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해산할 땐 남편은 밀려 난 것 같군. 언제나 산모에게만 관심이 쏠리니까. 아낙네의 동정심은 아이 낳는 자랑과 기쁨을 더 잘알기 때문이겠지. 남자도 그 영향을 받거든. 나도 그렇구먼. 아마 이것은 불편쯤은 고사하고 고생까지도 자청할 정도로 보지도 못한 하나의 인격을 사랑할 때 여자에게 나타나는 자정(慈情)때문이겠지.
모성애란 보이지 않는 천주님께 바치는 사랑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최선의 교훈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한걸!.
미지(未知)의 영해도 미견(未見)의 아비도 최초의 관심 대상은 아니다.
나의 경우와 「미리암」의 경우가 그렇다. 그녀의 아이는 나를 닮지 않겠지.
아이 아비를 보아야 할 사람도 없다.
누구든지 그 아이가 나를 닮을 것이라는 생각은 제 멋대로 하는 추측이고.
내가 치하를 받아야 할 것인가?
그 꿈을 꿀 때까지 나는 그녀를 버릴 생각이었지. 아직도 그 꿈을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아이가 나를 닮지 않을 것만은 틀림없어. 그 아이는 온통 그녀를 닮을 거야. 그녀의 눈 그녀의 살결. 그녀의 얼굴. 그녀의 살.
일이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다. 일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천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나와 같은 남편은 하나도 없다. 허지만 천주님이 원하신다면 몇번이든지 나의 행복감은 커질 따름.
우리늰 주막에 묵을 수 있었지. 초산의 산모에게 딴 곳을 구할 수도 있었지. 이 세상에서 남자나 여자나 특히 「베들레헴」에서 이런 청에 귀를 막을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주막에 들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방이 없었다고 대답하겠지만, 사실 우리는 굴속과 같은 남의 눈을 피할 곳을 원했던 것이다. 이제 목동들이 그녀에게 무어라고 말하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 그 애들은 그저 모른 일을 정말 그대로 믿고 한마디도 안하는지도 모른다. 얼마후에 그들은 포대기를 마련할 만큼은 돈도 있고 유렴성도 있을 부모가 왜 저렇게 자기들이 아이를 죽통안에 담을만치 옹색하고 주책이 없을까 저희들끼리 묻겠지.
『당신들의』 아이라니1 난 이제 그 말을 듣는데 이력이 났다. 『내 아들』이라! 흠. 사람들이 알기만 한다면. 이러나 저러나 그들은 안믿을 걸. 그들은 그 탄생에도 무슨 기적적인 것을 보지 않고서야 결코 믿으려 않을걸. 처녀가 애낳는걸 누가 들어나 보았던가? 「미리암」이 올다면 우리 아들은 구세주이시다. 이런 사실을 로마인들이 들었다면 틀림없이 이 아이의 목숨을 노리겠지! 최근에 많은 「구세주」들이 처형되지 않았는가! 내 아들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선 안돼!
우리 가문에 구세주라! 그것은 바로 다위에게 약속하신 뜻이 아닌가. 그러나 오늘날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누가 곧이 듣겠는가.
「구약」때 요셉은 자기의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을 때 그는 팔려서 배에 실려 에집트로 갔었다. 그의 형제들은 그의 꿈을 조롱만 했고. 그런데 몇년후에는 그들이 에집트에 가서 요셉의 앞에 과연 절하지 않았나…. 요셉은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나는 처녀가 아이를 뱄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야. 나는 내 아들이 구세주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일러줄 것도 아니다. 사실이란 어떤 때는 너무도 밝아서 눈이 멀고, 어떤때는 너무도 힘이 세서 병신이 된다. 누가 내말을 들을 것인가?
「나자렏」으로 돌아가자면 틀림없이 한 삼십시간 남짓하면 되겠지. 「미리암」이 여길 언제 떠나게 될는지 물어볼까?
『여보 「미리암」 낙타대가 저기 멀리 보이네. 머지않아 여기를 지나갈거야.』
『그래요 아이참! 그럼 여길 좀 치웁시다요. 繞셉씬
그녀가 왜 그렇게 하기를 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