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는 현대인에게는 무슨 신화속에 나오는 說話처럼 들린다. 그리고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실이기 때문에 오히려 무심히 지나쳐 버린다.
현대인은 산다는 감각에만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前者를 신화로 취급하고 後者를 무심히 지나치면서 현대인은 갈팡질팡한다.
崔민순 神父가 그 아름다운 필치로 번역한 「단떼의 神曲」 「연옥편 第3曲」에서 단떼에는 현대인의 이 고민상을 미리 보았다. 『마치 양떼가 한 마리 두 마리 혹은 세 마리씩 우리에서 나오고 남은 놈들은 눈과 코끝은 땅에 비비며 어떨떨해 하느라면 먼젓놈이 하는 그대로 다른 놈들도 따라하며 저놈이 멈춰서면 숫된채 멍하니 그 까닭도 모르면서 꽁무니에 모여드는 것처럼…그늘진 것을 앞에 있는 자들이 보고는 주춤서고 슬쩍 뒤로 물러서메 바싹따라오던 이들도 한꺼번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덩달아 그러더라』 『그 까닭을 모르면서』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덩달아』 현대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인생전체를 표현하는 말로서 그 어느 것을 제외하고도 인생을 다 설명 할수는 없다. 삶은 죽이음을 초래하고 죽음은 삶을 낳는것은 삶과 죽음의 변증법이라고 할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지않으려고 泰나라 始皇帝가 不老草를 구하려 사람을 天下에 풀어 놓았다는것은 人生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발버둥치는 마지막 발악이요. 반대로 죽기위하여 산다는 독일의 쇼펜하우어의 철학도 삶의 正道에서 벗어난 자포자기이다.
죽음이라는 사실에 진정 부딪칠때 삶의 뜻은 진지하게 나타난다. 그런고로 죽음의 뜻을 밝히지 않고는 삶의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게된다. 동서양의 인생철학을 종합하여 「사람이 보람있게 사는 길」을 찾아본다면 사람은 각자 받은바 소임을 완수하고 성의를 다하여 양심껏 살아서 서로 도우며 복지사회를 이룩할때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孔孟의 가르침을 능가하는 학설을 찾아볼수가 있다. 「中庸」에 『하늘이 명하는 것을 性이라하고 性을 따르는 것을 道라하며 道를 닦는 것을 敎라한다』고 하였고 天之道는 誠으로서 天下의 室誠은 天性을 다할수있고 人性을 다할수 있으며 物性을 다할수 있는것으로 人力을 다하여 誠을 이룰때 天地의 化育을 돕고 天地에 參할수 있음으로 天地人은 同體로 三才를 이룬다고 했다. 복지사회를 이념으로하여 보다 살기좋은 세상을 이룩하려던 칸트의 윤리철학은 빈틈없는 합리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孔孟보다 더 아름다울수는 없다. 하지만 人生의 가치를 찾음으로써 삶의 뜻을 완전히 파악했다고는 할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 위에서 구가한 인생의 보람을 완전히 실현해본 시대가 실제상으로 없었고 그러한 살기좋은 세상을 이룩해본 곳이 없다. 구약성경의 성영편에서 한탄했듯이 『사람은 죄인인 여인의 모태에서 배였고 죄중에 태어나』 인생을 출발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여 아무리 가져도 불만이요, 알고자하는 갈망은 끝이없어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것이 더 많고 사랑에 대한 열망은 한이 없어 현대에서는 그 갈증을 풀길이 없는 것이다.
이와같은 인생조건에서는 삶의 보람을 이룩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설사 이룩한다하더라도 죽음이라는 엄연한 사실로써 沙上樓閣의 허사로 돌아가 결국 사람은 죽기위하여 산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욕망과 배움과 사랑의 소망이 영원한 것을 찾는다면 삶의 소망은 결국 영원한 곳에 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情火와 오류속에서 인생을 헤매인 성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告白」에서 『주여 내가 당신 품안에 쉴때까지는 내 영혼이 안식을 얻을길이 없나이다』고 하였다.
永遠을 바라다보는 삶의 소망은 죽음을 초극하면서 이루어진다.
과학세계에서 인공적으로 별을 만들어 띄우고 인간이 우주를 달리는것도 인간이 시간과 공간의 감옥에서 벗어나 영원을 향하려는 인간소망의 발로이라고 본다. 그러면 죽음이란 것은 그야말로 죽고마는 죽음일까? 모든것의 끝장을 내는 마지막일까? 우리들의 生活감정에서는 예로부터 사람이 죽으면 『黃泉길을 간다』고 한다.
黃泉은 「白虎通하」에 의하면 『陽氣動於黃泉之下動養萬物也』라하여 그곳에서 生氣가 움트고 萬物의 生命을 기르는 곳으로 되어있다. 과연 「샘」은 어두운 땅속에서 밝은 세상을 향하여 용솟음치는 것으로 추위에 위축되었던 生命이 春氣를 맞아 약동하는 「심볼」이다. 「샘」의 터는 물론 땅속에 있는것이요. 동양사상으로는 黃色은 땅을 표시한다.
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生命의 모체로 되어 모든 生命이 여기서 배태된다.
철학적으로 보더라도 「죽음」이라는 사실과 「없어져 버린다」는 가상과는 본질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인간은 육체의 重力에 눌려있는 自然事物中의 하나이다.
모든 사물이 그렇듯이 事物-人間」도 物質的인 복합구성 체이다. 죽음은 바로 이 복합체의 분열하는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인간운명의 귀착점은 죽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生存의 실존에서 보면 인간의 죽음은 파일의 奈落을 눈앞에 놓고 전유하는 것이며 자기존재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멸망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의 뜻은 앞서 말한 생리학적 분해작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심 자체가 정신적인 것이다. 만일 죽음으로써 모든것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죽음의 뜻을 찾는다는 그 자체가 모순된 일이다. 출생하는 순간부터 죽는날까지의 시간은 영원과 대조될때 인생이라는 뜻을 가진다. 니이체는 오늘이나 내일을 위하여 옳게살려고 하는것이 아니고 백만년을 위하여 옳게살겠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백만년은 오늘이나 내일보다 그리 대단한 거리가 아니다. 영원히 옳게 살아야 한다. 죽음의 逆說은 그것이 人間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면서 영원한 삶으로 가는 길몫이라는 점이다.
죽음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은 이와같은 종류의 역설로 되어있다. 씨앗이 썩어 죽은후에 싹이 돋는다. 失敗는 오히려 성공의 산모이다. 파괴는 건설의 터전이 된다. 전쟁과 평화는 서로 낳아준다, 등등.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삶과 죽음의 변증법을 사랑의 힘으로 전개시 키는 하나님의 웅대한 역사철학이다. 萬生을 낳아주는 創造力은 세를 낳았고 그리스도를 낳았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인생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데있고 이 사명은 고난과 죽음으로써 완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죽음을 극복하신 것이다. 사랑의 특징은 삶을 주는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랑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부활」은 바로 이 영원한 생명에 다시 산다는 뜻이요, 인간의 부족욕구 중에서 가장 절실한 욕구가 영원히 살고자하는 욕구라면 부활의 교리는 핵심을 이루는 교리라고 할수 있다.
白敏寬(가톨릭대학 신학부교수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