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달동안 하루 하루 손꼽아 기다리던 「크리스마스」 날이 닥쳤다. 새록 새록 색다른 「카아드」들, 가지가지로 장식된 나무들, 반짝 반짝 하는 금실 은실 등등의 사태 속에 파묻혀 잊어진 것이 있다.
이 중대한 날의 참뜻이.
오늘 아기 예수님이 우리의 눈멀음과 어리석음을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 아마 보통 어린이처럼, 내 첫 생일에 왜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아닐까?
오직 한가지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다만 몇분동안만이라도 그 앞에 나아가서 묵상해야 할 성탄 「크립」(=말구유)이다. 우리 마음을 맨먼저 치는 것은 그 현장의 너무도 황량(荒凉)한 광경이다.
티끌 하나 없고 멸균(滅菌)의 산실이 아니다. 온기라고는 짐승들이 내쉬는 콧김과 굵은 짚더미에서 올 뿐이다. 이 방안의 한 구석에 이 광경의 중심이 되는 모습이 보인다. 조그마한 「갓난 아기」~
얇보드랍고 연한 하늘색의 「린넬」 천에싸여있나? 만일 그렇다면 복음은 「포대기」라는 말을 쓰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 양 옆에는 허술한 옷을 입은 서민, 그러나 자랑스러운 부모가 무릎을 꿇고 있다.
「왕」의 탄생이 이럴수가 있을까? 오직 무식한 목동들과 말못하는 짐승들이 그 분을 반기고 있다. 이것이 이세상이 자기 자체를 만드신 천주님을 맞이하는 꼴인가? 천주님이 당신의 아드님에게 택해주신 저 말못할 궁상에 눈을 겨눌때, 우리는 또 감히 가난을 저주라고 투덜거릴 것인가? 그리스도의 추우신 외양간 앞에서 잠시라도 진매고 난 뒤에도, 우리는 또 돈, 이름, 값진 곳, 화려한 집을 인생 최후의 목적으로 집착할 것인가?
첫 성탄의 아침- 저 고생, 저 추위, 저 외로움- 이 성탄 「크립」의 수수께기란 말인가? 이 현의(玄義)를 풀 수 있는 단 하나의 말이 있다.
「사랑」. 천주님은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미리 내다보셨다. 당신은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로 오실 것이나 당신의 백성들은 당신을 영접하지 아니할 것을 알고 계셨다.
즈 기여운 독성, 무도한 박해, 이 세상이 당신의 아드님을 거스려 범할 무수한 죄악을 그 분은 예언하셨다. 천주님은 당신의 아드님의 탄생을 축하한답시고 오늘밤에도 있을 주정뱅이의 야단과 괴악한 「파티」의 법석을 또한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그분은 결심하신 바가 있으셨다. 『당신의 외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실 만큼 천주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느니라.』
그리스도-미사(크리스마스)의 그리스도게서 온 세상-당신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당신의 「크립」곁으로 모아 주소서. 여기 평화와 고요가 있나이다.
「거룩하신 사랑」의 앞에 미움은 없나이다. 「거룩하신 고요」가 있는 곳에는 근심도 걱정도 없나이다. 「거룩하신 조촐」이 있는 곳에는 죄악이 없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