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 本社綜合】 말틴‧루터를 낳은 나라이요, 종교개혁의 요람지(搖籃地)인 독일은 점차로 성장돼어가는 교회일치운동 즉 「에꾸미니즘」의 실험지(實驗地)이다. 그리스도교일치의 길은 닦는데 있어 많은 개척자(開拓者)적 일이 이루어진 나라가 이곳이고 또한 광범위한 인구(人口) 이동이 프로테스탄과 가톨릭의 대중(大衆)을 처음으로 긴밀히 상호 접촉시킨 나라도 이곳이다.
16세기(世紀)에서 17세기에 걸쳐있었던 종교전쟁은 『백성의 종교는 지방영주(領主)의 종교를 따른다』는 일반적 원칙위에 종식되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써 지금까지 독일의 종교분포도(分布圖)는 거의 지방별로 그려져 있었고 같은 지방의 주민들은 대개 같은 종교 즉 프로테스탄 혹은 가톨릭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수백만의 독일인들이 동쪽 소련군 점령구(占領區)로부터 추방되어서 독으로 이주(移住)하게 됨으로써 거의 모든 마을과 도시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이 섞여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상호간 다소의 긴장상태가 없는 바 아니었으나 관계는 이내 개선되어 갔다. 많은 프로테스탄 지방에 있어서 그곳에 새로 이주해온 가톨릭신자들은 프로테스탄 교회의 후의로 프로테스탄 예배당에서 미사를 거행할 수 있었고, 가톨릭지방에서는 성당 건물에서 프로테스탄 피난민들이 그들의 예배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같은 새로운 접촉은 혼종혼(混宗婚)의 격증을 초래했으며 이것은 양편 교회에 있어 나날이 큰 문제로 되어갔다.
뿐만아니라 전쟁 동안에는 많은 프로테스탄 및 가톨릭지도자들이 「나치스」 강제 노동수용소 혹은 망명생활 중에서 서로를 알게 되고 서로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두 단체간에 현실적이요 또한 항구적인 협조를 결실치는 못하였다.
전쟁 후 독일 재건(再建) 사업에 있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이 광범위하게 협조한 것은 오직 정치적 분야 뿐이다.
이것은 곧 기독민주당(CDU)을 형성케 했으며 여기에 있어서의 상호협조는 가톨릭이 동 당(黨)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데서 재기된 여러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산발(散發) 적이나마 교회일치운동의 노력이 있게된 것은 1920년대(代)부터다. 그것은 특히 「우나‧상타」(UNA‧SANCTA) 운동과 「니털알타이흐」에 있는 베네딕도수도원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말해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의 대화의 원동력은 「로마」에서 부터 왔고 그것은 바로 요안 23세의 개방적인 정신과 제2차 「바티깐」 공의회에 기인된 것이었다.
베아 추기경-저명한 성경학자이면서 「바티깐」의 그리스도교일치촉진국장이요, 교회일치운동에 있어 가톨릭의 제1인자(第1人者)인 이 예수회회원은 독일 사람이다. 또한 「쾌른」의 요셉‧프링스 추기경과 「뮨헨」의 율리우스‧퇴프너 추기경은 공의회 안에 있어 교회일치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의회석상에서의 발언과 독일 내에서 표명한 담화사이에는 다른 점이 없지 않다. 뿐만아니라 일반신자들은 교회일치 시대를 위해 응분의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양편 교회를 위해 하나의 문제는 프로테스탄 교파의 다양성(多樣性)이다. 독일서 우세한 것은 물론 「루터」 파(派)이다. 그러나 동시에 무시할 수 없는 「칼빈」파(派)가 있으며 또한 루터와 칼빈의 교리를 혼합수정한 개신파(改新派)가 있다. 이밖에 작은 「루룹」을 이루는 수다한 경건주의(敬虔主義)적 분파(分派)들이 있다.
지난해 성탄미사 강론에서 프링스 추기경이 가톨릭교회를 위해서는 정교회(正敎會) 및 영국 성공회와 접촉을 맺는 것 보다 더 쉽다고 말하게된 것은 바로 위와 같은 프로테스탄 내의 많은 분파문제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독일의 여러 프로테스탄 교회들이 「독일복음교회」(EKD)라는 조직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체를 망라한 이 조직의견의 보다 각자의 결정을 더 따름을 간접적으로 지적하였다.
그러나 독일복음교회는 최근 가톨릭-프로테스탄의 공동기도 양식을 인준하였다.
또한 여러가지 사회생활면에 있어 프로테스탄과 가톨릭 전문가들은 함께 회합을 갖고 상호활동의 계획을 짰다.
지난 2월 19일 「힐데스하임」 교수 하인리히‧얀쎈 주교는 7명의 신부와 3명의 평신자로 교회일치문제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이는 독일에 있어 처음되는 일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과 가톨릭교회당국은 다같이 프로테스탄의 가톨릭미사참여를 공동기도에서 제외했다. 양편이 다 이것은 신앙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공의회 제3회기 이래 독일에서는 같은 지방에 있는 가톨릭주교와 프로테스탄 감독이 함께 나와 새로 지은 공공건물을 축별(祝別)한다든지 기타 유사한 행사를 한다해도 조금도 이상스럽지 않게 되었다. 또한 양 교회가 청소년의 풍기문제 혹은 영화윤리문제에 있어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
이제 독일서는 프로테스탄교회가 가톨릭의 성모마리아 공경을 공격하는 시대는 지났다. 또한 가톨릭학교의 교사들은 말틴‧루터의 업적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설명하는데 힘쓰고 있다.
공의회 이전에는 「모스렘」 교도가 가톨릭성당에서 예배를 본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쾌른」에서는 얼마전 프링스 추기경의 동의하에 토이기출신 노동자들이 그들의 봉재월(封齋月) 「라마단」의 마지막 예배를 그곳 대성당에서 드릴 수 있었다. 이는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성 벨날드‧클렐보가 「모스렘」 교도들을 치기위해 제2차 십자군을 보내야 한다고 외친 곳이 다름아닌 바로 이 대성당에서였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 독일에서는 여전히 「모스렘」 교도들을 「쾌른」 대성당으로 초대하는 것이 프로테스탄들과 참된 대화를 가지게되는 것보다는 더 쉬운일이라는 말들이 돌았다.
왜냐하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 간에는 같은 점이 많으면서 깊은 차이점이 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