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 特信】 『만일 그런 기회가 있어 성당을 지으시게 되면 어떻게 짓겠읍니까?』
이것은 「바티깐」 주간(週刊) 화보(畵報) 「옷세르바또레‧텔라‧도미니까」가 한 논설을 부탁하면서 원고지를 앞에 놓고 생각에 잠겨있는 쥴리오·베빌아과 추기경에게 던진 질문이다.
83세의 노(老)추경은 그가 짓고 싶은 성당을 종이에 그렸다. 동시에 여기대한 추기경의 글은 오랫동안 바오로 6세 교황의 친한 벗이며, 얼마전 추기경위에 올림을 받은 이분의 인품(人品)의 일면과 성당건축의 경험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의 글은 동 논설의 초역(抄譯)이다.
■ 萬人 받아들이는 神聖한 집으로
『내가 짓고싶은 성당은 이러하다. 그것은 신자이건, 미신자이건, 교회의 원수에게까지 신성(神聖)한 것을 드러내 주는 「에피파니」어야 한다. 그것은 신성하게 사용하는 장소만이 아니고 그 자체가 신성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당은 십자가가 걸려있고 성상이 세워져있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 아니다. 그 주위에 서있는 다른 어떤 건물과도 다른점에서 그 신성함이 나타나 있어야 하고, 그 따뜻한 윤곽이 거리의 짓밟힌 인간을 향해 은연중 속삭여 오는데 그 신성함이 있어야 한다.
성당은 「근심걱정의 무거운 짐진자는 다 내게로 오라!」하신 주의 말씀을 감득케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많은 훌륭한 대성당과 같이 주택(住宅) 한가운데 성당을 짓고 싶다. 그래서 천주의 「드라마」와 「인간의 드라마」 사이에 끊임없고 생활한 교류(交流)를 눈으로 볼수있을 만큼 드러나게 만들고 싶다. 그렇게되면 성당은 유리 조각같이 쉽사리 깨지고 진흙탕에 빠진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 한 가운데 살과 피의 참된 마음이 될수있을 것이다.』
■ 「시멘트」 文明避難處에 아담한 庭園도
『그 성당 앞에는 살풍경(殺風景) 한 현대 「시멘트」 문명(文明)을 피해 다시 찾고싶은 자연(自然)을 표상하는 자그마한 정원(庭園)이 언제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이를 숭상(崇尙)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그렇게 보았듯이 천주의 말씀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 다시 돼야 한다. 이것은 특히 오 늘날과 같이 너무나 많은 화적(火賊)들이 이를 황폐(荒廢) 시키고 여기서 새로운 우상을 그려낼뿐 아니라 건너야할 새로운 피(血)의 벌판을 만들고 있는 이때에 더욱 그러하다.』
■ 우뚝 솟은 鍾塔에 마음 가다듬을 玄關
『성당의 외관(外觀)은 마음의 고향을 잃은 인간에게 실망을 줄 수있는 일체의 허식(虛飾)을 피해야 한다. 사람들은 참된 품위와 남용과 오만을 드러내는데 불과한 사치를 구별할 줄 안다.
그리고 내가 밤낮으로 꿈꾸는 나의 작은 성당에는 반드시 종탑이 서 있다.
종탑은 오늘날에도, 아니 오늘날에 있어 특히, 내재(內在)적인것과 초월한 것을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깊이 땅속에 뿌리를 박고 있어 그 땅과 같이돼있으며 동시에 하늘 높이 솟아나 가견적(可見的)인 것을 초월하여 불가견적(不可見的)인 것이 분명있음을 우리에게 뚜렷이 가르쳐주는 것이다』
『중앙 큰 문앞에는 반드시 현관이 있어야 한다. 공간여유가 적은 경우에는 필요하다면 본건물(本建物)에 붙여서라도 이를 만들어놓 도록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같은 여유는 교회의 중요한, 또 엄숙한 예절을 위해 요구되며 성 당에 들어가기전에 필요한 마음준비와 주일 같은날 이웃 친지(親知)들 간에 천주께 대해서뿐아니라 바깥세상에서 돈독(毒)에 절고 계급투쟁에 시달린 사람들 사이에 있을 단순한 시정간담을 위해서 도 필요하다』
■ 莊嚴한 中央門에 옆門도 두고싶어
『중앙문은 크고 장엄해야 한다. 그래서 어진 임금인 주께서 당신 백성들한테 나아가 실수있고 「올겐」의 부드럽고 조화있는 여음과 분향(焚香)의 향기가 자동차 「크락숀」의 소음(騷音)과 기름(가스) 냄새로 뒤범벅이된 세상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정화(淨化) 시킬수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얼른 눈에 띄지않는 곳에 옆문하나를 꼭 내고 싶다. 그래야만 어두움의 장막(帳幕)이 조심스럽게 덮일무렵 니꼬데모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며시 성당안으로 들어설수있기 때문이다. 천주님과의 단순하고 진지한 대화를 위해서 이런 출입구는 꼭 필요 하다』
■ 聖堂은 잔치집 같고 모든것 祭臺로 集中
『성당내부(內部)는 복음적 빛을 발해야 한다. -마치 혼인잔치가 벌어진 「홀」과 같이-.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라는 것은 임금이 백성들을 당신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내부는 넓직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천주성부는 모든 사람들이 그 자리에 와서 앉을수 있기를 원하신다. 혼인잔치의 자리니만큼 아무리 아름답고 거룩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성상(聖像)이 먼저 눈에 띄어서는 안된다.
첫 눈에 보이는 것은 상(床) 제대라야 한다. 그 제대를 향해 모든 것이 모여들고 있고 또 그 제대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돼 있어야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천
주의 자녀들을 위한 성 총이 풍성히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그 위에 큰 십자가가 천정(天井)에서 내려오듯 걸려있다. 그 이유는 십자가란 초대교회의 많은 「바스카」(復活節) 설교에서 말한바와 같이 「우주적(守宙的) 나무」이기 때문이다.』
『성당안에는 모든것이 갖추어져있어야 한다. 고해틀, 「올겐」, 합창대가 있고 게시판도 있다.
성당 출입구에는 탕자(蕩子)가 돌아오기를 근심에 잠겨 주야로 기 다리는 「아버지」 의상(像)만이 있을 뿐이다.』
■ 傾斜진 바닥을 煖房裝置해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당내부가 세가지 특성으로 갖추어져야 한다. 그것은 볼수있고, 알기 쉽고, 훈기가 감돌아야 한다.
천주를 흠숭하는 예배(禮拜)는 천주와 인간 사이의 생활한 대화(對話)이다. 그러나 이것은 볼수있고 알기 쉬워야만 가능하다. 이 문제 해결에는 (전례에 있어 모국어사용을 허용함과 같이) 교회만이 권위를 가졌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건축기술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성당 내부 바닥은 약간 경사(傾斜)져 있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러면 중(會衆)과 제대사이의 대화는 용이하게된 것이다.…』
『훈훈하고 편안함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오늘의 세대(世代)는 삶의 질곡(桎梏)에 지쳐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저 황량하게 넓기만하고 앉을 자리도 없이 삭막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회중의질서는 없어 지고 또 주의가 산만해진다. 난방장치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육신이 훈훈하지 않으면 마음이 훈훈해지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비인간적 신심(信心)이다.』
■ 무엇보다 포근한 對話場所여야
『나는 또 성당에는 또 하나의 현대세계의 요청에 맞는 것을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과거에는 사는 집이 인간을 보호하는 성(城)이었다. 인간은 자기집에서 고요한 침묵중에 기구하고 묵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가정집의 신성한 구석인 침묵은 영영 잃어 졌다. 집도 거리도 새로운 기술문명의 침입과 인간들의 아우성으로 너무 소란하고 번잡하다. 천주와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대화할 수 있는 자리가 도대체 없다. 그래서 성당은 단지 그리스도의 큰 가족이 전례를 통해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자리일뿐아니라 개인의 고요한 기구도드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생활하신 천주와 현실의 인간을 위한 참된 성당이 되기 위해서는 성당은 신앙고백과 같이, 사랑의 손길과 같이 솟아 있어야하며 모든 인간을 형제적 유대로 결합시키고, 장례에 대한 희망의 증거가되며 보호를 찾는 사람의 은신처, 막다른 인생의 안위의 자리가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