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과 예배당을 거쳐와서 수도자와 같이 가난하게 겸손하게 살며 남을 위해 봉사하기만을 좋아하고 복음전파에 전심하던 그는 가셨다
결백하고 청렴하고 겸손하기로 유명한 서울고등법원장 바오로 김홍섭 판사가 숙환인 간장암으로 3월 16일 51세를 1기로의 주의 품에 선종하였다.
김판사는 본시 프로테스탄 신자였다. 예배당에서 만족을 얻지못한 그는 어는 절(寺)을 찾아가 석달동안 묵으면서 불교를 연구하였다. 절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돌아온 그는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임시수도 부산시에서 였다. 먼저 영세입교하고 있던 최근 정년퇴임한 대검찰청 요셉‧이홍규 검사가 그눈치를 채고 김판사를 가톨릭에로 안내 하였다.
서울로 환도한 다음 이검사와 김판사는 우연히 길에서 서로 만났다. 김판사는 극장에로, 이검사는 성당에로 서로 끌었다. 이검사가 이겼다. 그때 본당신부는 전교수녀를 그에게 소개하였다. 수녀는 그의 집에 다니면서 가족 전원에게 교리강의를 하였다. 그해 성탄절에 김판사 가족 전원이 영세입교 하였다.
김판사는 두고두고 찾던것을 이제 얻었다. 그는 평소에 느끼기를 우주관, 인생관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옳다. 그렇다. 절대자가 없을수 없다. 그런데 도덕을 닦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불교가 옳다, 그러니 이두가지를 어떻게 융합시킬수 없을가하고 생각하여왔었는데, 이제 천주교에 들어와 보니, 이 두가지가 잘 융합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고 지극히 만족히 생각하였다.
그는 매일 미사참례와 영성체를 궐지 않았고, 저녁에는 온가족들과 함께 만과를 바쳤으며, 전주고등법원장으로 있을때는 날마다 순교자 누갈다 묘지에 참배하였다.
영세입교한 김판사에게는 점차로 수도자 「타입」이 박혀졌다. 한번은 진지한 태도로 내게 묻기를, 자기로서는 수도생활을 할 수 없겠느냐고 문의하기에 가정에 대한 책임이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할수 없다고 나는 대답한일이 있다. 김판사의 부인은 증언한다. 그분이 결혼전에 가톨릭을 신봉 하였더라면 틀림없이 수도원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김판사는 대전 성 프란치스꼬수도원을 가본 일이 있었다. 그는 팔남매를 다키운 다음에는 대전수도원에가서 종직이로 일평생을 지내고싶다는 말을 가끔 하였다.
그는 이검사의 개인전교 덕분으로 자기가 입교의 은혜를 받았음을 생각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역시 개인전교에 주력하였다. 검소한 생활에 자기생일잔치를 거부하는 그였지만, 전교상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친지들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간소한 만찬을 베푸는 수도 가끔 있었다. 김판사의 전교의 결과로 6·7명의 법관이 영세입교 하였다.
그는 검소하고 언제나 겸손하였다. 양복을 지어입는 일은 없고, 시장에서 중고품을 사 입었으며, 「오버」는 미군 모포지에 물감을 들여서 입었고, 「비닐」 신이나 검정고무신으로 출퇴근하는 수가 많았다. 그는 판사였지만, 판사 티는 조금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술한 보통시민에 불과하였다.
그가 강원도에 다닐 때였다. 「버스」가 검문소 앞에 정차하였다. 경관이 올라와 승객들을 검문하다가 그 앞에 이르러 『무엇하는 사람이야?』 하고 물었다.
『판사입니다』
『판사가 무슨 판사야? 신분증 내놓아』 하고 경관은 소리쳤다. 그는 신분증을 꺼내어 경관에게 공손히 드리면서 『판사를 판사라고 그러지 무어라고 하겠읍니까?』
하고 조용히 대답하였다. 그의 신분증 에서 「대법원 판사] 임을 알아본 경관은 깜짝 놀라 깍듯이 거수경례하면서 용서를 청하였다. 이런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가 한동안 강원도에 다닌것은 그의 말대로하면 「노다지」 때문이었다. 강원도 어떤 촌락에 가보니까 촌민들이 마음의 의지할바를 몰라 미신을 숭상하더란다. 그래서 김판사는 그들에게 천주 계심과 영혼불멸등 천주교리를 설명하여 주었더니, 그들은 모두 감심으로 잘 들으므로, 김판사는 종종 그들에게 가서 교리를 설명하여 주었다.
이들을 가리켜 「노다지」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가 어디였으며, 어떠한 효과를 내었는지 자세히 알수 없다. 그는 자기의 그런 업적을 잘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가 법정에서 부득이 사형언도를 내리고서 며칠 지난다음 교도소로 그 사형수를 찾아본다. 자기 직책상 달리할수 없어 사형언도를 내렸지만, 심히 미안한 일이라고 양해를 빌고나서, 이왕 이렇게 된바에야 영혼이나 구하라고 권고한다.
그 효과를 보고서 사형수 분야에 전교를 시작하였다. 각기 학식 정도를 따라 적당한 교리책을 사서 엽서를 끼워 들여보낸다. 그 반응이 있으면 종종 방문하고 권고한다. 그래서 많은 사형수들이 영세 입교하였다. 허태영(許泰榮)등이 태연자약한 얼굴로 총살형을 받을수 있었다는 것이 가톨릭 신앙의 힘때문이었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서울 교도소에 장성도(張星燾)라는 사형수가 있었다.
사형이 확정되자, 완력이 세고 성질이 사나운 그는 같은 감방에 있는 재소자이거나 교도관이거나를 물론하고 닥치는대로 행패가 심하였다.
그래서 다른 사형수와는 달리 장만은 수족을 결박하여 두었고, 교도관 두명이 지켜야 하도록, 교도소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김홍섭 판사와 접촉이 시작되더니, 드디어 영세입교 하였다. 영세하던날부터 장은 아주 딴 사람이 되었다.
겸손하고 양선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에게 돌아오는 별식이나 의복을 곧잘 이웃에게 사양하였다.
그리고 전교를 시작하여 몇명을 영세 입교시키고 자기가 친히 그들의 대부가 되었다. 사형집행을 당하게 되어, 교도관들이 그의 손과 발을 묶으려니까, 그는 『이놈은 아주 괴악한 죄인입니다. 아프도록 꼭 꼭 묶어주십시오』하고는 조용히 형을 받았다.
아직도 뜻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더 있겠지만, 김판사는 이런것을 발표하기를 싫어했다. 죽기 얼마전 자기 부인을 보고서 나 죽은 다음에도 수다떨지 말라고 부탁한것도 이런 뜻이었으리라. 그중 한가지가 「가톨릭知性人의 隨想集」에 「左盜의 노래」라는 제목 아래 그의 친필로 수록되어 있다.
그는 성탄때가 되면 다른 누구에게도 축하 「카드」를 보내지 않지만, 전국 교도소에 있는 자기 대자들에게는 매번 친필로써 뜻깊은 축하 편지를 보냈다.
그와 재소자들과의 사이에 서신연락이 상당히 있었겠지만, 입을 다물고 말았으니 알길이 없다.
그는 또한 박봉을 털어서 「경향잡지부 30부」를 교도소에 계속 보내주었다. 이것은 재소자들에게 아주 감미로운 위안이었다. 사형수 분야는 내가 인계받았지만, 이 교회 간행물 투입을 인계받을 특지가는 과연 없을 것인가?
생활문제만 없다면 변호사 개업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료봉사하는 것이 일평생 소원이라더니, 이런 소원도 내버리고 이제 김홍섭 판사는 떠나갔도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지도신부)
尹亨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