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자기만이 사회집단에서 벗어난다 해도 생활면에서는 고립될 수 없는 엄연한 사회인이다. 인간이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는 것은 단지 인간 서로가 지리적으로 근집됐다는 우연한 현상으로서는 될 수 없다. 하나의 사회는 공동의 목적을 의식하고 공통의 흥미를 가져, 이로써 정신적 접촉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정신적 접촉을 맺게 하는 것은 「콤뮤니케이션」이다. 자기만이 이를 거부하는 현대인의 생활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현대인의 로빈손 쿠루소가 있다고 하자. 아마도 그는 오늘 아침 방송의 천기예보를 들었을 것이다. 죽음의 재가 어디로 갈 것인가 그 방향을 몹시 알고 싶을 거다. 우리는 직접 핵실험장에 입회하지 않아도 그 정보를 통하여 본 것처럼 들은 것처럼 「매스 메디아」를 통하여 체험하게 된다. 현재에 있어서 과거란 어제처럼 생생하다. 페르샤 대군을 무찌른 승리의 소식을 피디피데스가 천신만고로 달려가 「아테네」에 이르자 『이겼다 아테네가…』 겨우 한마디 하고 숨지지 않도록 「매스콤」의 매개체는 철저하게 시간을 단축하여 순간마다 세기의 신기록을 내고 있다.
고대의 희랍에서는 이 「콤뮤니케이션」이 인간의 도보 범위내에서 육성으로써 정보를 도시에만 한하여 전달했다 한다.
옛날 한국에서도 시급한 정보를 나귀를 타고 주막을 거쳐 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전기통신이나 항공연락의 비상한 발달로 세계 어느곳 할 것 없이 하나의 정보를 동시에 알고 혹은 기뻐하며 혹은 근심하게 됐다. 이 사회가 이런 「뉴스」 틈서리에서 살게 됐다. 오늘의 화제는 오늘의 관심이요, 인간이 「뉴스」를 알고자 하는 것은 생활면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저널리즘」의 효과는 직접 정신면에 자극하고 있다. 「뉴스」의 재료는 우리에게서 발생하며 저를 아는 동시에 저가 나를 알고 있다.
이래서 신문은 활자화한 「뉴스」를 눈으로 보는 세상의 이야기 거리라 할까?
참으로 이는 사회생활에 많은 사회행동을 변화시키고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엇을 알고자 하고 또한 본능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많다. 토마스 제퍼손은 『정부는 있으나 신문 없는 사회와, 신문은 있으나 정부가 없는 사회, 어느쪽을 선택해야 할 경우, 나는 후자를 선택한다.』했다.
이것이 말을 한다. 이것이 전하고 가르친다. 시간색을 띤 현재의 상식에 무지할 수는 없다. 알고자 하는 것이 곧 배움이다.
다행히 크리스찬 생활에도 「저널리즘」의 선풍이 불어왔다. 신문 · 잡지 · 정기간행물 · 「라디오」에 등장한 가톨릭의 모습은 과연 어떨가? 요즘 한국은 방송출력 약체로 불청전파에 눌리고 있다는 사실을 염려하고 있다.
이와같이 타 교파에서는 선수를 써서 「다이알」에 성경이며 찬송가며 설교가 앵앵한다. 여기에도 우리는 출혈을 두려워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 신문을 하자. 신문은 「가톨릭시보」가 주간지로 겨우 비틀거리면서 가톨릭을 「프로파간다」하고 있다. 많이 발전되고 있다. 많이 발전되고 있는 반면에 그만큼 진통을 겪고 있다. 대개 신문은 독자와 광고주로써 경영되어 나간다.
「가톨릭시보」의 경우는 어떨까? 「에로틱」한 영화광고를 게재하여 유지비를 끌어들일 수는 없다. 최고병에 걸린 한국의 각종 약광고만을 소개할 수도 없다. 그러면 남은 독자는 든든한 수효인가? 이곳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가톨릭시보」다. 물론 시보가 자체로서는 먼저 독자들을 끌 수 있는 기사를 싣고 읽을거리가 있도록 꾸며놓아야 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회 신문처럼 얼른 시선이 갈 수 있는 화제는 그다지 많잔을 것이다. 국내 「뉴스」 보다 외신의 번역물이 거의 일면을 차지하고 있으며 삼면의 국내 「뉴스」가 시간적 정보를 독자에게 궐한점 있지만, 이는 주간 시보라는 제약을 받고 있으며 꼭 열거하라면 다음과 같은 면으로 인기몰이 못될 것이다. 첫째 순 영리의 목적에 있지 않다. 둘째, 타간행물과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은 물질과 정신적 영역의 차이다. 세째, 부동 수의 독자 상대이다. 네째 「독마틱」한 기사 내용 등이다. 기런 대로 이것이 가톨릭시보인들 어찌할건가?
교리의 선포 기관의 구실도 겸하여 문서전교라는 면에서 단막 상식은 교회의 지식 광장이기도 하다. 시보는 신문구독을 독촉하기 보다는 신자들의 관심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을 마련하여야 하겠다. 「뉴스」로 통하는 십자가의 「디알로그」가 전개될수록 교회나 신자 상간의 「메디아」 역을 충실히 할 수 있을 때까지 이 관문을 독자가 열어놔야 한다. 이 작업을 독자들(신자들)이 먼저 해야하리라.
시보사가 어느정도 안전성을 갖고 여유있는 기사를 낼 수 있도록 우선 시보 구독력을 확보시켜 주어야 한다. 너무도 교회 간행물 구독에 성의없는 우리가 아닌가? 시보는 우리 교회의 것이고 보면 역시 교우들의 것이 된다. 이것 하나만이라도 살려 놓아야 한다. 자진구독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기 보다는 장려의 선업이다.
독자의 확보를 하여 주자. 얼마전 시보사원 전원이 각 본당을 찾아 다니며 시보 구독 구걸 행각에 나섰다 하니 누구의 수치며, 누구의 대접일까? 누누히 대주교님이 권유와 각 신심단체에서 시보보급을 위하여 구독구걸의 서글품에서 건져주어야 하리라. 이런데에 성의 보다는 지나치리 만큼 우리는 무관심 상태가 아니낙?
우리의 「디알로그」의 광장이 살벌했어야 말이되나, 현 구독자 외 많은 교우들은 어디로 갔을가? 우리 「저널리즘」의 유일한 대표역을 맡고 있는 시보를 외면해서야 남은 것은 무엇이며, 정신적 접촉과 생활한 신앙의 지식은 얼머나 될까? 한마디로 가톨릭 사회에서 소외돌 수 밖에 없을 것이다.
鄭淳在(경북 義城본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