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信徒(평신도) 눈에 비친 美國(미국) 겉 핥기錄(록) - 美國(미국) 가톨릭 안팎 (35) 한국인의 이삿짐
가나 오나 많은 것 이삿짐
버스정류소 서울역 보다 크고
한국적 궁색 포장지도 모으게 해
발행일1964-12-13 [제450호, 5면]
한국 사람의 이삿짐은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실속없이 부피만 크고 무겁다.
「추렁크」 하나 들고 온 나였지만 처음 이사할 때는 벌써 새끼를 쳐서 양손에 하나씩 들게 되었고, 두번째 이사 할 때는 친구들의 원조가 있을 정도로 되었고 세째번 이사때는 차를 빌리게끔 되었다.
그러다가 먼 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비행기를 타야 한다.
비행기를 타려면 짐짝에 무게의 제한을 받는다.
이 무료 수하를 제한량은 한국서 미국 올 때는(국제항로) 20「킬로그람」까지 허용되는 것이었으나 그때 나는 5「킬로」정도의 홀가분한 가방을 갖고 있었고 미국내 여행때 허용되는 제한량이 겨우 17「킬로」밖에 안 될 이제와서는 30「킬로」가 넘을 정도였다.
『허 이것 야단이군 짐무게가 제한량을 넘으면 1「킬로」초과당 1등요금의 1할의 초과료를 내는 것이니 까딱 잘못하면 배보다 배꼽이 크겠는데…』 하고 혼자 걱정만을 되씹고 있었다.
짐을 정리 해 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마침내 이삿짐의 총정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이렇게 많아졌나?
1·4후퇴때 부산 피난시대를 상기해 보기로 했다.
피난 갈 때는 개나리 봇짐이었는데 서울 수복할 때는 한달 구지쯤으로 봇짐이 늘어났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실속없는 무거운 짐이 많다.
도대체 뭣이 이렇게 짐무게를 높였나? 좁은 방안에 짐을 온통 쏟아놓고 정리해 보니 「스텐레스」로 만든 취사도구가 짐무게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거기다가 쌀 · 간장 · 통조림 그리고 온통 상품의 포장 「케이스」 같은 것들이다.
우선 포장 상자는 일일이 휴지통으로 집어 넣었다. 그러나 자취도구와 주식과 부식 등은 아까와 내버릴 수가 없다. 17「킬로」를 초과 안시킬 정도로 한국식 이삿짐은 간편하질 않다. 하는 수 없이 그레이 「하운드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성탄절을 며칠 앞둔 버스 정류장은 흡사 한국의 추석 전야 같은 혼잡이었다.
버스정류장의 건물은 「뉴욕」 번화가에 있는데 서울력보다 큰 규모이다. 지하실로 2층으로 마구 버스들이 들락날락한다.
무척 지저분 했고 시발시간도 에누리가 심했다. 서민층이 드나드는 곳인 때문일까? 떠나기 전에 지쳐버렸다. (폭설로 인한 연발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본시 버스의 발착시간은 1·2분의 착오도 없을 정도다.)
「뉴욕」을 빼져나와 어느 시골길 길목에 있는 식당 앞에서 버스를 세웠다. 운전수는 아무말 없이 30분 동안이나 움직이질 않는다. 무슨 연구인가 싶어 내려가 봤더니 식당에 들어가 「비프스텍」을 뜯고 있었다.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짐만 아니라면 역시 비행기 여행이 상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조롭게 떠나기만 하며는 별로 불편을 느끼질 않는다. 졸음이 오면 의자옆에 달린 단추를 눌러 뒤로 벌렁 누우면 되고 한국의 시골길처럼 흔들리지 않으니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단조로운 풍경에 지루함도 있는 나그네길이다.
이같은 귀한 경험도(약간의 여비 절약책이기도 했지만) 실은 그 구차스러운 짐 덕분이었다.
김모 화백이 이사를 한다고 해서 이삿짐을 도우러 간 적이 있다.
『내버리기 아까운 불필요한 물건들 때문에 골치야』하고 그 부인이 땀을 흘리며 안타까와 했다.
처음 미국에 가서 상품의 풍부한 점에 놀라기도 하지만 상품을 쌀 상자가 얼마나 화려하고 재미있는 것이 많은지 처음 몇달동안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아두는 수가 많다.
미국 생활에 조금 익숙해지면서 언제든지 가게에 갔다오면 구할 수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방안에 그같이 바로 소용이 되지 않는 물건으로 꽉차게 되는 걸 알게될 때 비로소 하나 둘 내버리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선 이같은 「케이스」 하나만도 값이 얼마나 나갈터인데…』
하던 궁색하 ㄴ사고방식이 버려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더구나 이삿짐을 꾸릴때면 가벼운 포장종이까지 다 뜯어버릴 정도로 신경을 쓰게되니 이런때 비로소 한국적 궁상을 다 버리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