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역사)에 記錄(기록)될 제네브서의 鼎談(정담) 1時間(시간)
베아, 홉트, 뵈그너 老將(노장)들
平生(평생)을 敎會一致(교회일치)에 貢獻(공헌)한 세敎會指導者(교회지도자)
共同硏究案(공동연구안)란「배」出帆(출범)시켜
다가세운 敎會一致(교회일치) 길
앞길은 아직도 險難(험난)… 셋이 같이 認定(인정)
【RNS 本社綜合】 3주전 서서(瑞西) 「제네브」에서는 3명의 교회일치운동 최고 지도자들이 역사 오랜 그리스도교일치 답사도상(踏査途上)에 새롭고도 획기적인 관통(貫通)을 약속하는 사실 앞에 만족과 희망에 찬 한시간을 서로 나누었다. 이것은 특히 가톨릭교회가 프로테스탄, 성공회, 경교회, 구(舊) 가톨릭교회 등 2백9교파 들을 포옹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의 대화 및 상호협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에 동의 함으로써이다. 이와 같은 동의는 WCC본부를 방문한 그리스도교일치촉진국장 베아 추기경에 의해 그를 위해 베풀어진 환영회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이 자리에는 베아 추기경과 함께 역시 내빈으로 초대 받은 전(前) WCC의장이며 현재 불란서 프로테스탄교회연맹의 명예회장인 맑크 뵈그너 박사와 WCC사무총장 W‧A‧빗셀트‧홉트 박사가 동석해 있었다.
베아 추기경의 상기 공식언명은 각 교회 간의 교환과 동지적인 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오래 동안 헌신해온 이들 교회일치운동 지도자들에게 한 큰 영예스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과연 베아 추기경의 보고는 상호의 입장을 밝히고 가능하면 상호 이해에까지 도달하기 위해 공동연구위원회를 설정하자는 WCC제의에 가톨릭교회가 전폭적인 환영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는 8명의 WCC대표와 6명의 가톨릭대표로 구성될 것이다. 위원수 배정에 있어 WCC편에 2명 더한 것은 WCC가 포옹하는 광대한 교파들의 견해를 보다 더 잘 반영시키기 위해서라 한다. 연구토론의 대상으로서는 자선사업, 사회 및 국제문제에 있어서의 협조를 비롯하여 교회일치문제, 혼종혼(混宗婚), 종교자유, 개종(改宗) 등에 관한 신학적 문제들이다.
이제 우리는 이같은 교회일치운동의 기틀이 잡히기까지 얼마나 큰 인내와 노력이 전제되었던가를 「제네브」에서 옛 친구처럼 서로 만난 이 세 명의 교회지도자들의 생애에서 엿보고자 한다.
▶ 베아 卿
베아 추기경은 당년 84세이며 WCC본부를 방문한 가톨릭교회의 첫 추기경이다. 그러나 그의 친지(親知)들 중에는 많은 출중한 비가톨릭교회의 교역자들이 있다.
요안 23세에 의해 설정된 그리스도교일치촉진국장으로서 그는 「갈라진 형제」들에게 보내진 가톨릭교회의 제일가는 대사(大使) 격이다. 공의회에 타 교회대표들이 「옵서버」로 초청된 것도 주로 그의 「이니시아티브」에 의해서다. 독일출신이며 예수회회원인 베아 추기경은 성경학자로서도 저명하고 수다한 저서(著書)와 3백여의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 학자적 배경은 그 자신이 표명한 바와 같이 가톨릭과 비가톨릭교회 간에 교량적인 역할을 하게 된 그의 사명을 위해 그를 미리부터 준비시킨 것과 같다. 교회내 혁신 세력의 주도자(主導者)의 한 사람으로서 일치운동에 있어 가톨릭교회의 원리를 밝힌 공의회 일치율령작성과 다음 회기에 결의 혹은 공식발표 될 「종교자유안」 및 「대(對) 유태인 선언문」 작성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다.
「제네브」에서 베아 추기경은 그를 맞은 프로테스탄 지도자들에게 한편 산적한 장애와 난관이 교회일치도상에 놓여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그러나 그 때문에 실망하여 형제 간의 접촉을 단념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천명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우리의 형제적 우애와 일치의 염원은 오히려 우리에게 흉금을 터 놓은 대화의 용기를 줄 것이며 지난(至難)한 교리적 문제에 대해서 까지 서로 말 할 수 있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 홉트 博士
WCC사무총장 빗셀트‧홉트 박사에게 있어서는 문제의 중점은 제(諸) 교회의 일치여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상호 간의 참된 대화의 가능성이었다.
이 당년 64세의 프로테스탄 지도자는 가톨릭교회와 WCC가 서로 상호 간의 접촉대화의 원인을 표명한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며 『이제 그 일은 시작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단언했다.
1948년 이래 WCC사무총장직을 맡고있는 홉트 박사는 화란 개신교의 목사이며 그는 40년 이상 교회일치 운동에 헌신해 왔다. 1924년에는 YMCA국제 위원회 비서장직을, 1928~38년 사이에는 세계기독교학생연맹(WSCF)의 비서장직과 이어 그 사무총장직을 역임했다.
그다음 10년 간에는 WSCF의 의장직에 있으면서 WCC설립 준비위원회 행정장직을 겸임해 있었다. WCC는 본시 1942년에 정식 발족할 예정이었으나 제2차전의 발발로써 지연되었다.
홉트 박사는 베아 추기경과 같이 여러 외국어에 능하며 세계를 널리 아는 사람이다. 그는 2년전 WCC중앙위원회 회의석상에서 『가톨릭교회의 다른 교파에 대한 태도에는 현실적인 혁명이 있을 수 없다』고 보는 회의적, 태도를 경고하여 『우리는 물론 「로만틱」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가톨릭교회와 다른 교회 사이에는 신앙과 제도 등에 뿌리 깊은 문제들이 게재돼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자아반성과 자아수정에는 성신이 역사하신다는 것과 또한 이 교회에 모든 교회들이 배워야 할 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동시에 가톨릭교회가 교회일치운동의 중요한 「센타」가 돼가고 있는 사실은 WCC의 입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은 확실하다고 지적했다.
▶ 뵈그너 博士
베아 추기경 보다 3개월 연장(年長)인 뵈그너 박사는 50년 이상 그리스도교일치운동을 위해 헌신해 왔다. 그의 가톨릭과의 접촉관계는 언제나 긴밀하고 우호적이었으며 저명한 가톨릭 작가(作家) 샬‧빼귀와는 절친한 사이었다. 불란서「프로테스탄티즘」의 위대한 지도자이고 「에꾸메니즘」의 개척자인 뵈그너 박사는 지난해에 한 「인터뷰」에서 「바티깐」 공의회 제3회기를 칭송하여 이는 주로 바오로 6세 교황의 노고의 공적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여기서 『요안 23세는 바오로 6세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바오로 6세는 요안 23세가 성취하지 못한 일을 성취해가고 있다』고 단언하였다. 80만 불란서 프로테스탄의 지도자로서 2차의 비극적 세계대전을 통해 31년간 그 교회를 영도해온 그는 이미 요안 교황이 선출되었을 때 가톨릭과 프로테스탄의 대화를 강조하였다.
1958년 10월 31일 그는 『WCC의 이전 의장의 한 사람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새 교황을 감도하사 그가 가톨릭교회와 기타 그리스도교 교회사이에 없어서는 안될 대화의 길을 가능케 하는 결정을 내리게 해주시옵도록 간구한다』고 말했다.
수개월 후 요안 교황이 공의회 소집의 뜻을 발표했을 때 누구보다 앞서 이를 환영하면서 뵈그너 박사는 다른 큰 교파들이 이 공의회에 초대되기를 희망하여 『그렇게 되면 공의회는 악화돼가는 각 교회 간의 관계를 반대 방향으로 이끄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고 말하였다. 뵈그너 박사는 공의회 지난 회기에 베아 추기경이 영도하는 그리스도교일치촉진국의 빈객으로 친히 참석했다.
가톨릭교회와 WCC관계개선뿐 아니라 교회일치운동이 오늘 전세계 그리스도교의 지상과업으로 표방되고 발전해가고 있는 데는 거의 평생을 이 운동을 위해 바쳐온 여상(如上) 3명의 탁월한 교회지도자들의 공적이 크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치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