受難節(수난절)의 音樂(음악) 바흐의 마테오 受難曲(수난곡)
「苦難(고난)의 深淵(심연)」 默想(묵상)케 하는 藝術(예술)
恐怖(공포)·苦痛(고통)·莊嚴(장엄)·平和(평화)에로 限(한)없이 이끌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迫力있게 傳하는데 있어 바흐의 「마태오 受難曲」 보다 더 앞서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 曲은 「마테오 福音」 6章 7章에 나오는 主의 受難의 이야기를 音樂的으로 表現한 것이다. 그러나 그 「텍스트」에는 성경말씀외에 첨가된 것이 있으며 이것은 바흐의 時代慣習을 따라 복음의 사건을 주석하는 말로써 18世紀의 著名한 歌詞作者 피칸델에 의해 作詞된 것이다.
「시온의 딸들」과 「信者들의 合唱」이 이 歌詞로써 表現되고 있으며 이들은 福音 「텍스트」의 感動的 「무드」를 확대시키고 혹은 이 「드 라마」의 觀覽者들을 代身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흐의 受難曲 最高水準의 作品이되게하는것은 그 말 텍스트」가 아니다.
그것은 音樂이며 4時間이란 긴 時間을 초월하여 깊이 잠길수있는 정신적 예술적 체험이다.
「라이프찌히」의 「聖 토마스」 敎會에서 행하여지는 聖金曜日 說敎中 연주되기 위해 作曲된 바흐의 이 受難曲은 實로 限없이 흘러 넘치는 美의 源泉이다.
이제 이 曲은 「멤버」 數가 같은 두合唱團에 의해 唱하게돼 있다.
첫 演奏會때는 不過 17명의 歌手만이었다는데 이것은 그 以上의 소리를 바흐가 願치않아 서가 아니고 그가 구할수있었던 좋은 歌手의 數가 그밖에 안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오케스트라」에는 한 사람의 「올겐] 演奏者와 「합시코드」(피아노前身) 演奏者를 포함하여 모두 28名의 器樂家들이 있었다.
그들中 一部는 이미 隱退해있는 사람들이었고 모두가 다 그 曲연을 연주하기에 충분한 기술 鍊磨를 닦은 사람들도 아니었다.
이 曲의 重要役割을 담당하는 者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노래하는 「바리톤」과 福音史家가 되어 受難史를 아름다운 叙唱調로 노래해가는 「테너」를 비롯하여 군데군데 이 受難史를 註釋하는 「솔로」를 唱때하는 「소프라노」 「콘트랄토」 「테너」 「바스」 들이다.
이들은 또한 유다스, 베드루, 大祭官 가이파, 본시오‧빌라도와 그의妻 베드루를 告發하는 두 女徒, 두 祭官및 두 證人들의 말들을 노래한다.
바흐는 성 마테오의 受難史에 들어가기전에 합창단, 「오케스트라」 및 少年合唱團을 시켜 序頭를 여는 말들을 노래로 부르게하는데 여기서 「시온의 딸들」과 「신자들의 합창단」은 對話식으로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사랑 때문에 羔羊과 같이되어 十字架를 지고가게 된것을 哀䮲하는 노래를 부른다.
이같은 天地가 무너질 것 같은, 또한 受難中에 계시는 主님의 주위를 둘러선 요란스러운 群衆을 表現하는 序曲이 끝나면 福音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바리톤」은 嚴肅히 『너희가 알거니와 이틀후는 「바스카」 첨례가 될것이요. 또 인자십자가에 못 박히기로 잡히리라』하신 主의 말씀을 노래한다.
바흐는 열렬한 信仰을 가진 루터派 信者로서 主님에 대하여 불타는 사랑을 가졌었다. 그는 그 數많은 「칸타타」와 이 受難曲을 통해 얼마나 큰 사랑과 信仰으로써 主의 말씀을 따라가는지 잘 드러내고 있다.
마테오 受難曲에서는 主님의 말씀은 初期 이태리 作曲家들의 樣式에서와 같이 絃樂器로만 伴奏되어 노래 불러진다.
그 소리는 마치 後光을 이루는것 같다. 바흐는 이曲에 있어 오직 한번만 그런 관습에서 難脫하고 있는데 그는 그의 音樂의 色彩를 잘 調和시켜가는 거의 本能的인 正確性으로써 『내 천주여, 내 천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十字架上의 主의 絶望的인 부르짖음을 노래하는 순간에는 현악도 침묵을 지키게하고 오직 [올겐」만이 고요히 또한 처량히 울려오게하고 있다.
바흐는 마테오受難福音의 全篇을 通해 볼 수 있는 恐怖와 苦痛, 또 그 莊嚴한 場面을 表現하기 위해 音樂의 힘을 餘他없이 騳使하고있다. 그는 또한 그가 叙述하는 具體的 場面에 對比되는 作曲을 하고 있다. 가령 예수님이 베드루와 야고버와 요왕셋을 따로 데리고 「제세마니」 동산으로 가셨을 때 베드루는 여기서 피칸델과 바흐가 受難曲中에 삽입한 「아리아」 中 하나를 노래한다. 『나는 나의 예수님옆을 지키려다』하는 이 「아리아」는 깨어있고자 하는 베드루의 뜻이 얼마나 굳센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긴 노래가 「테너-솔리스트」와 「오보에」(木管피리)의 2重唱으로 불려지는 下部에 바흐는 합창단을 시켜 「리프레인]을 붙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罪는 잠들었다』라는 이 노래를 베드루와 이제는 떨어져가고 없는 유다스를 제외한 10명의 잠든 본 제자들을 표상하여 합창단은 열번 되풀이 한다.
이 보다 앞서 마지막 만찬에서 主께서 거기 모인 12명의 제자 중 하나가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다음 場面에서 바흐는 유다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이 각각 『주여 나오니까』하고 질문한 것을 표현하기위해 이 구절을 열한번 되풀이 시킨다. 이같은 意匠으로써 바흐는 가슴을 찢는것 같은 이 「드라마」의 아름다움을 더욱 强烈하게 만든다.
音樂의 全領域에 있어 人間의 나약함과 그 슬픔을 切感케하는것으로는 베드루가 主를 배반하는 그 장면에 있어서 보다 더 잘 표시 된곳이 없을 것이다. 바흐는 福音史家役割을 맡은 그 「테니」를 시켜 베드루의 뉘우침을 가장 훌륭히 표현케 하였다. 닭이 운 다음 베드루는 예수께서 『너 나를 세번 배반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 하고 곧 밖으로 나가 통절히 울었다. 이 『울었다』는 말을 「테너」는 잊을 수 없는 强度를 붙여 노래 부른다. 이 말마디에 바흐는 소위 「델리마스」-한 音節을 길게 修飾的으로 表現한것-를 作曲했다. 그리하여 「테너」의 소리는 그 音域의 끝까지 올라갔다가 슬픔 暎聲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것에 이어 곧 모든 음악에 있어 가장 天國的인 「아리아」 하나가 불려진다.
人間의 罪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어두운 것이든 그것을 용서해주 시는 天主의 慈悲의 無限하심을 確固히 믿고 있는 바흐는 여기서 탁월한 「바로크」 音樂을 써내려간다.
그리하여 한個의 「바이올린」이 音調의 奔流를 쏟아 내면서 베드루의 참회를 標한 눈물의 바다를 그려내고 있다. 과연 그리스도의 十字架副死는 베드루의 이 진한 人間性없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뜻 하는 그 모든 것을 뜻하는 것이 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베드루를 둘러싸고 音樂으로써 그려내는 바흐의 그림은 어떠한 油書도 이를 超越할수는 없을 만큼 뛰어난 것이다. 이것은 그림에 있어 엘·그레꼬의 「참회하는 베드루」와 비길수 있는 음악의 傑作이다.
바흐의 音樂은 場面이 激한곳이면 함께 激烈해진다. 가령 발라도가 어찌할바를 몰라 그리스도냐 바람바냐고 물었을때 합창단은 포악스러우리만큼 우렁차게 『바랍바-』라고 소리 지른다. 그와같이 聖殿의 揮帳이 찢어지고 地震이 일때 바흐의 「합시코드」는 「바스·비올」의 무거운 소리로 일층 强化되어 아래위로 激動하는 같은 怒號를 發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의 屍體를 요셉‧아리아베오의 새 무덤에 安裵한 뒤 그 저녁의 고요함을 바흐는 한없이 잔잔한 平和중에 그리고 있다.
또한 壯嚴한 場面도 있어 百夫長이 십자가 옆에서서 『이 사람이 참으로 천주의 아들이다라』고 말한 대목에서는 바흐는 그의 단순한 그러나 모든 것을 包括하는 같은 合唱과 絃樂으로써 마음 깊이 信 仰하는 이 事實을 音樂으로써 이루어지게 하였다.
뽈흉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