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編輯者 註) 여기 소개하는 글의 필자는 미국 「예일」대학 교회사(敎會史) 교수이며 「루터」파(派) 신학자인 쟈로 슬라브 뻴리칸씨이다. 교수는 고(故) 요안 23세 교황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 형제 사이에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운동을 불러일으킨 이래 가장 능동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루터」파 신학자이다. 여기 소개된 글은 미국 가톨릭주간지 「레지스터」에 동 교수가 기고한 「복된 크리스마스」이다.
과거 10여녀난의 교회일치를 위한 접촉과 토론을 통하여 오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리의 판단들이 사랑에 배치되는 것이었고 얼마나 많은 우리의 해석이 오해되었고 얼마나 많은 우리의 상호접촉이 거짓이었는지를 알게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좋고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성탄 때에는 우리는 문제를 보다 더 깊이 보다 더 근본적으로 보게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상호차이라는 것이 얼마나 미미한 것인지에 눈뜨게 된다.
나의 의도는 물론 모든 신학적인 차이를 사소한 것 같이 내던져 버리자는 것도, 교리를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다. 나의 사상과 저서를 아는 이라면 아무도 나를 무차별론자로 오해할 수 없을 것이요 계시진리를 무시하고 재일치를 이루고자 한다고 비난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떠한 재일치든지 그것이 보람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면 진리에 대한 존경과 그 진리가 요청하는 것에 대한 순종을 아울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主權)을 승복하는 정신위에 세워진 것이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구유 앞에 서게될 때 뼈져리게 느끼는 뚜렷한 점이다.
모든 교파의 그리스챤들은 그들 자신의 이념과 주석(註釋)과 신조(信條)를 그리스도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주저없이 주장하며 사실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위해 항쟁하면서 그리스도를 변호하고 있는 것 같이 주장하고 있다. 진리는 영원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언제나 부분적이요 불완전하며 바오로 종도께서 말씀하신대로 상징으로써(IN AENIQMATE)만이다.
이 사실은 시대와 지위와 교파의 차별없이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거의 이 사실을 무시해왔고 그렇게 하기 위해 대부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성탄이 되면 이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뚜렷해진다. 우리가 여러 구유앞에 서서 각각 다른 「크리스마스 캐롤」을 노래하고, 각각 다른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누구나 이같은 저마다의 배열(配列)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이에 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거리는 그리스도의 강생의 기적 앞에는 더 커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그리스도 성탄의 사실로써 모든 거리와 모든 차이점의 가장 큰 것까지도 화합되어 영원과 시간 사이에 다리가 놓여지고 성자(聖者)와 죄인까지도 간격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천주께서는 타락되어가는 피조물주로부터 당신 스스로를 영영 멀리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오히려 반대로 피조물을 만들어내신 그때, 또 피조물이 아직 무구(舞具)하였던 그때 보다도 더 친밀히 당신 스스로를 이 피조물과 일치시키셨다. 천주는 당신 정의의 의노를 고집하시지 않으셨다. 천주는 우리를 응당 죄로 심판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주는 이와는 반대로 우리 모두를 당신과 다시 결합시키기 위해 세기를 통해 계속되어온 미움의 관계를 부수고 인성을 취해 강생해 오셨다.
천주께서는 이 사건을 되풀이 하실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성명을 띠고 있고 그의 재일치의 힘을 받아들이는 우리 모두가 그의 구유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온전히 어느때 보다도 충심으로 그의 지상의 몸인 교회의 생명과 일치안에 바치게 될 때 이 그리스도의 성탄은 참으로 복된 성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재일치의 정신 안에 나는 이 글을 관대히 받아들인 여러분 모두에게 가장 복된 성탄을 기원하는 바이며 여러분 모두가 끊임없이 기구로써 모든 그리스챤들의 재일치라는 이 사업에 이바지 해 줄 것을 간청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