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부활주일에 영남의 첫교난 百50주년에 해당되는 기념일이다. 이 뜻깊은 날을 맞이하여 간단하나마 그 교난의 경위를 적어보기로 한다.
■ 天主教 宣布의 經緯
영남은 이조(本朝)에 이르러 일찌기 유학(儒學)이 성하고, 퇴계(退溪) 선생의 생장지로서 추지향(鄒魯之鄕=孔孟子出生地)이라 자처하였을뿐 아니라, 또한 신라의 불교문화가 전성하였던 곳이어서 유‧불도의 유수한 학자들과 고승(高僧)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던 지대였다. 그래서 신종교 운동이 좀처럼 어려웠던 반면에, 1785년경에 서울과 경기도의 남인시파(南人時派)에 속한 거유(巨儒)들에 의하여 천주교가 수입되고 또한 그들의 활약으로 경기, 충청, 전라 지방의 중인계급들이 많이 거기에 호응하게 되고, 일반서민층에까지 널리 침투될때, 영남선비들은 당시 중앙 정계(政界)에 손을 떼고, 일체 정당(政黨) 관계를 끊었던 이유로 신종교 운동과는 자연 연락이나 간섭이 없어서 유독 영남(강원도도)만이 천주교를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남인지파의 거물들이 천주교운동을 활발히 전개함에 있어 그 반대인 벽파(僻派) 측에서 1801년(辛酉)에서 파에 대한 보복단으로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는 구실을 자아내어 대교난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교난에 주야고버(周文謨) 신부를 비롯하여 수백명의 신자들이 참살을 당하게 되매 경기, 충청지방의 교우들이 난을 피하려 영남과 강원도 깊은 산골로 숨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태백산, 소백산을 배경한 청송(靑松), 영양(英陽), 진보(眞寶) 등지의 두메산골에 피란한 교우들이 차차 교난이 완화되므로 화전(火田)을 이루어 생활을 영위하고, 집칸을 세워 여기 저기 교우 촌락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 영남의 천주교 발전의 경로인 것이다.
■ 敎難의 動機
1801년 대교난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계속되는 홍수와 한재로써 국민의 생활이 곤난하던차에 1814년(甲戍) 7‧8월의 장마로 농작물이 거의 전멸되고 경상도에서만 수천호의 가옥이 침몰, 유실, 도궤되어 수만명의 이재민이 생기게 된 큰 살년(殺年)이 닥쳐왔다. 그리하여 인심이 극도로 흉흉하였지만 무지무모한 위정자(爲政者)들은 별 구호책이 없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두메산골에 피란살이하는 우리교우들은 홍수와 흉작의 피해를 별로 입지 않고, 화전을 쪼아심은 잡곡이나마 식량에 큰 곤란이 없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박애정진을 실천하여 서로서로 도우고 돌보아줌으로써 이 난관을 돌파하게 되었다. 이때 배신자 전치수(全致壽?)라는 자가 이러한 교우 촌락을 두루 다니며 구걸하는 것을 업을 삼고 지냈다. 교우들은 그소위를 가리지않고 언제나 친절히 그의 청을 들어주었지만 교우들 중에 가난한 이들은 이 유다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그는 무서운 앙심을 품고 청송 영양 관헌에게 천주교신자들의 비밀 세계를 밀고하게 되었다.
본시 민간의 고혈을 착취하는데 일수이던 그들, 흉년을 만나 곤란하던 차에 이 밀고는 천재일우의 호기라고 생각하고 전치수의 지시에 따라 교우 촌락들을 급습하기로 했다.
■ 敎難의 모습
먼저 포졸들은 청송군 모래산에 있는 교촌(敎村)을 습격하였는데 때는 마침 그해 부활축일(양 4월 1일=음 2월 12일) 이어서 인근 교우들까지 공소에 모여, 첨례경을 외우고 즐거이 「알렐루야」를 부르던 때이었다. 이것은 언제 전치수가 어디서 교우들이 많이 모이는것을 잘 알므로 그 날을 택하였던 것이다.
너무나 의외의 급습을 당한 교우들은 긍긍 전전하는데 고요셉(高聖云)이란 사람이 평소에 기운이세고 매우 건장한 몸이었는데 포졸들을 강도로 알고 대항하려 하였다. 포장이 관헌의 채포령장을 내어보이므로 맹호 같이 달려들던 고요셉이 즉시 순한 양과 같이 두 손을 내어밀어 포승을 받았다. 그리하여 거기에 모였던 남녀교우 전원이 일망타진되어 경주부로 압송되었다.
그 며칠 후는 전치수가 포졸들을 데리고 진보(眞寶) 「머루산」 부락을 습격하여 또 많은 교우를 잡아 안동(安東)으로 압송하였다. 이 소문이 두메산골 원근 교촌에 들리매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피난하는 교우들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맹수와 싸와가며 생사기로(生死岐路)에 헤매기 시작하였다. 낮에는 굴 속에나 숲 속에 숨었다가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음식을 장만하여 피난처로 옮겨가면서 그날 그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산중을 벗어나서 안전지대로 피하려던 교우들은 포졸들과 외교인들에게 붙들려, 보따리를 털리고 젊은 여자들과 처녀들은 능욕을 당하였으며 길가와 들판여기저기 굶주려 쓰러진 송장들이 흩어져 있었고 어버이를 찾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애절했다.
안동과 경주옥은 물론 지방 관청의 옥이란 옥은 초만원을 이루었는데 그때 잡힌 교우의 수가 3백여 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거의 신입교우들로서 신앙이 아주 약하고 처음 당하는 해인지라 혹독한 형벌에 못이겨 배교하는자도 많았고 장하와 굶주림에 죽는이도 부지기수였었다.
그들 중 끝까지 용감하게 그리스도의 신앙을 증거하던 용사들만은 대구 감영(監營)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경상감사 이존수(李存秀)의 장계에 의하면
『신유(辛酉)년에 모조리 잡아 없이한 후로 마땅히 사당(邪黨)의 남은 자손들이 서로 그 사학에 감염됨이 없어야할 것이옵고, 더우기 영남지방은 우리 나라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인지라 일찌기 간사한 무리를 따르는 자가 없었아온데, 어쩐 일인지 추악한 무리들이 넘어와서 청송, 영양, 진보등의 깊은 산골 두메에 몰래 들어가서, 서로 사학을 익히고 배웠으므로, 온 마을이 속아 넘어갔나이다. 청송땅의 죄인 최봉한(崔奉漢)은 정약종(丁若鐘)을 따랐고, 주문모에게 배운 자인데, 사장(邪장=교회물품)을 모와가지고, 남모르게 영(嶺)을 넘어서 깊은 산골에 굴러 들어와 유민(流民=피란교우)을 끌어 모아서 스스로 교주(敎主=會長)가 되었압기에 대구 감영으로 잡아온 후 곧 죽였나이다.
죄인 안치룡(安致龍), 김약고배(若古排), 고성대(高聖人), 고성운(聖云), 서석봉(徐碩奉), 이선복(善福), 김진성(振聲), 김악지(岳只), 신광채(申光采), 손두동(孫斗同), 여인(女人) 성렬(性悅), 윤덕(允德)과 영양땅의적인 김종한(宗漢=金大建 神父의 從祖父), 이희영(希英), 김희성(稀成), 김복수(福壽), 김광복(光福)과, 진보땅의 죄인 김시우(時佑), 최윤금(崔允金), 김광석(光億), 김흥금(興金), 김험동(驗同), 김광억의 처 분금(分金), 그 아들 종건(鍾乾), 김흥금의 아들 장복(長福), 그 딸 작단(作丹), 김헌동의 아들 갑득(甲得), 임시임(任時任), 정인(丁仁) 등이 서로 전하고 익히어 빠져서 유혹되지 않음이 없나이다. 이들을 모두 정부에서 그 죄를 논하고 처형 방법을 정하도록 하옵기를 청원하나이다.』고 하였다.
이장계에 실린 29명이 대구감영에 넘어와서 한결같이 신앙을 증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아 중앙의 재가를 받으려 기다리는 동안이 1년 반이 걸렸던 것이다.
1816년 10월 그믐에 가서야 정부의 재가가 내려, 대구(시내) 아미산 아랫턱 관덕정(觀德亭=現赤十字病院 附近) 사형장에서 참수된 이가 일곱 분이요. 그 나머지 22명은 모두 굶주림과 혹형의 상처로 옥사하였다.
이들 용사가 대구 옥에 1년 반을 고생 할때 배가 고파 짚신을 삼아 팔기도 하고 옥에서 나가 구결하기도 하였다. 매일 한 두사람씩 옥사하는 참경을 보는 일곱 사람의 용사는 순교하는 날까지 옥살이를 무슨 단락하고 화평한 가족생활과 같이 낮에는 짚신을 삼아 양식을 마련하고 밤이면 등불 앞에 모여 앉아 만과와 매괴를 통경하고 교리 토론하며 성서를 고성으로 낭독하였다.
인근 주민들이 모여와서 그들의 얼굴에 법열(法悅)과, 평정, 화협의 빛이 도는 것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한다. 이 용사들의 성스러운 모범이 무언의 설교가 되어 후일 대구 읍민의 귀화 입교의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1816년 음 11월 1일에 7명의 용사들이 손수레를 타고 사형장으로 나갈 때 옥졸들과 인근주민들이 눈물로 이별하였다하며, 사형장에 이르러 김안드레아(宗漢)가 괴수로 지명되어 열번째 칼날에 참수되고 순서대로 먼저 남교우 네 사람이 참수된 후에 여교우 둘이 남았는데 형장(刑將)이 감언이설로 그들을 꾀워 배교를 유도하였으나 용감하게 물리치고 빨리 목을 쳐 달라고 하여 순교하였다.
그들의 시체는 사형장 근처에 매장된 것을 그 이듬 해 3월 4일에 유족들이 와서 다른곳에 이장하였는데 웬일인지 최발라바의 시체만 없어지고 다른 이의 시체는 조금도 썩지않고 방금 죽은듯하였고 그 의복도 순교할 당시 그대로 성하였다한다.
불행히 지금은 그들의 무덤이 유실되어 알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