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紙上聖路巡禮(지상성로순례)] 십자가의 길은 생명의 길
빈민굴, 병원, 감옥, 춘궁에절은 오막
살이에까지 십자가의 길은 뻗어있다
발행일1965-03-21 [제463호, 3면]
■ 제9처 예수 세번째 엎더지시다
연거푸 두번이나 엎더졌던 예수님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몇 걸음도 못가서 다시 세번째 쓰러졌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이 보였다. 사실 인간의 힘으로서는 이 이상 더 지탱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안간힘을 쓴다. 사력(死力)을 다하여 다시 일어선다. 피와 진땀과 먼지에 뒤범벅이된 그 얼굴 숫제 그는 눈을랑 감고 내려치는 채찍을 따라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참혹함 모습, 우리의 상상도 표현도 여기선 진(盡)할 수밖에 없다.
주여 왜 다시 일어섰읍니까? 어쩌자고 또 다시 일어섰읍니까?
그대로 숨지는 것이 당신에게는 차라리 해방이 아니었겠읍니까?
대체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읍니까? 십자가상의 죽음, 당신 살과 뼈를 꿰뚫고 바수는 참혹한 죽음만이 당신을 기다리는 줄 모르십니까?
아! 어리석은신 주여! 하필이면 당신은 그것을 꼭 원하시게 되었읍니까?
사랑, 모든 것은 그 『죽음 보다 더 강한 사랑』 때문이었다.
천주 성부의 뜻을 끝까지 완전히 채우시고, 형제인 우리 모두를 남김없이 구하시려는 그 지극한 사랑이 주님을 또다시 일어서게 하였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십자가의 길은 2천년전 「골고타」 언덕 위에서 끝났다.
그러나 구원(救援)의 역사(歷史)의 심야(深夜)를 뚫고 가는 십자가의 길은 지금도 그칠줄 모르고 이어간다.
빈민굴과 병원, 감옥과 행여자(行旅者) 수용소가 있는 곳, 오늘의 「갈바리아」로의 길은 도처로 끝없이 뻗어있다. 도시변두리의 판자촌에서 춘궁(春窮)에 절은 산간벽지의 오막살이에서까지 어디든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의 발걸음이 닿지않는 곳이 없다.
헐벗고 굶주린자, 질병과 죄의 고뇌로 신음하는 인간, 슬피우는 마음, 표박(漂迫)하는 영혼, 이 땅위 어느 한구석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이 하나라도 남아있는 한 그리스도는 기진하여 거듭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그의 고난의 길을 계속한다.
깊은 밤 만상이 잠든 적막한 거리를 그만은 홀로 깨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터덕 터덕 걸어간다.
사랑 때문에 이 불행한 인생 모두를 구하지 못해 애타하는 그 사랑 때문에.
주여, 사랑에 미치신자여! 사랑에 눈머신 자여!
주여! 신앙과 의지에 약한 나로 하여금 이 당신 사랑에 불타게 하소서!
기진하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 사랑의 힘을 주소서! 그리하여 이 목숨이 붙어있는 한 당신이 가시는 곳 어디든지, 밤이든 낮이든 비바람 눈보라를 맞으면서도 땅극변까지 나의 나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 뒤를 따르게 하소서!
주여! 또 여기 실의에 찬 K를 돌보소서. K는 그저께 자살을 기도했읍니다. 각박한 제정에 쫓겨 다니다가 위로없는 이 땅을 벗어 나기 위해서 였읍니다. 4개월전 감옥에서 풀려나올 때는 재생(再生)의 꿈과 포부를 담뿍 안고 밝은 태양아래 미소마저지은 그였읍니다. 주여! 이 절망에 떨어진 당신 불쌍한 형제에게 다시 일어설 마음의 용기를 주소서!
■ 제10처 형리들이 예수의 옷을 벗기고 초담을 마시우다
주님은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의 자유가 박탈되고 존엄성이 유린되었다. 이제 마지막 몸에 걸친 단 한 벌의 옷마저 악당들은 사정없이 나꾸쳐 갔다. 사형수인 그에게는 단벌의 옷도 과분하다는 것이다. 여기 주님은 알몸으로 뭇 인간이 퍼붓는 조소와 멸시의 눈초리에 둘러싸인채 고독히 서 있다. 아무런 항변도 저항도 없이….
이 보다 더 큰 모독이 있겠는가? 이 보다 더 큰 능욕이 있겠는가?
이 극악무도에 주님의 마음은 죽기보다 더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감내(甘耐)하였다. 당신 품위를 잃지 않았다.
머리둘곳도 없이 가난하신 주여, 이제 당신께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뿐입니다. 당신 살과 뼈를 꿰뚫을 십자가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이상을 또 소망치도 않으셨읍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벗어버릴 수 있게 하소서~ 알몸의 가난도, 그 때문에 받는 세상의 멸시와 천대도 감내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그러나 주여, 당신께 향한 나의 길을 막고 내 눈을 가리우는 것은 명예나 지위나 재물만이 아닙니다. 그 보다 더 이 육신입니다. 이 온갖 욕정에 사로 잡힌 나의 나약한 인간성입니다. 몸에 걸친옷 처럼 쉽게 벗어치울 수 없는 이 「묵은 인간」 입니다.
주여, 어떻게 하면 이 「묵은 인간」을 벗고 당신을, 「새 인간」을 참되이 입을 수 있겠읍니까? 나로 하여금 일절을 잃은 영점(零点)의 상태가 은총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게도 오직 필요한 것은 「나」를 못받는 십자가 뿐임을 알게 하소서!
주여 나에게 청빈(淸貧)을, 자아(自我)마저 벗은 알몸의 청빈을 가르쳐주소서!
여기 또 당신과 같이 모든 것을 박탈 당한 침묵의 교회를 기억하소서~ 그 중에도 목자를 잃고 성당을 빼앗기고 신앙의 자유를 박탁당한 북한(北韓)의 우리 형제들을 기억 하소서! 그들은 당신과 같이 헐 벗겨 원수들의 멸시와 저주와 조소아래 외로이 서있나이다. 당신처럼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이 알몸의 가난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나이다.
주여 이 형제들에게 당신 은총의 빛을 주소서! 그들에게 신덕의 굳셈과 끝까지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