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87) 虛實(허실) ⑩
발행일1965-03-07 [제461호, 4면]
일주일 쯤 지난날 저녁 비가 부슬 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구두닦이 목판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양장점 앞을 몇 발자국 떠났을 적에
『이 안으로 들어 오세요!』
하고 양산을 내미는 사람이 있다.
승우가 얄팍한 입술에 웃음을 담고 서 있었다. 나는 주춤하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양산 속에 들어갈 일보다는 그가 우정 온 것인지,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것인지 궁금했다.
승우는 우두커니 섰는 내 앞으로 와서 양산을 씌워주었다.
『비닐 우산 파는데 까지만 씌워주세요』
나는 말했다.
『왜 나하고 같이 쓰는 것이 싫어요?』
승우는 지긋이 나를 본다.
『양가집 도령님이 구두닦이 여자하고 같이 다닐 수 없지 않아요?』
『나는 일부러 온 거야!』
승우는 쌍꺼풀진 커다란 눈에 미소를 담고 말한다.
『어머니한테 꾸중 들으실려구?… 어서 혼자 가세요.』
나는 이렇게 입으로는 말했으나 많이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을 피하여 그의 옆에 바싹 다가 섰다.
『낯선 사람이라도 이렇게 내리는 비에 같이 쓸 수 있는 건데, 「미스」양을 우산 밖으로 내 쫓으란 말인가?』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던가요?)
입 끝까지 이 물음이 나오는 것을 삼켜 버렸다. 물으나 마나 그날 밤 내가 한 말이 그의 기에 들어갔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승우의 표정에는 이상하게도 그런 흔적이 엿보이지 않았다.
『정말, 우정 나를 만나러 오신거에요?』
나는 그의 심리가 궁금했다.
『「미스」양이 보고 싶어서!』
승우는 매력적인 그 입술에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담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했다. 보고 싶다는 말을 들으니 어제 까지 멀어졌던 승우가 지금 같이 몸을 바싹 대고 걷는 만큼 가까와 진건만도 같다.
고독한 나의 광장에서 그의 한마디는 진실이고 나이고 간에 등불을 하나 켜준 것 같았다.
『승우씨, 우리는 친구는 될 수 있을 거에요. 그렇조?』
『물론이지! 차나 한잔 마실까? 혹은 저녁식사를 할까?』
『이왕이면 저녁이나 사세요!』
나도 가벼운 기분으로 말했다.
그는 깨끗한 양식점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음식이 날려왔을 때, 나는 마치 집에서 먹듯이 입도 크게 벌리고 조심성 같은 건 집어 던지고 맘을 푹 놓고 먹었다.
『퍽 시장했던가 보군요?』
승우는 얄팍한 입술에 조금씩 음식을 집어 넣으면서 나를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양 영화에 예복입은 신사가 점잖은 만찬 자리에서 음식을 먹듯 했다.
『나는 구두닦이니깐 이렇게 막 먹어요』
나는 이마 너머로 그를 보며 웃었다.
『나는 양가의 딸이 아니기 잘 했어요. 승우씨 같이 좋은 가정에 태어났으면 음식도 얌전하게 먹어야 하잖아요. 얌전을 빼며 음식을 먹으면 맛이 없어요.』
『사실은 나도 집에서는 「미스」양 같이 먹어요』
『왜 그럼 여기서는 그렇게 안자세요?』
『체면 차리느라고 그러는 거죠!』
승우는 싱긋이 웃으며 말한다.
(이 남자, 솔직한데)
나는 속으로 은근히 승우에게 전에 없던 호감이 갔다.
그러나 그와 사이에 나는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문득 그 강을 메워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가 이렇게 찾아온 이상 다리가 놓인 거나 같지 않은가?
『난 비오는 날이면 가고 싶은 데가 있어요.』
『어디?』
『영화관… 영화관에 들어가면 궂은 비를 느끼지 않아도 되거든요.』
『그럼 영화보러 갑시다.』
승우는 양식점을 나오자 택시를 잡아 극장으로 가자고 운전수에게 말한다.
그의 어머니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으나 나는 곧 지워버렸다.
어머니한테서 내욕을 들었을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을 보면 내가 싫지 않은 모양이다.
영화관을 나오자 마침 비가 개었길래 나는 슬슬 걷자고 하며 그와 걸었다. 그의 손이 살며시 나의 어깨에 닿는다.
(내가 야릇한 환경에서 출생하지만 않았더라면 부모들의 축복을 받으며 떳떳이 이렇게 걸을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의 상처가 다시 쑤신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할 수 있겠어요?
입에서 뱅뱅도는 이 물음을 입밖에 내기가 두려웠다.
『남이 보면 사랑하는 사이인 줄 알겠는데요?』
나는 그의 반응을 엿보며 말했다.
『…왜 인줄 알겠다는 그런 표현을 해요?』
내 어깨에 닿은 승우의 손은 아까 보다 강한 압력을 준다.
(승우씨는 나의 모든 상처를 이해해줄 사람인가 보다)
나는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며 고독한 내 그림자를 그의 손에 의지하고 싶어졌다.
이날 밤은 이대로 헤어졌는데 꺼졌던 불이 내 마음에 다시켜지고 말았다.
이튿날 저녁이 되자, 나는 은근히 승우가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손도 씻고 손거울을 보며 얼굴에 묻은 검정과 먼지도 손수건으로 닦아 냈다. 아닌게 아니라 다섯시반쯤 되자 그가 나타났다.
그의 애인이 될 희망을 안고 보니 내 꼴이 초라하게 돌아다 보였다. 그날도 우리는 또 다른 양식점에서 식사를 같이 했는데, 어쩐지 어제 모양 입을 크게 벌리고 음식을 먹지는 못했다. 식당을 나와서는 좀 걷다가 다방을, 다방에서 한시간 쯤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왔다.
승우가 주로 이야기를 하고 나는 들었다.
그의 얘기는 한층 나에게 희망을 돋워주었다.
그의 얘기를 요약하면 결혼에 있어 부모의 의견이란 참고는 될 망정 결정권은 본인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이튿날은 구두닦이를 그만두고 그가 나타날만한 시간에 「스츠」에 「하이힐」을 신고, 양장점 앞으로 가서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깜작놀랐다.
눈이 부신 듯이 내 모양이 맘에 드는 듯이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와 나의 옷모양은 매우 어울렸다.
길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우리 위를 스친다.
행복한 한쌍의 젊은이들로 보이는 모양이다. 내 자신도 짐짓 행복의 지름길로 들어선 것도 같았다.
식당, 다방, 산책! 시간은 행복되게 흘렀다.
우리는 또 다음날도 만나기로 약속을 나누고 헤어졌다.
이튿날 저녁 나는 그와 만나기로 했던 어제 갔던 다방에 들어갔는데 두 시간이나 기다렸으나 그는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 시간에 그 다방에 않아있었으나 그는 나타나지를 않았다.
나는 그가 병이라도 나서 집에 누워있는 건만 같아서 진호를 찾아갔다.
진호한테 얘기를 하기는 거북했으나 그밖에 알아 볼 길이 없었다.
진호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프지 않아요. 결혼 말이 나서, 여행 갔어….』
『어디로요?』
『색시가 대구에 있다나 봐, 대구로 갔어…』
『………』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인데 승우의 부모는 승우가 나를 만나는 것을 알고, 승우를 불러 앉히고, 만약, 「미스」양 같은 부량성있는 여자하고 결혼한다면 재산도 물려주지 않고 의절한다고 위협을 하자, 승우는 부모 말대로 하기로 했었다.
이 순간에도 어렴풋이 나는 그런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나의 고독의 광장으로 돌아와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몸은 순결하지만 남이 나를 순결하게 보지 않는 것은 무얼까? 정신적으로 한때 먼지가 끼고 때가 묻었기로 그것은 내 탓이 아니다. 사람들이 나를 쑤시고 밀어 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남이 쑤시고 밀더라도 내 자신을 꿋꿋이 지니지 못한 탓일까? 역시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일까? 여자에게는 조그마한 과거가 날카롭게 따라오는 것을 나는 새삼스럽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