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79위 시복되던 역사적인 날 수많은 군중 속에 한국인 겨우 3명뿐
발행일1965-04-18 [제467호, 3면]
1925년 7월 4일 「로마」 「베드루」 대성당에서는 한국에서 치명한 복자 79위에 대한 시복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것은 한국 가톨릭 교회사에서 처음보는 영광스러운 행사였다. 이미 모든 교우들이 알고있는바와 같이 79위복자중에는 불란서인 3명, 그리고는 모두 한국인이다.
우리는 병인년 순교 백주년을 맞이하는 내년에 다시 「로마」에서 26위 복자시복식이 있을 것을 대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교회사에 있어서 두번째 있게되는 시복식이고보니 한국교우들의 가슴 벅차옴은 이루 표현하기 어려운 뜨거움을 느낀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앞두고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40년전에 있었던 79위 복자 시복식 광경을 그려보는것도 결코 헛된 일은 아님을 다짐한다.
그때 79위 복자들의 시복식은 교우들의 영광스러운 그 시복식에 참석해야 할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허지만 불행히도 참석할만한 친척 대표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측을 대표해서 참석한 분은 민(閔) 대주교(불란서인) 안(安) 주교(불란서인) 진(陳) 신부(불란서인) 그리고 한국인은 한(韓기근‧바오로) 신부 뿐이었다.
이때 미국에서 「만하탄」 대학의 졸업을 마치고 귀국하려고 하던 장(張勉)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위임장이 서울교구의 유(兪)주교로부터 날아왔다.
『이번 7월 4일 「로마」에서 있을 시복식에 한국교우와 한국청년회를 대표해서 꼭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정식으로 청년회의 결의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명기하고 있었다.
27세된 장면(張勉) 박사는 어차피 귀국할 예정이었던지라 그대로 수락하기로 결심했다.
아우 역시 「콜럼비아」 대학에서 미술과를 마쳤기 때문에 동행하기로 하였다. 「뉴욕」에서 출항, 이태리 「나포리」 항구에 도착하였다. 항구에서 「로마」로 향하였다.
「로마」에는 벌써 민(閔) 대주교 안(安) 주교 진(陳) 신부 한(韓) 신부가 와 있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장박사 형제는 가족초대권을 가지고 십자모양으로된 「베드루」 대성당안에서 거행되는 시복식 맨앞줄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시복식이 시작되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제대 그리고 그 제대 정면 높은 벽과 그 둘레에 아름답고 찬란한 79위 복자들의 그림이 걸려있었고 이태리의 추기경들 주교들 성직자들 수녀들 고관들 교우들이 세계 각국에서 수천명 몰려와 영광스러운 시복식에 참석하려고 인파 인파를 이룬 가운데 웅장하게 음악이 울려 퍼지고 시복식이 거행되었는데 오후 성체강복때는 복자들의 유해앞에 비오 11세 교황께서 무릎을 꿇고 친구하실때 그 광경의 엄숙함과 신비감은 그자리에 참석하지않고는 도저히 느낄수 없는 것이었다고 장박사는 40년전을 회상한다.
그러한 역사적인 복자 시복식에 한국인은 한신부와 장씨형제 이렇게 단 3명 만이 참석했다는 것은 두고 두고 생각 할수록 아쉬움을 느낀다고 한다.
「베드루」 대성당에서의 미사로 그치지않고 「예수」 성당에서 연3일간을 복자들을 위한 감사 대미사와 성체강복과 폐부를 찌르는 감격의 강론이 있을때 눈물만이 한없이 솟구쳤음을 알게 한다. 포졸들에게 호되게 매를 맞으며 발길로 차이고 또 갖은 천대를 다 받으면서 목을 잘리어 참혹하게 죽었는데 오늘날 이 자리에서야말로 형용 못하리만큼 찬란한 영광을 받는 선조 복자들을 대할때 그리스도 신자의 십자가의 생애가 얼마나 귀한것인가를 뼈아프게 느낄수 있었다는 장면 박사이다.
부디 내년에 있기를 바라는 시복식에는 한국의 친척대표 성직자 그리고 또 각국에 널리 퍼지고 있는 우리 유학생들이 많이 참석해서 더욱 시복식의 영광된 자리를 빛내주기 바라고 있었다. 치명 복자를 선조로 모신 우리 한국을 천주께서 버리지 마시고 사랑해 주실것을 우리 복자들의 이름으로 빌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