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對主義
政治的 組織은 어떤 理念에 符合하느냐 안하느냐에 의거해서 檢討되어야 한다. 그 基盤은 道德이다. 그 目的은 人間을 위한 善이다. 오직 民主主義만이 이 基盤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들이 이 基盤과 目的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民主主義를 믿지 않는 것이 된다. 만약 우리들이 民主主義를 방위해야 한다면 이러한 原理를 우리들은 방위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이러한 原理를 방위하게끔 準備가 되어있는가? 勿論 안되어 있다. 40餘年間 우리들의 地積 指導者들은 그러한 原理를 믿지 않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하여 왔다. 그러나 社會的 思想의 全領域에는 오직 意見이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意見 以外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各自는 自身의 意見에 따를 權利가 있다는 것이다. 善과 惡과의 사이에는 差異가 없으며, 편리한가 편리하지 않는가의 사이에만 差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좋은 國家와 나쁜 國家 혹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에 관해서까지는 論議할 수 없다는 것이다. 道德이란 없으며, 다만 風習이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人間은 다른 動物과 다른 바가 없으며, 人間社會는 動物社會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만약 目的이라는 것이 있다면 動物과 動物社會의 目的은 生存이라는 것이다. 만약 目的이라는 것이 있다면 人間과 人間社會의 目的은 物質的 滿足이라는 것이다. 自由란 單純히 自己 멋대로 하는 것이라 한다. 우리들이 가지기를 바라는 唯一한 共通原理라는 것은 原理란 것이 全然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手段과 目的과의 커다란 混同에서 由來한다. 財物과 勸力이 人生의 目的이 되며, 人間은 單純한 手段이 된다. 正義란 强者의 利益이라는 것이다. 만약 萬事가 意見의 問題이며, 또 各自가 自己의 意見대로 할 權利가 있다면 힘이 意見의 差異를 解決하는 唯一한 方法이 된다.
그리고 勿論 成功이 올바름의 基準이 되며, 正當은 힘의 强力한 쪽에 屬하게 된다. 法律이란 關係가 없다는 것을 法科大學에서 나는 배웠다. 法廷이 하는 것이 즉 法律이라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이 즉 法律이라고 히틀러는 말했다. 美國의 法科大學에서 내가 배운 原理와 히틀러가 宣傳하는 原理와의 사이에는 別로 다른 点이 없었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불찰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原理는 히틀러의 原理보다 우리들의 原理를 방위하는데 대단히 어렵게 하며 또 그의 原理와 크게 差異가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團結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같은 原理에 관해서도 分明치 않다. 우리들은 道德的 原理를 잃고 있다. 그러나 그 흔적은 남아 있어서 우리들을 괴롭히고 또 非道德的 雨너리의 徹底한 實行을 妨害하고 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混亂되고 非效果的인 히틀러처럼 되는 것이다.
히틀러와 왜 히틀러처럼 되어서는 안되는가를 疑心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싸움에 있어서는 언제나 完成品이 勝利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헛친스 博士의 主張은 오늘날 共産主義와 對決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暗示와 方向을 提示하여 주는 것이다.
■ 科學主義
實驗的 方法이 대단히 明白하게 그리고 수肯할만한 勝利를 거두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것이 科學的 知識을 建設하는 唯一한 方法일 뿐만 아니라 또 모든 種類의 知識을 獲得하는 唯一한 方法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래서 科學이 實驗的 方法에 의해서 解明할 수 없는 問題는 眞實로 全然 解明할 수 없는 것, 혹은 적어도 意味깊은 그리고 實證可能한 言說에 의해서 解明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數學者나 倫理學者가 그들의 方法에 의해 解明하는 種類의 問題에 대해서는 例外를 認定하지만, 다른 모든 問題는 實驗的 硏究와 實地 探求의 諸方法에 服從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方法에 의해서 解明할 수 없는 問題이라면 最初부터 問題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잘 해야 그러한 問題는 짐작이나 臆測에 의해서 解答할 수 있을 뿐이며 잘못하면 意味없는 혹은 普通 말하는 「넌센스」한 問題라는 것이다.
이와 對照하여 眞實로 意味있는 問題라는 것은 大部分의 境遇, 그들의 解答할 수 있는 觀察, 實驗 그리고 測定이라는 科學的 操作을 通하여 얻어진 것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民主主義를 信奉하기 위해서는 眞實과 虛僞, 善과 惡, 그리고 正가 不正 사이에는 差異가 있고, 또 眞理, 善 및 權利는 實驗的으로 證明할 수 없을 망정 客觀的 基準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들뜬 생각이나 偏見이나 合理化나 혹은 主日學校의 說敎도 아니다.
人間은 理性의 訓練을 通하여 眞理 · 善 및 權利를 發見할 수 있고, 또 問題의 性質上 科學이 解決하지 못하는 問題에 관해서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믿지 않으면 안된다.
科學主義의 崇拜에는 新奇하게도 극히 少數의 科學者가 따르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科學의 本質이나 任務를 誤解하고 있는 사람들로 構成된 崇拜이다. 그들은 科學은 現代的이며 試驗的이며 또 進步的이라고 한다. 科學的이 아닌 것은 모든 時代에 뒤떨어진 것이며, 기껏해야 妥當性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國際倫理學 季刊誌」와 같은 대단히 훌륭하고 學究的 出版物의 어떤 執筆者는 좋은 人生을 探求하는데 있어서 科學을 따르게 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訪問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筆者가 哲學者라는 事實은 科學主義 崇拜가 가장 不適當한 곳에서 그이 追從者를 發見하였다는 것을 意味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社會改善을 이룩하기 위해서 科學을 使用할 수가 있고 또 使用해야 하지만 우리들은 이 目的地를 向하기 위해서 科學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은 아주 明白하기 때문이다. 그 理由는 科學은 어디로 가야하느냐를 우리들에게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科學을 좋은 目的이나 나쁜 目的에 使用할지라도 모른다. 그러나 目的을 가지는 것은 人間인데, 인간은 目的을 科學的 硏究로부터 배우지는 않는 것이다.
科學의 發達은 現代生活의 가장 重要한 事實이다. 如何한 學生도 科學을 理解함이 없이 敎育을 끝마치게 내벼러 두어서는 안된다. 大學校는 科學的 硏究를 支持하고 激勵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科學的 殺戮으로부터 우리들은 科學의 理解를 期待해도 좋다. 科學的 硏究로부터 우리들은 科學的 知識을 期待해도 좋다. 그러나 만약 우리들이 科學으로부터 人生과 組織된 社會의 目的을 배우려고 한다면 우리들은 問題를 混同하고 있으며, 또 要求할 權利가 없는 것을 要求하고 있는 것이다.
科學主義는 結局 科學的인 것만 믿을 수 있다는 점에서 實證主義와 같은 立場을 취하는 것인데 애들러(MORTIMER J. ADLER 1902-) 교수는 이 問題에 對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實證主義는 우리들 文明의 病의 根源이 되어왔었다.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科學만을 믿게하고 또 宗敎나 哲學을 迷信이나 혹은 헛된 空論으로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고. -계속-
李鍾學(空軍士官學校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