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紙上聖路巡禮(지상성로순례)] 십자가의 길은 생명의 길
보라 여기 기적과 인간예지를 초월한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발행일1965-04-04 [제465호, 3면]
■ 제13처 예수의 문제성시를 십자가에서 내리다
핏빛노을이 서산마루에 타고 십자가의 그늘이 갈게 언덕아래로 뻗쳤다. 형리(刑吏) 하나가 이미 숨진 예수님의 늑방을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요왕 19장 34절) 이제 남은일은 그를 안장(安葬)하는 것뿐이다. 성모님이 아드님의 시체(屍體)를 품에 받아 안았다. 어머니는 만신창의가 되어 숨진 외아들을 다시는 놓치 않을듯 꼭 감싸 안았다.
「나자렛」 시절의 그씩씩하고 명랑하던 소년 예수, 언제나 젊은 생명이 넘쳐흐르던 청년예수, 그렇게도 다정하고 사랑하던 아들이 이제 불러도 불러도 답할리없는 차디찬 시체로 변하여 있다. 그러나 이 절망의 오열속에서도 성모님은 『주의 종이 여기 대령하오니 당신 말씀같이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는 그 첫날의 신앙과 기구로 모든 고통을 다 감내했다. 성모님의 유일한 소원은 당신 전부를 아드님의 수난에 합하여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 제헌으로 함께 바치고 싶을 뿐이었다.
이 가련한 모자의 주위에 요왕, 마리아‧막달레나, 요셉‧아리마테오 그외 몇 사람의 제자들이 역시 체읍에 잠겨 둘러 서 있다.
이들의 눈에는 이제 예수님은 영영 죽었고, 그와함께 모든 기대도 희망도 한갖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삶의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나 숨진 예수님의 모습에는 티끌만한 어두운 그늘도 볼수 없다. 어머니 품안에 고이 잠든 어린 아기와 같이 밝고 평화스럽다. 과연 그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에 살다가 그것을 위해 죽은 인간의 가장 깊은 평화중에 잠들어 있다.
그는 우리에게 한권의 책도 한줄의 글도 친히 남긴 것은 없다. 그러나 이 고요히 숨진 얼굴을 보라! 이 평화로이 감은 눈은 우리에게 어떤 인간의 깊은 지혜와 사상도 밝힐 수없는 인생의 전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인간이 왜 사는지?
왜 고통과 불행을 받는지? 왜 죽는지? 이같은 인간실존의 근본문제들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뿐만아니라 더깊이 인간에 대한 천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그 사랑때문에 풀어주신 우리 죄의 용서를 이 호수같이 고요한 얼굴은 말하고 있다.
천주의 끝없는 자비와 삶의 의미를 이처럼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이 맑은 얼굴, 그것은 바로 당신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복음의 결정(結晶)이다. 이 자체가 바로 어느 위대한 설교도 따를수없는 가장 훌륭한 가장 감명깊은 복음의 설교이다. 그 어디서 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어리석음」 이왜 희랍인들이 구하는 지혜보다도 유데인들이 구하는 기적보다도 더초월하는 것인지 증시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얼굴의 평화는 세상의 암흑과 인생의 죽음을 쳐 이긴 영원한 생명의 승리 부활의 환희를 예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여 이제 편히 쉬소서! 어머니 품속에 고이 잠드소서! 당신 일은 끝났읍니다. 성부의 뜻이 이루어졌읍니다. 이제 부터 우리의 삶에는 보람이있고 비록 나날의 생활이 가난과 병고, 슬픔과 서러움에 가득차 있달지라도 당신은 우리의 위로와 희망이 십니다.
주여 이밤에 나로 하여금 당신 평화중에 잠들게 하소서! 나의 매일의 십자가, 평생의 십자가를 지고간 그 저녁, 나의 임종의 저녁에 당신과 함께 그 깊은 평화중에 쉬게하소서!
성모여! 당신 아드님과 당신 고통의 연유된 나를 용서하소서! 이제와 죽을때에 이 죄인을 위하여 빌으시고 그 마지막 밤에 내 영혼을 당신 품에 받아 안아주소서!
■ 제14처 예수의 문도성시를 장사하다
어두움이 죽음의 계곡에 서서히 덮일 무렵, 예수님의 시체는 요셉‧아리마테오가 마련한 새 무덤에 안장되었다. 큰바위를 굴려 무덤문을 막았다. 마리아‧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해 실신한듯 앉아있다.(마테오‧27장 57절~61절 참조) 이제 일은 끝났다. 성모님과 몇몇 가까운 친지들이 아직도 영영 돌아설길 없는 미련에 머물러 있을뿐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갔다 미구에 이 혜성(慧星)과 같이 잠시 빛났다가 사라진 인간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사람도 기억할 사람도 없을것만 같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사건은 이로써 완전히 끝장이 난것이다. 과연 유데아인들에게 피소(被訴) 되어 비라도의 사형언도로 십자가에 처형된 그리스도의 수난사(受難吏)는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그가 세운구속의 공로에 의한 구원의 역사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는 죽은 형태(形態)가 아니다. 과거와 함께 사라진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묻혔던 그 무덤의 자리가 바로 그리스도 죽음을 쳐이기고 부활하신 자리임을 상기하자! 여기서 다시 「십자가의 어리석음」의 진리의 깊이를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힘은 외적 세력에 있지 않다. 그 생명력은 씪을 육신이 아니다. 그 약함에, 그 고난에, 그 십자가의 길에, 그 자기희생에 그리스도교의 힘과 생명력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는 사랑, 모든것을 낳고 기루고 살리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밀씨는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 많은 결실을 낳게되고 그리스도자(者)의 십자가 죽음위에는 새로운 생명의 나무가 무성하게 된다.
천국은 내일 모래 혹은 십년후에 도래(到來)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정사(釘死)되고 묻히는 오늘 이 시간에 우리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주여 이것이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복된 소식입니다. 모든 십자가의 길 끝에 영생의 부활이 온다는 기쁜소식입니다.
주여 나에게 이 진리를 깊이 깨닫게 하소서! 모든 고통도 축복의 원천되고 죽음마저 당신을 믿고 바라는 이에게는 새 생명의 씨됨을 깨닫게 하소서!
주여 당신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나이다. 우리의 소망이시요, 사랑이시나이다.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종 바오로의 말과 같이 내안에는 오직 당신만이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처럼 내 마음도, 내 정신도, 내 온 존재가 천주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게 하소서!
주여 여기 내 형제들을 보소서! 그들은 헐벗고 굶주리나이다. 마음과 육신의 병고로 신음하나이다. 이 시간에도 수없이 실의와 고뇌속에 죽어가나이다. 주여 이 형제들의 불행이 계속되는한 당신의 십자가의 길과같이 나의 십자가의 길에도 끝이 없으리이다. 나는 당신 앞에 부당한 죄인이옵고 불충한 종이옵니다. 그러나 주여 당신 뜻이오면 나로 하여금 이 형제들을 위한 제물되게 하소서! 이목숨 다하도록 당신께 의합한 번제되게 하소서! -끝-
(지금까지의 필자=김수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