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파 겉 핥기錄(록) (12) 베니스의 탄식
길은 대소의 운하 · 집은 바다 위에 섰고
즐비한 궁전 그리자 물위에 펄럭이며
다리 하나에도 대 예술가의 기교가…
발행일1966-01-01 [제501호, 3면]
바다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크게 발전한 섬도시이다.
아니, 섬이란 인상보다 바다 위에 집을 세워놓은 도시같은 인상이다.
나는 정말 「베니스」에 도착하면 「곤드라」라는 배를 타지 않고는 왕래조차 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시내에서 떨어진 섬 「귀데카」를 빼놓고는 온 거리를 다 걸어 다닐 수 있다.
성 「마르코」성당 광장에서 빠져나와 거리로 들어섰다.
지도를 펼쳐가며 「베니스」의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서울의 종로통(鍾路通) 같은 큰 길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대운하(大運河=카나라쪼)로서 이 대운하와 시가의 외곽에 둘러싸인 바다를 조그마한 운하들로써 연결시켜 놓고 있다.
이 대운하의 양녘에는 약2백에 가까운 「고딕」풍(風) 또는 「르네쌍스」 풍의 대리석 궁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잔잔한 물위에 그림자를 펄럭거려주고 있다.
「과연 예술의 나라로군」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는 다리를 하나 만다는데도 백대리석이 사용되어ㅇ었고 유명한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중에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리알토다리」는 1592년에 아 다 폰테란 작가에 의해 백대리석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 일행은 얼빠진 사람처럼 이 예술품을 감상하면서 있었다.
그때 문득 일행중의 한사람인 전 수도여고 교장이시던 방순경 선생님이 『아니 이걸 어쩌나』 하시며 탄식을 하는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감격 잘하시는 선생님이라 혹시 현란한 다리며 궁전이며 「곤드라」모습에 감탄하신 줄 알았다.
그런데 안색이 좀 다르다.
『아 글쎄 내 보따리가 어딜갔지』
『아니 아까도 들고 다니시더니…』
『글쎄 말야 「마르코」성당에서 「모자이트」그림을 황홀하게 볼 때도 들고 있었는데…』
『방선생님! 바로 그 성당 앞에서 기념촬영할 때 손짐을 잠깐 놨었기 않았어요』
「베니스」의 상인이 억척스럽게 붐비는 곳에서 짐을 잃었으니 찾기는 무척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모처럼 여기까지 왓다가 그래도 검소한 선물들을 사갖고 손에 들고 다니시던 짐을 잃었으니 나도 우울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관광의 발걸음에서 막연하나마 분실품 수색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오던 길을 되돌아 가려니 또 다리를 건너야 했다. 「한숨이 다리」.
그런데 다리에는 전설과 일화가 숨은 이름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이 다리는 평생 밝은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감옥살이 신세의 사람이 감옥으로 향하는 다리구실을 했던 역사가 담겨진 「한숨의 다리」였다.
이 다리를 건넜기에 방교장의 탄식을 불러일으켰나-하고 미신(迷信)해 보면서 「마르코」성당으로 향했다.
여전히 「싼 마르코 광장」 야외다방에서는 「밴드」소리가 요란했고 행상군들은 지갑이며 「레스」며 유리공예품을 사라고 졸라댄다.
한눈 파고 있는 동안 나는 방교장 선생을 놓쳐버렸다.
방교장은 짐을 잃고 나는 동행인 방교장을 잃었다. 나는 짐도 짐이려니와 방교장을 먼저 찾아야만 했다.
「마르코」성당쪽읗 야해 가느라니 저기서 방교장이 짐을 찾아들고 빠른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오는 것이었다.
『찾으셨군요』
희색이 만면한 방교장이었다.
『참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군요』
길가가 되는 성당 앞 계단에 그냥 둬 둔채로 있더라는 것이었다.
「비쟌틴」 건축의 장려한 대 건축물인 「마르코」대성당을 보면서 감격하던 때 이상으로 「베니스」 인심에 감격하고 있었다.
『한국처럼 도둑이 득실거리지는 않지만 간혹 도둑맞기는 쉬운 이태리이긴 하나 남의 분실물을 가로챌 만큼 일반시민의 인심이 험악하지는 않다.』는 이태리 유학생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