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을 맞이하여 「빠리」 「노뜨르담」의 두 성탄과 거기서 일어난 「뽈 끌로델」의 두 개종의 사실을 적어보는 것도 흥미가 있을 줄 안다.
1868년 8월 6일은 끌로델의 생일이다. 1886년 성탄날 그는 「빠리」 「노뜨르담」에서 개종했다. 그때의 그의 성격에 변화가 온 것만은 사실이나 그의 가정이 종교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빠리」로 이사온 후에도 신앙문제에 있어 완전히 무뢰한이 되어버렸다. 그는 소년시절에 첫영성체 했으나 많은 불란서의 젊은이들처럼 그것은 그의 종교생활의 절정이요 종시에 이별이었다. 학창생활부터 이미 그는 신앙을 잃어버렸다.
그 당시 예술 과학 문학의 이름을 가진 모든 것이 비종교적이었고 그 세대에 그가 아는 모든 위인들이 교회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18세때 그 시대 소위 문화인들이 믿고 있었던 것을 그도 믿었다. 즉 장한 개인주의 사상 形而下學 사상이 그를 억압했다. 그러나 한편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우울과 염증을 주었다.
그는 부도덕한 생활을 했고 마침내 失意에 떨어졌다. 위암으로 죽은 조부를 보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 랭보의 책을 읽고 그는 진리에 대한 첫 광명을 발견했고 그의 생활에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 유물적인 그의 머리속에 致命傷과 超自然에 대한 生活한 印象이 박혔다.
그러나 그의 상습적인 질식상태와 실망은 여전 남아 있었다. 그때 그는 문학을 하기 시작했다. 가톨릭 전례의 약간의 취미와 몇가지 「데카단」한 問題를 구상하고 이 불행한 청년은 1886년 성탄 예식에 참여하기 위해 「노뜨르담」에 갔다.
평범한 호기심으로 군중에 밀려 들어가서 대례미사에 참여했다. 무엇 더 할 것이 없었으나 오후 만과식과 계속되는 성체강복식에 다시 나왔다. 長白衣를 입은 소년성가대가 「성모」찬 천주가=MAGNIFICAT」를 창하는 중이었다. 그는 제의실 우편 「코라스」 입구 둘째 石柱옆 무리 속에 끼어있었다.
이순간 그의 일생을 지배할 사건이 일어났다. 삽시간에 그의 마음이 감동에 떨렸다. 그는 믿었다. 그후 어떠한 일이라도 이렇듯이 강한 回心, 이렇듯이 확고한 신념, 이렇듯이 크다칸 확실성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이때부터 모든 저서 모든 논법 또 아무리 동요되는 생활에서도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순결한 소년시대를 추억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남녀 교형내여』의 그토록 부드러운 노래가 한층 그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놀랍고도 즈기여운 意識이 交錯하는 감동이었다.
철학적 확신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 반항심이 4년간 계속했다. 신앙을 버린 젊은이들이 그것을 회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몰랐다고 그는 후에 말하고 있다. 「노뜨르담」의 이 기념할 만한 성탄날 비오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간 후 전에 자기 누이로부터 프로테스탄 성경을 받아 읽고 처음으로 자기 마음 속에 사무치는 그토록 감미롭고 그토록 강직한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새 사람을 입고자 했으나 묵은 사람이 아직도 버티고 있어 힘차게 저항했다. 결국 그의 새로운 확신을 서언하기에 방해되는 가장 강한 意識은 이난체면이었다. 그의 편견을 부인하면서 영혼의 覺醒과 동시에 詩를 쓰는 것이 당시의 그의 生活이었다.
성사에 대해 아직 아는 것이 없으나 그는 이미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많은 도움을 준 책은 빠스깔의 「빵세」, 보수에 단테나 아리스또델의 책들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그의 눈을 열어준 책은 교회였다.
그는 매주일 「노뜨르담」에 나갔고 가능하면 매일이라도 나갔다.
그러나 영성체 하러 나가는 신자들의 행복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그는 사순절 매 금요일마다 예수의 자관을 親口하러 나가는 군중에 끼어 간신히 제대앞으로 나가는 것 뿐이었다.
눈물로 천주께 호소한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으나 그는 아직 영성체 하기위해 입을 열 수 없었다.
제3년째 그는 보드레르의 遺稿를 읽고 晩年에 쓴 한가지 詩가 신앙을 발견한 것을 끌로델은 보았다. 그것은 자기와 꼭 같은 고민 꼭 같은 가책 속에서 쓰여진 것이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어떤날 성 「메달」성당 고해실에 들어갔다. 한 늙은 신부로부터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고해실을 나왔다.
그 다음 해는 그는 결정적인 힘을 내고 다시 고해실에 들어갔다.
같은 성 「메달」성당에서 인자하고 형제같은 젊은 신부가 그를 맞아 들였고, 그후 거룩한 비용 신부가 그의 지도신부, 영신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끌로델은 마침내 1890년 같은 성탄날 같은 「노뜨르담」에서 일생에 두번째인 영성체를 했다.
斯德聖(本社 論說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