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은 주께서 만들어내신 날이니, 이날에 우리는 환호하고 기뻐하자! 알렐루야, 알렐루야』 (부활주일 대경)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수난의 산정(山頂)을 오르던 그 어둡고 비극적인 사순절은 끝났다. 이제 우리는 환희의 부활절을 다시 맞이하였다. 오늘부터는 「천주의 백성」 교회가 있는곳 어디든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알렐루야-』 기쁨의 노래 소리가 들로 산으로 울려퍼져 하늘에 메아리 칠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현의(玄義)가 우리의 기쁨의 참된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난 천주님의 우리에게 대한 사랑이 죄악과 그 결과인 죽음마저 극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과 인류의 역사가 단지 여기서 헛되지 않을뿐 아니라 영원히 보람있게 된 것이다. 너도 나도 모든 인간이 그와같이 부활하고 천주 성부의 영광안에 끝없이 복되이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힐때에는 아직도 모든것은 불행하고 비탄에 잠겨있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은 절망이었다.
왜? 이스라엘과 세계를 구할 「메시아」가, 모든이의 희망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의인(義人)이라는 것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자들까지 부인할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빌라도는 그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발견치 못하였다. 바리서이와 두민(頭民)들의 질투와 미움이 이 의인의 죽음을 강요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법(法) 시행의 공정을 자랑삼던 「로마」 제국의 이 고판도 자기의 정치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의식하면서 불의(不義)와 타협 하였다. 그리하여 여기에서도 인간사회에서 흔히 경험하는 비극은 되풀이되었다.
정의와 진리, 선의(善意)와 사랑이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오히려 불의(不義)와 허위가, 간계(好計)와 증오가 다시금 승리를 거두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정녕 죄없이 죽었고 동시에 진실된 삶의 보람이 함께 매장되었다.
과연 육중한 반석으로 굳게 닫혀진 그 무덤, 그 암흑의 심연(深淵)에서 어떤 빛이, 생명이 소생하리라고는 기대도 상상도 할수없는 일이었다.
여전히 세상은 부조리(不條理)와 불가지(不可知)가 지배하는 곳이요, 죽음이 일체를 삼키는 최후의 승리자로 남을 것 같이만 보였다.
「엠마우스」로 가던 예수님의 두 제자들이 토로(吐露)한 그 실망에서 루까 24장 21절 참조) 우리는 이같은 허무감이 단적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잘 볼수 있다.
제자들은 물론 인자(人子)가 두민(頭民)들의 손에 잡혀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리라』 한 수차에 걸친 그 스승의 예언을(말구 10장 34절, 마테오 20장 19절, 루까 18장 33절) 전혀 잊고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부활을 확신하기에는 그들의 신앙은 너무나 약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을 믿기에 얼마나 느린자들이었는지는 그후의 복음의 이야기들이 잘 말해 주고 있다. 그 중에도 대표적인 것은 도마의 이야기다(요왕 20장 24-29절).
실증(實證)이 없이는 믿지 않겠다는 태도는 주리주의적(主理主義的) 현대 지성만의 특성이 아니다. 이미 도마가 그러하였고 그는 자기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그 상처를 만져보지 않고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수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인간의 지혜가 무엇이냐? 땅에 떨어져 썩은 한알의 밀씨에서 어떻게 백배의 결실이 낳게되는지도 모르는 인간의 지혜가 무엇이냐? 왜 사람이 살고, 왜사람이 죽는지도 모르는 인간의 궁지(窮知)가 무엇이냐?
삶을 다스림과 같이 죽음을 다스리는 이는 천주이시다. 인간의 판단으로는 그리스도는 죽었고 또한 영영 죽었다.
그러나 그 죽음을 다스리시는 천주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천주 살아계심을 인간은 몰랐다.
적어도 잊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모든 것을 살리시는 천주의 무한한 사랑의 신비를 몰랐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같이 인간의 궁지(窮知) 조차도 달하지 못하는 그곳에서, 그 모든것을 파멸케하고 허무로 돌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천주성부의 전능이, 인류구원을 위해 당신 성자까지 저바리신 그 무한하신 사랑이, 세상을 위해 자헌(自献)하신 이 성자 예수‧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소생케 하였다.
어두움을 물리치고 빛의 승리자로 다시일어나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을 소멸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얻어주셨다』 (부활절 감사서문경)
이제 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현의(玄義)가 보다 더 가까이 우리의 현실 생활에 대해 가진 의미는 무엇이냐?
그것은 한마디로 인생과 역사에 전폭적인 긍정이다.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힐때와 같이 현세 인간사회는 너무나 자주 선(善)보다도 악이, 정의보다도 불의가, 진리보다도. 허위가 지배하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의 우리나라 사회가 불신사회로 불려지는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같은 사회에 있어서는 현대 실존주의가 주장하듯이 인생(人生)은 부조리(不條理)로 밖에 판단되지 않을수 없다.
대한 항구적인것, 불멸의것은 아무것도 없고 삶 전체가 덧없고 허무하다는 결론밖에 나올수 없다. 부정(否定)의 철학 이것이 현대인의 허무주의적 인생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 그리스도는 부활하였다. 바로 그같이 선의와 진리와 사랑이 부정되고 유린된 자리에서, 오직 허무와 절망만이 지배하는 암흑에서 그는 어두움과 죽음을 쳐 이기고 부활하였다.
인간사회에 득세하고 있는 것은 오늘은 악과 불의일 수 있다. 그러나 내일에 있어 결국의 승리자는 이 모든 것을 소멸하는 사람임을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또한 인간은 한번 죽을 것이다. 죄의 결과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그를 영영 지배하는 것이아니고 불멸의 생명이 소생케할 것임을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보장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현의(玄義)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되고, 우리의 신앙의 바탕이되는 이유는 정녕 여기에 있다.
부활은 실로 인생과 그 역사에 의미를 다시 주었다. 그리스도는 바로 역사의 의미자체이라고 누가 말한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과연 우리의 삶과 우리의 선의, 무엇보다도 진실된 사랑이 부정적으로 끝날수는 없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의미하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날뿐 아니라 가혹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철학자도, 어느 사상가도, 그리스도 아닌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여기 대한 절대적인 해답을 준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만 그의 가르침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여기 대한 완전하고 긍정적인 답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길이요, 진리임을 밝혀 주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같이 모든것 위에 승리하고 죽은 모든 것도 불멸의 생명으로 소생시키는 천주의 무한한 사랑의 산증거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자(者)의 인생관에는 고통과 비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부정(否定)은 있을수 없다. 굶주림과 헐벗음이 그의삶 전체일지라도 그에게 있어 인생은 무의미하지 않다. 병들고 죽게 되었을지라도 그에게 있어 삶의 의미, 그 본질적인 의미는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부활, 죽음을 쳐이긴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이, 그를 위해 얻은 영생이 남아있다.
또한 부활과 영생의 보장은 그에게있어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성바오로의 말씀같이 환난도 곤궁도 핍박도, 주림과 헐벗음도, 어떠한 위험, 어떠한 세력, 현재의 것이든 장래의 것이든 어떤 조물을 막론코 삶과 죽음까지도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뗄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로마書 8장 35-39절 참조). 또한 그 사랑이 불타는곳 어디서나 언제나 생명이었고 죽었던것도 소생시키는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은 이같이 우리의 완전한 희망이다. 누구도 우리에게서 이를 빼앗아갈수 없고 누구도 지울수없는 불멸의 희망이다. 우리는 이같이 큰 희망을 우리만이 가질것이 아니요 날이갈수록 삶의 희망을 잃어가는 것같이 보이는 이나라 사회, 실의(失意)에 젖은 우리 형제들에게 전해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이 부활의 희소식은 받을것만이 아니고 땅극법까지 소리질러 전해야하는 복된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60만 한국 가톨릭신자들은 이나라 사회를 밝히는 빛이되고자 그리스도의 부활을 표상하는 「바스카」 성촉 같이 사랑의 불꽃으로 타오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