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입을 다문다. 「밤새껏 내 심장의 피를 빨아먹던 검은 뱀이 실은 내 자신의 오만(傲慢)이었음을 깨달은 아침」에는, 차라리 입을 다문다. 그래도 촛불처럼, 저 제대의 촛불처럼, 언젠가는 아버지 앞에 이르러 시름없이 녹아내려 보고 싶은 삶이기에 그 허리띠를 동인다. 신을 신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길을 떠나 본다. 차라리 입을 물고 가라고, 주께서 당부하신 길이다. 수모(受悔)의 길이요, 패배의 길이다. 형국(荊棘)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다. 바로 주께서 그렇게 가신 길이다. 볼품없이 벗기운 몸의 수치보다, 침뱉음보다, 성체대례를 이루신 그 존엄한 손바닥에 굵은 쇠못이 박히운 아픔보다, 가르쳐도 가르쳐도 수그릴줄 모르는 인간들의 뻣뻣한 목덜미를 더 안타까와 하고 피로와 하신 주의 십자가의 길이다. 나무의 열매로 해서 상실된 우리의 영명(靈命)을 다시 살리려고 새로운 나무를 지고 가신 길, 주 친히 그 나무의 새로운 열매로 달려 주신 것이다. 그것은 티없이 순결하고 양선한 어린 양이 희생으로 끌려간 길,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른 번제(燔祭)에의 길이다. 그리고 참으로 아버지께서 가납(嘉納)하셨기에, 주께서 부활하시고 마침내 승리하신 길, 죽음을 바꾸어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 되게하신 「바스카」의 길이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현의(玄義)를 밝히 이해 할수는 없다. 허나 우리는 이 길을 간다. 아버지께로 건너가는 이 「바스카」의 길을 간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주께서 이 길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도 주와 같이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에서, 그 아무데도 닿지 않는 안개같은 속념(俗念)이 말끔히 걷힌 것은 아니나, 허리띠를 다시 동여 본다. 신을 신고, 지팡이를 한손에 잡고 길을 간다. 또 한손에는 꽃이나 푸른 나뭇가지들을 들고 길을 간다. 언제 오실는지 모르는 주, 그 숱한 천신들에 옹위되어 오실 주를 맞을때, 그것들을 내흔들며 목청껏 이렇게 부르짖고 싶기 때문이다. 『다위의 자손 호산나-』
金允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