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人間(인간)] 信者(신자)들의 自由(자유)
발행일1965-04-11 [제466호, 4면]
『세살의 것은 세살에게 바치고 천주의 것은 천주께 바치라』 (마두 22‧21) 천주교 신자는 사람들 앞에 비천한 생활을 하는 분일지라도 주님께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사회적 조건과는 비교도 안되리 만큼 엄청난 자유를 향유하고 있읍니다. 신자는 자신의 사회적 조건에 극히 충실하면서도 이에 사로잡히지 않을뿐더러 이 조건에서 초연하는 생활을 굳세게 이끌어 나아가고 있읍니다. 인간 사회위에 초연하면서도 이에 충실하는 이유는 신자가 주님의 축복 까닭입니다. 신자는 가장 엄격한 순명과 전적인 봉사를 다짐하고 나섰기 때문에 그 어떤 사회의 도덕이나 준법정신 보다도 강한 계율을 마음속 깊이 새겨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자는 세상을 도피하기는 고사하고 초연하는 태도와 절대적으로 뛰어넘어 위에서 부터 지배하고 속세 사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충실을 통해 그리스도적 자유를 누리게 되며 사회조직 한 복판에 파고들어가 무럭무럭 피어나는 누룩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천주교 신자들은 이 전세의 압력이 사람들의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며 마치 가장 신성한 의무라도 부과하는양 속세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음과 세살은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숭배하게 만들고 있음을 잘알고 있읍니다. 천년의 역사를 통해 교회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들을 일깨우는 「등불」 노릇을 해왔읍니다. 천주님의 명에 따라 세살의 것은 세상에게 바치고 천주님의 것은 주님께 바쳐 왔읍니다.
국민으로서의 모든 임무를 다하고 단체의 일원으로서 공익을 위해 용감하고 형제적이며 의욕적인 협조 즉 금전과 노고와 땀과 필요 하다면 피까지를 혼연히 바쳐왔읍니다. 천주님께는 가장 순수한 마음과 양심의 비밀과 무제한적인 봉사와 만유위에 초월하는 사랑을 치고 있읍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세살은 같은 서연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고 있읍니다.
세상은 일시적이고 지나가는 분이며 예수님과는 비교도 되지않을뿐 려 우리와 같이 예수님의 종으로 공동 유익을 위한 그의 심부름꾼(로마서 13‧4)에 불과 합니다. 즉 세살은 명령하기 전에 먼저 순명해야 하며 더구나 그의 명령권은 일시적이지만 그의 순명은 우리의 순명과 같이 영속적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주님이시며 유일한 스승이시고 두목이시며 구원자이시고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묵시록 19‧16) 이십니다. 그는 모든 이름을 초월하는 이름과 권능을 가지시고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 모든 이의 근원이시며 우리 자유의 지축이시고 우리 원의의 종착점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구원하시는 두손 속에 있으며 우리가 자유로이 뛰쳐나오지 않는 아무도 능히 우리를 그 손에서 앗아 낼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세살이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것을 하라고 요청한다면 우리 측의 대답은 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순명함 보다는 천주님께 순명하는 것이 낫다』고.
이는 우리 신자 사명에서 오는 자유이며 자유는 이 순명을 위대하게 빛내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