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般社會(일반사회)의 敎會觀(교회관)
나는 가톨릭을 이렇게 본다
발행일1965-03-14 [제462호, 4면]
■ 언제까지나 傍觀者여서는 안돼 / 申일철(高麗大 敎授)
<長點> ①마음의 지표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서구전통의 정신적인 기둥인 그리스도교는 그 나름의 「근거(GRUND)」를 제공한다. 방황하는 마음을 위한, 퇴색했으나마 고향이 되고 힘이 되어준다.
②원래 동양인에게 없는 원죄의식(原罪意識)은 억센 양심(良心)의 발판이 되어 양심으로 하여금 악과의 싸움에서 과감케 해준다.
동양인의 명분주의(名分主義)와는 다른 역동적 대립작용(力動的 對立作用)으로 양심을 파악 하는데 감정이 있는 듯하다.
③그리도스교의 일면인 「휴머니즘」에는 공감할 수 있다. 다만 그 인간애가 「도구마」에 기초해 있는 것이 흠이다. ④시(時)와 시적인 정서가 메말라 가는 우리에게 그 대용품 역할을 해주고 「파토스」적인 내면성의 풍요를 위한 양식을 준다. ⑤현실 사회에서 패배하거나 소외(疏外)된 사람들 그리고 병약자 노인 등 약자(弱者)들에게 위안과 때로는 인생에의 용기를 주고 「푸로이드」적인 정신치료(情神治療)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비신자인 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부탁이 너무 많다.
<短點> ①그리스도교는 먼저 낡은 「도구마」를 타파해야 한다. 수천년 전의 낡은 과학지식, 유치한 세계관을 그대로 고집하는 데는 반대한다. 「바인불」의 신회적 세계관(神話的世界觀)이 현대 과학 앞에 무력함을 솔직히 시인하고 종교의 근거를 인간의 내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②그 교조주의(敎條主義)와 혁식주의는 인간에 대한 「보이지 않는 감옥」이다. 특히 결혼윤리 등에서 대표되 듯이 기성교회는 자유롭고 싱싱한 인간생활을 구속하는 시대착오적인 제재력(制裁力)이 되었다.
③교회는 변혁에 대한 반동으로 화하고 낡은 지배 층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봉사에 그치고 약자인 대중을 제도적으로 대변하는 일이 없다.
④목자(牧者)는 대개 자기 존재의 함정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고 초자연 내지는 초현실의 미명하에 현실도피를 일삼고 빈민굴과 시장과 노동조합 속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데는 항상 학하거나 외면해 버린다. 종교가 현실재건에 공헌하지 못할 때 자연 반동세력으로 떨어지기 마련이다. ⑤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볼 때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주의 앞잡이가 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아편정쟁」이래 동양이 침략당할 때 그리스도교는 각국 전체교회가 이에 반대해서 비폭력저항이라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교회는 서구식민주의에 대한 소극적 방조자 혹은 방관자였음을 피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⑥그리스도교만이 인간구원의 「전매특허권」 같은 것을 고집함은 지나친 교회 「에고이즘」이 아닐까. 그 밖의 고급종교도 또한 교회 밖에서도 성실한 인간생활이 가능함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는 오히려 제도화된 위선(僞善)을 결과 할 수도 있다.
⑦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나치게 우상화하여 목석(木石) 같은 동맥경화증에 걸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거리를 멀리해서 그 위광(威光)을 조성한 것이 아니가. 끝으로 그리스도교가 새 시대의 신앙으로 거듭나려면 「가난한자의 복음」이 되기 위한 자기개혁이 요청되며 후진 지역에서는 선진국의 정신적 간접침략의 몫을 하지 않도록 교회의 자주성운동에 과감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먼저 이 나라 민중의 편에 서야 할 것이다.
■ 貧困한 大衆의 벗되길 所望 / 梁好民(서울大 法大敎授)
가톨릭교는, 과거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몽매한 폭군과 잔악한 이교도의 칼날 앞에서 기꺼이 목숨을 던진 성도(聖徒)들의 빛나는 기록을 무수히 가지고 있다. 모든 교파가 거의 예외 없이 하극상(下克上)과 경망(輕妄)과 이권투쟁(利權鬪爭)과 지위다툼으로 교권(敎權)이 마비 상태에 빠지고 있을 때도 가톨릭교회는 정연한 내부질서를 유지해온 영예를 자랑할 수 있다. 또한 가톨릭교회는, 다른 교회가 내부 분쟁과 분열에 의하여, 교파로 갈리우고 다시 교파가 교파를 낳는 극심한 분파주의의 세태 속에서도 엄연히 그 통일성을 유지해온 통솔력을 자부해서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이 그러하듯이, 가톨릭이 이러한 장점이 한편으로는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음도 국외자(局外者)의 눈에는 너무나 뚜렷이 비치고 있다. 종교적 관심을 지극히 가지면서도 가톨릭에 귀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결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늘 가톨릭교가 가지고 있는 권위주의와 형식주의와 교조주의(敎條主義)다. 물론 교회는 이에 대해 충분한 반론(反論)의 근거를 가지고 있을 것이지만, 많은 비종교인들이 그렇게 본다는 점을 지적할 따름이다.
그런데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단견한 필자의 생각으로는, 오늘 가톨릭이 직면한 내면적 위기는, 첫째로는 종교적 정열의 상실이요, 둘째로는 사회개혁의지(意志)의 결핍이다. 가난한 동포들의 생령이 의지할 곳을 찾아 계룡산으로 상징되는 사교(邪交)와 잠교(潛蛟)로 몰려들고, 심지어는 일본의 전통적 국수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창가학회(創價學會)와 천리교(天理敎)까지 민중 속으로 파고드는데, 가톨릭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아무것도 느끼는 바없이 그저 권위의 껍질 속에 안주함으로써 만족한다면 그때는 가톨릭도 적어도 한국에서는 끝장이 나는 날이다.
「소돔」과 「고무라」가 다된 우리사회의 퇴폐한 현황을 가톨릭의 양심은 무엇이라고 판단하고 있는가? 불행한 일이지만 필자는 이 나라의 세기말적 타락상에 대하여, 가톨릭교가 그 교리를 실천하는 일환으로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종교는 내세(來世)를 진실되게 추구해야 할 것이요, 속세일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이치(理致)에서, 또는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구실하에 세상을 뒤덮는 사회악을 보고도 못본척, 불쌍한 동포들의 고난을 외면하고 아무런 개혁의 의지도 가지지 않는 것이 진정한 가톨릭의 정신인가에 대해서 필자는 일대회의를 품는 자다.
타락한 특권층의 간접적 옹호자가 되지 않으려면, 기회주의자 위선자로서의 역사적 낙인을 찍히지 않으려면, 그리고 위대한 선구자들의 명예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면, 한국의 가톨릭은 모든 세속적 타산과 안일을 버리고 대중의 종교적 심정을 옳게 인도하고 사회악을 소탕하는데 분발해야 할 것이다.
■ 閉鎻‧分派‧獨善的 態度止揚을… / 洪以燮(史學者‧延歲大 文科大學長)
가톨릭의 단점과 장점을 쓰라고 하심에 간단한 답을 안할 수는 없으나, 종교의 장단점의 지적이란 지난합니다. 내 자신이 신교사회에서 나서 지내 온 사람이어서 더욱이 난처합니다.
내가 가톨릭에 흥미를 갖기는 한국사(韓國史)의 공부에서 한국기독교사(韓國基督敎史)를 알아 볼려고 한데서, 우리 유가(儒家)들의 책자를 통해 가톨릭신앙을 확립한 정신과 그 후 그들이 순교로써 기독교신앙의 터전을 마련한데서이었읍니다. 또 개척자인 서구인의 전교와 또 그들의 순교의 족적(足跡)을 지금껏 흠모(欽慕)해 마지않읍니다. 이러한데서가 가톨릭하면 순교와 직결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더욱 「한국천주교사」는 순교로 점철(点綴) 되어있는 찬연한 역사를 한국 후세의 정신사의 한 표징(表徵)으로 삼고자 하는데서 그 고귀한 정신을 장점이라고 보겠습니다. 초교단적(超敎團的)으로 단결해서 행해지는 몇 가지 사업을 볼 때 또 그러한 것이 추진됨을 볼 때 협력의 미점이 있다고 봅니다.
딘점이란 어떠한 종교에서든지 종교교리 보다 신앙하는 인간의 단점에서 오는것이 아닌가 합니다. 가톨릭에서 뿐아니라 종교인들에게서 단점을 찾는다면 폐쇄적(閉鎖的) -분파적- 독선적인 태도와 생각이 문제가 되지 않나 합니다.
종교에서는 어떠한 것에서나 중시되는 것은 전교인데, 이것의 강요보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따르게 자신의 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근대(近代)에 있어 인간정신의 자유로움을 중시하면서 그 반면 사회사상이나 종교신앙에 있어 각자의 것을 강요하는데서 오늘의 인간성의 혼란을 재래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상극상태(相克狀態)의 오늘의 인간정신을 건지는 일이 강박하게 내 사상(思想)-신앙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는 인간정신의 자유로운 상태에서 「신」의 부정(否定)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의 생활태도를 기독교인은 기독교사회에 확립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긴한 것이 폐쇄적 -분파적- 독신적인 종교인의 일반적인 태도가 지양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신교에서나 가톨릭에서 다같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 用語는 難澁해 儀式複雜하고 / 兪鎭午(高麗大 總長)
나는 신앙의 본질내용(本質內容)을 잘 모르는 사람이므로 종교에 관해 믿음성있는 발언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의견을 말하라 하시니 말해본다면
▲나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풍기는 어딘지 모르게 순박한 분위기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읍니다. 교직자도 신도도 교회도 그러합니다. 앞으로 가톨릭도 근대화함은 좋으나 그렇게 함으로써 경박다변(輕薄多辯)한 종교가 된다며 가톨릭을 위하여 손실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서슴치 않고 말씀한다면 가톨릭의 의식(儀式)은 너무 복잡하고 국외자(局外者)로서 볼 때에는 무의미해 보이는 절차를 많이 가지고 있읍니다. 교회가 장중한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필요한 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또는 기이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각 국민이 각각 자국어(自國語)를 사용하게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나는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의식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어떤 부분(어떤 부분이 될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가톨릭신앙의 핵심을 표현하는 간단한 말이 있을 것입니다. 가령 불교에서 「나무아미타불」하는 것 같은-)은 종래의 「라띤」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각합니다. 동시에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 용어는 대폭 그리고 급속히 현대어로 바꿀 필요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유롭의 사원(寺院)을 가보면 흔히 피를 흘리는 잔인한 장면을 그린 그림을 보는데, 그러한 중세기의 유물이 한국가톨릭교회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는 모르나 반영되어 있지 않기를 바라고, 앞으로도 수입해 오지 말기를 바랍니다.
▲한국 안에 한곳쯤(서울이나 대구 같은 곳)에 유롭의 사원에 비교할 수 있는 「카시드랄」을 짓는 동시에, 현대양식의 교회건물도 군데군데 있었으면 합니다.
■ 寬容‧不關容의 矛盾… /趙의설(史學家, 文博延大 副總長)
가톨릭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시기독교에서는 오늘의 가톨릭처럼 조직적인 제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때에는 오늘의 교회라는 뜻을 희랍말로 「에클레시아」라고 하였는데 단순히 집회(集會)라는 말이다. 이 「에클레시아」가 로마제국을 거쳐 오늘의 가톨릭이 된 것이다. 가톨릭이란 말은 「보편(普遍)」 혹은 「일반」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서양 중세에 있어서 세계지배 이념이 유포되어있었는데 이것이 또한 가톨릭의 이념이었던 것이다. 종교라면 가톨릭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관용(寬容)」과 「불관용」의 서로 모순의 길을 걷고 있다. 가톨릭의 세계성‧포용성‧관용성은 매우 좋은 점이다.
가톨릭학교가 교사를 채용할 때 교사가 가톨릭신자이면 쓰고 불신자이면 채용하지 않는 일은 없는 것 같다. 필자가 잘못 본 것인지는 모르나 이러한 처사는 가톨릭의 고유한 관용성에서 나온것이 아닌가 하고 장점으로 본다. 또 하나 존경할 점은 마치 「고틱의 건축 스타일」처럼 인간노력에 의한 인간의 존엄성을 긍정하는 면, 심지어는 초인간적인 면에서까지 인간성을 존중히 여기는 면은 매우 가톨릭의 숭고한 점이라고 본다. 가장 가까운 예로서는 술‧담배문제를 가지고 신앙의 도수(度數)를 측정하려 고하지 않는 점은 위에 언급한 바 두 가지의 측면에서 오는 태도라고 본다.
교회만이 아니고 다른 모든 기관에서도 사업이 확장이 되고 수가 늘면 조직과 제도로 운영이 되듯이 가톨릭교회도 교세가 팽창됨에 따라 역시 조직과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잘못논 것인지 모르나 『지나치게 신분(身分) 관계에서 좌우되지않나』하는 생각도 든다. 전에는 가톨릭의 여자가 결혼하려면 상대방 남자가 가톨릭이 아닌 경우에는 신자가 되게 하여 가지고 결혼을 하였는데 요새는 변칙이라고 할까 상대방 남자가 신자가 아니면 결혼은 그냥하고 후일에 자녀를 가톨릭신자로 만들면 그만이라는데 신앙의 강요같이 느껴진다.
■ 自由‧平和樹立에 貢獻하길… / 李靑潭(大韓佛敎黃溪宗中央宗會 議場)
귀교단과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빌면서 주신 논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어보는 바입니다.
△主題
전세계의 유수한 종교 중 가톨릭은 가장 탁월한 종교의 하나라고 봅니다. 그러나 가톨릭이 염원하는 바 전 우주를 통어(統御)하여 일체를 융화시키는 유일신이란 점에 대하여는 나는 회의적이어서 가톨릭의 신학사상으로서는 미완성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인 즉 신구약에서 표현된 신의 내용이 도의상으로는 편심적(偏心的)이고 원리상으로는 빈약하여서 모든 장애를 타개하고 모든 모순을 조화시키는 우주만물을 일관하는 근본이념이 결여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도이념으로서 각 종교와 학문, 사상의 융합은 불가능할 것이며 따라서 인류영원의 자유와 평화는 구현되지 못할 것으로 봅니다. 뿐만아니라 상호간의 적대심과 무너뜨릴 수 없는 장벽을 조성하여 도리어 인간으로 하여금 혼란의 가시밭길에로 함입케하여 골육상쟁의 결과가 초래되지 않을 가하는 우려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別題
①단점-포교면에 있어서 타교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과 훼욕(毁辱)으로써 군중심리를 자극하여 도리어 일반의 증오를 조장하여 교세확대에 많은 지장을 초래한다고 생각합니다. 천하의 대기업체로 자긍할진대 군소기업을 육성할 의무가 있다고 보는데 도리어 그들과 경쟁극(劇)을 연출한다면 이는 자가 빈곤의 폭로가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②장점-광대하고도 면밀한 조직체와, 강력하고도 희생적인 단결력과 숭고하고도 장엄한 법요(法要) 집행으로써 자가확장에 능률적이고 타교에 허다한 시범이 됨에 대하여는 찬사를 불석(不惜)하는 바입니다.
③기대-천지가 동근(同根)이요 만물이 일체인지라 천지만물을 일관하는 원리는 하나이지 둘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근본 원리상에서는 자타 선악의 차별은 자연 해소되고 오직 일리재평(一理齋平)의 전체적인 영원한 자유와 행복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편심적(偏心的)이고 독선적인 신의 구각(購殼)을 벗어나서 일채 만물에 융통자제하고 평등무애(無碍)하여 원만무결한 전우주를 대변할 수 있는 신을 새로이 모셔서 인류영원의 자유와 평화에 지대한 공헌있기를 천만기도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