 것이다.
만약 어떠한 共通의 計劃이 不可能하고 또 모든 사람들이 받아야 할 敎育이라는 것이 存在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共通社會의 成立도 不可能하다는 것을 是認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文明은 하나의 生活水準이 아니며 또한 生活方途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共通的 理念을 追求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人間은 相異하지만 역시 人間은 또 같은 것이다. 우리들은 모든 專門家가 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모두 人間이 되어야 한다. 專門家 養成을 위한 오늘날의 廣範한 設備가 이루어지고 있고 專門化가 가져오는 分離的이며 崩壞的인 影響, 그리고 統一과 共同社會를 實現하는 것이 대단히 必要하다는 見地에서 비추어 볼 때 今日의 危機는 人間의 相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共通性에 重点을 두는 敎育을 먼저 要求해야 한다.
우리들은 지금 個性보다 오히려 우리들의 共通의 人間性을 끌어내어 주는 敎育을 必要로 하고있다. 個人差는 敎育을 하는 方法이나 혹은 그후에 오는 專門을 택하는 境遇에 考慮되어야 하는 問題인 것이다.
■ 敎育의 即刻的 必要의 充足
敎育은 卽刻的 必要를 充足시켜야 한다는 進步主義 敎育學說이 들어옴으로써 우리들의 敎育制度를 더욱 混亂으로 몰아넣었다. 만약 敎育의 目的이 敎育받는 사람의 卽刻的인 必要를 充足시키는 것이며, 또 學校를 卒業하면 그 以上 결코 敎育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學校에 있는 동안에 後日 必要하리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卒業生들이 後日 무엇을 必要로 할 것인가에 대하여 豫測하는 방법은 없으니, 唯一한 방법은 그가운데서 조금이라도 有用하리라고 期待되는 것을 모두 조금씩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美國의 高等學校나 大學에서는 曲藝로부터 釀造學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각할 수 있는 題目에 대한 여러가지 斷片的知識(INFOMATION)을 꽉 채우는 곳으로 되었다. 그 理由는 學生들 속에서 將來 曲藝師나 혹은 釀造家가 되는 者가 없다고 아무도 斷言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敎育課程이 基礎를 「有用한」 知識에 두는 傾向이 濃厚하여 졌다. 만약 여럽누들이 어떤 少年으로 하여금 2流의 簿記員이 되게끔 가르칠 수 있다면, 그 少年은 여러분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또 여러분들도 滿足하게 생각할 것이다. 反面에 正義의 性質, 國家에 관한 學說 · 眞理의 問題, 그리고 神의 存在게 관하여 그 少年과 討論을 하여도 그의 經濟的 將來와는 그다지 直接的인 關係가 있는 것 같지 않다. 만약 여러분들과 그의 經濟的 興味를 어느 程度 修正하는데 成功하고, 그를 이 世上에 適合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을 말한다면 아마도 가장 좋은 方法은 이 世上에 關한 케케묵은 知識을 그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젊은이들을 그들의 環境에 適應시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만약 敎育의 目的이 有用한 智識을 傳達하는 것이라면 우리들은 당장에 敎育事業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얼마전에 헨드릭 반 룬이 말한 結論을 是認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기를 『오늘날의 世界에 있어서 교육자들은 靑年들에게 傳達할 수 있는 確固한 또는 妥當한 知識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是認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룬」씨는 옳은 말을 하였다.
만약 知識이라는 것이 同時代의 事件에 關한 斷片的 知識(INFORMATION)이라면, 우리들은 敎育으로부터 물러서야 한다. 왜냐하면 靑年들에게 傳達할 수 있는 確固하고 또 妥當한 知識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有用한」 斷片的 知識에 基礎를 둔 敎育思想으로 因하여, 오늘날 美國에 있어서 哲學博士 學位를 다음과 같은 硏究論文으로 獲得할 수 있게 되었다. 即 『「햄」(돼지고기 요리의 일종)을 料理하는 네가지 方法』, 『접시를 씼는 네가지 方法』 等等.
헛친스 博士는 『敎育은 職業訓鍊과 同一한 것이 아니다.』라고 主張하며, 敎育과 職業訓鍊의 差異는 知的이냐 아니냐에 달려있다고 한다. -계속-
李鍾學(공군사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