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般社會(일반사회)의 敎會觀(교회관)
나는 가톨릭을 이렇게 본다 (到着順)
발행일1965-03-28 [제464호, 4면]
■ 型式置重과 內的不忠實 / 李御寧(評論家, 京鄉新聞論設委員)
「고딕」 형식의 무수한 첨탑(尖塔)을 가진 성당의 건물은 가톨릭의 근본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많은 인간들이 정신적인 지주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현대의 한복판에서 흔들림이 없이 「하나]를 향하여 서있는 그 모습은 절대자로 향한 기도의 자세를 과시하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절대자와 접근하려는 노력 속에서 그들은 절대적인 복종을 익히는 것이며 현실과 인간의 속성을 벗어 버리려고 눈물 나는 수련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종교마저 작업화되고 타락해가는 속세 속에서 물들지 않는 순결을 고수하려는 노력! 그 피맺힌 기구의 「포오즈」는 타협을 모르는 철저함을 통하여 성스러운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다.
가톨릭의 특징이 되는것은 순화된 의식의 장엄함이다.
가브리엘의 옹호를 받으며 승천하는 예수, 아기를 안은 성 처녀의 조각을 배경으로 울려 퍼지는 성가와 「라띤」어의 연도(連禱), 「베일」을 쓴 여인들의 모습!
실로 가톨릭은 이러한 의식의 미학적 분위기를 통하여 성스러운 영혼의 세계를 제시하여 준다. 그러나 하나를 향한 자세와 의식의 장엄성! 이 두가지는 가톨릭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도 될수 있는 요소들이다.
국외자(局外者)인 내 눈에는 절대적 신앙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지나치게 「현실」과 「인간」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육성(肉聲)을 속이고 본능을 학대하는 그 과도한 「스토이씨즘」이 자칫하면 자기과탄과 위선으로 흐르게 하지 않을가 하는 기우가 있다.
지나친 의식주의 역시 가톨릭의 난점중의 하나라고 본다.
삼복에 굳이 두꺼운 흑포로 전신을 휘감고 허덕이는 자학만이 절대자를 향하는 유일한 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율법을 존중합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공허한 형식주의에 흐르기 쉽고 「도그마」에 빠지기 쉽다.
율법 보다는 그 내면에 숨어 있는 의미를 중요시한 그리스도의 정신은 가톨릭의 장엄한 사원이나 의식과는 좀 거리가 있을것 같다.
성 「베드루」 사원의 호화로운 주랑(柱廊) 앞에 서서 소박한 어부 베드루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었던 때의 허탈감과 같은 것, 말하자면, 십자가만 남고 처형당한 예수가 부재한 것 같은 느낌을 엄숙 한 미사의 광경에서 이따금 받게 되는것 이다.
내가 가톨릭에 바라고 싶은 것은 이러한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온전히 의식 속에 구체화되어서 내면과 외면의 융합속에서 보다 숭고한 제3의 차원을 향하여 나아가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 行動自由 없는 듯 / 李在鶴(前國會副議長)
나는 가톨릭에 대해서 비판을 할만한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지않습니다. 다만 근래에는 종교중에서 가톨릭에 대해서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형무소에 있을때 신부모씨가 수차 방문해주일도 있읍니다. 그런 관계로 기독교 관계서적을 몇 권 읽어 보았읍니다.
나를 찾아준 신부의 저서는 신을 과학적으로 설명해보려고 노력했으나 충분히 득할수 없었읍니다.
구주에 있어서의 종교개혁도 문예부흥과 더불어 충분히 역사적인 의의를 갖고 있었지만 내가 가장 감명깊이 읽은것은 역사상에서 소위 암흑시대라는 약 천년간의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시대였읍니다. 이시대에 구주(歐州)에는 현대의 발전을 가져 오게한 「에너지」가 배양된 것을 알았읍니다. 그것은 가톨릭의 위대한 공적이었습니다.
가톨릭이 한국에 들어와서 신교에 비하여 보다 많은 순교자를 냈읍니다. 그 성스러운 피는 이나라 국민들을 감화시키고 국가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큰힘이된것도 사실이지만 일정(日政) 때 독립운동에 참가 상황을 보면 예컨대 33인중 신교가 16명 천도교가 14명이나 되는데 구교는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생각해 보았읍니다. 나는 그릇된 견해인지 모르나 가톨릭교회의 조직에 있어서의 독제성에 그 원인을 찾아볼수 있었읍니다. 일반인들에 자독적인 행동을 용서하지 않고 상부의 지시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되어있는 관계가 아닌 하는 것입니다.
기도, 다 좋습니다. 다만 위선을 초래할 염려가 있는 신부의 독신제도는 개선되어야 할것 같습니다.
최근 나를 기쁘게 한 것은 가톨릭이 산아 제한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 矛盾-敎勢上昇과 社會惡增加 / 徐珉豪(現國會議員)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상당한 수의 가톨릭 신자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해방후 느느니 「다방」이요, 「교회」말이 나올정도로 예수교신자들도 늘어났으며 「사찰」도 늘어나 불교신도도 많아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유심론(唯心論)을 신봉하는 민주국가의 국민들이 종교에 귀의(歸依)하려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결코 나쁜 현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악이 조장되어 세기말적 현상이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있을까?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아닐수 없다. 종교에 귀의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국민들이 많은데 반하여 사회악이 더욱 조장되고 있다면 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회상이 불안하여 의지 할곳없는 국민들이 정신적 지주를 찾아 종교에 귀의했으나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지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종교의 교리가 우리의 현실을 타개할수 있는 힘이 없든지, 또는 승려를 포함한 성직자들의 순교정신이 박약하든지 둘중 어느 한가지에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본다.
종교는 물론 내세(來世)를 추구하는 것이나 현세에 있어서도 착한것(善)을 추구 해야된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는 결국 내세(來世) 이전의 속세(俗世)에서 인류 사회에 봉사하는 순교정신이 앞서야 할 것으로 나는 믿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가톨릭의 장점은 순교정신과 박애정신이 강하여 어느 종교보다 기아구제(飢餓救濟)를 위한 자선사업을 많이 해오고 그 존엄한 계율은 정의, 인도정신의 발양에 앞장을 서서 종교본래의 순교정신과 박애사상을 고취하는데 애쓰고 있다는 점을 들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이 박해를 당한 역사는 일일이 예시할 겨를조차 없으나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조 대원군 시대의 종교 탄압으로써 많은 외국의 선교사와 국내의 신도들이 학살을 당한 사실을 비롯하여 일제하의 탄압시기를 거쳐 해방후 공산주의자들에의하여 이북에서 자행된 종교 탄압등으로 오늘날까지 겪어온 수난은 이루다 없을수 없을 것이다. 그럴때 마다 가톨릭신도들이 보여준 순교정신은 일제하에는 반식민지 운동을 고취해 왔고 유물사관(唯物史觀)에 바탕을 둔 공산주의의 발호를 막는데 적지않게 이바지 해운 것이 사실이다.
이와같은 가톨릭의 순교정신은 방자하는 대중에게 정신적지주를 찾게하여 종교에 귀의 할수있는 성실한 안내자의 역할을 해왔다고 보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6·25를 당했을 때 전재민과 전재고아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가톨릭의 국제 구호기구는 박애정신을 베풀어 우리의 대공전(對共戰) 수행에 물심양면으로 협조해 주었고 나아가 우리가 천재지변을 당했을때도 기아구제(飢餓救濟)와 재해복구를 위해서도 많은 혜택을 베풀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같은 가톨릭의 순교정신과 박애사상의 장점이 인류사에 공헌한 깊은 우리 민족의 수난사의 한 대목에도 길이 새겨 질것으로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같은 기독교의 교리를 추구하는 예수교가 우리나라의 경우, 가톨릭보다 더욱 교세를 확장하고 많은 신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반드시 가톨릭이 지니고 있는 모순과 단점이 있기 때문이리다. 가톨릭이 너무나 권위주 의요, 형식적이며 교조적(敎條的)이라함은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운동에서 이미 옛날에 지적된바요, 여기에서 탈피하려는 뜻으로 선교운동이 일어나 그것이 결실을 맺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은 종교사(宗敎史)가 증명하는 바이다. 솔직히 말해서 가톨릭의 단점은 지나친 의식과 형식, 독선때문에 생존투쟁을 경시할수 없는 오늘날의 생활상태하에서 개인의 자유의사가 중요시되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범속한 인간으로는 복잡다기한 그 의식과 형식을 따르기가 매우 곤란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나친 「로마] 제국의 권위와 독신이 「유럽」에 있어서의 독립사상을 불러일으켜 가톨릭교황의 지배를 벗어나야 되겠다는 운동으로 확대되어 오늘날 「유럽」의 국가, 민족의 형태가 형성 발전된 것으로 볼수 있으며 지나친 가톨릭의 의식과 형식에서 벗어나려는 신교 운동이 일어나 마틴‧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운동이 결실을 맺었다는 것을 상기할 때 가톨릭의 모순과 단점은 꼭 지정되어야 할것으로 믿는다. 신앙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결코 웅장한 사원이나 찬란한 전당과 같은 교회의 문을 출입하고 엄숙한 의식과 지나친 형식을 찾는데 있는것은 아니다.
가톨릭이 그와 같은 의식과 형식을 찾고 있는데도 「고해」란 것으로서 계율을 범한 신도가 신부앞에서 고백을 하고 참회한다면 이를 용서해 주는것은 또 무슨 뜻일까? 이것은 아마 박애정신에 의한 관용(寬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수 있지만 신앙을 마음속에서 찾지 않고 의식에서 찾은 데서 생긴 모순으로도 볼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태리 같은데서 강간, 간통사건 등이 가톨릭신자들 중에서 더욱 많은, 모순이 범해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모순점은 순교정신과 박애사상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함으로써 선을 추구하려는 가톨릭이 시정할 점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