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般社會(일반사회)의 敎會觀(교회관)
나는 가톨릭을 이렇게 본다 (到着順)
발행일1965-04-11 [제466호, 4면]
■ 잘못 傳해진 「敎會」 / 崔文煥(경제학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장)
서양문화의 근원을 형성한 것은 가톨릭이라고 할수 있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서구문화를 형성하고 근세 이후에 있어서도 많은 공허한 한 것은 가톨릭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필자는 작년 구라파에 가서 가톨릭계통의 사찰이 수세기를 통하여 건축되었다는 것을 듣고 또 이러한 사찰을 볼때 역사 앞에 외경(畏敬)을 느꼈다. 권위와 전통에 빛난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영원히 잊어버리지 못 할 것이었다.
이러한 권위와 전통이 있어야 인류역사는 안정성을 얻고 이를 토대로하여 건실한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전통과 권위가 한꺼번에 폐리(弊履)와 같이 무너지고 이에 대치할 정신적 가치관이 형성되지 못하는 후진국의 경우 생각할때 가톨릭이 가진 사적(史的) 의의가 더욱 중요시 된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은 우리나라의 근대화의 선봉이었으며 우리나라의 발전의 추진력이었다. 이조가 만약 쇄국정책을 쓰지 않고 양이(洋以)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진일보하였을 것이며, 망국(亡國)의 한을 면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역사가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이상 논급하지 않겠다.
가톨릭에 대해서는 이따금 많은 오해가 많다.
왜냐하면 근세이후 종교개혁자를 박해하고 또 너무나 고루하게 가거의 전통을 고집하여 새로운 발전을 저해하였다는 사실(史實)을 강조한 사가들의 견해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자연히 가톨릭에 대하여 이러한 편견을 갖게 되었다고 볼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사실도 있으나 종교개혁을 계기로하여 가톨릭 자체 안에서도 새로운 발전을 하였으며 또 이를 계기로하여 가톨릭이 동양에로 진출한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필자는 가톨릭도 신봉하지 않고 신교도 신봉하지 않는다. 그렇다하여 무신론자도 아니면서 아직 종교를 믿는 체험을 갖지 못한 법속한 인간이다.
그만큼 내면세계에 파고 들어가는 지파고 진지성이 없는 탓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신, 역사앞에 외경할수 있는 인간만이 성실성이 있는 인간이라고 예나 지금이나 생각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
■ 「信仰生活하는것 가지 않던 벗들이…」 / 金東里
이 6·7년 이래 작고한 문인들 가운데서 특히 내가 친히 지내던 분들만 해도 6‧7명이나 된다. 노천명(盧天命) 김내성(金(來成) 김말봉(金末峰) 계용묵(桂鎔默) 염상섭(廉尙燮) 오상순(吳相淳) 강소천(姜小泉)제씨 이다.
이 가운데서 김말봉 여사와 강소천씨는 평소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장로교)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장식도 당연히 교회식으로 치렀다.
오상순씨는 불교를 좋아했기 때문에 불교식으로, 계용묵씨는 유교에 가까왔기 때문에 사회식(社會式)으로 각각 장례를 치렀다.
그런데 노천명 여사와 김내성씨와 염상섭씨는 본래 종교생활을 하는 것 같지 않았었는데 장례는 가톨릭식으로 치르는 것을 보고 예식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여간 다행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딘지 고인의 영혼이 의지할 데를 얻은것 같아서 허전한 마음이 떨어졌고, 그뿐 아니라, 우선 현실적으로도 여러가지로 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나직한 소리로
『나도 죽을 때는 가톨릭을 믿어야지』 했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것처럼 일제히 미소를 지었는데 그것이 모두 동감(同感)이라는 표정들이었던 것이다.
평소에 공은들이지도 않고 죽을때나 돼서 회개를 하고 영세를 받고 영혼의 구제와 현실적 의지를 한꺼번에 얻으려는 속인들의 심사를 물론 깨끗하다 할수는 없고 또 교회가 이것을 모를리도 없지만 인간이란 본래 가련하고, 죽음 앞에 그렇게 염치도 체모도 헤아리기 어려울만치 약한 것이라고,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대해 주는 처사라 볼수 밖에 없었다.
흔히들 가톨릭교는 너무 형식적이란 말들을 하는데 이 「형식적」의 득실(得失)을 나는 간단히 말할 자신이 없다. 다만 일찌기 우리 작고한 문인들의 임종에 끼쳐준 은혜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며 이것은 가톨릭교의 좋은면의 하나였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