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톨릭을 이렇게 본다
발행일1965-04-25 [제468호, 4면]
■ 韓國近代化에 貢献 / 朴鍾和(作家)
가톨릭은 한국을 근대(近代)로 이끌어 왔고 근대의 학문을 알게한 한국의 은혜로운 사상을 끼쳐준 거룩한 종교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실학(實學)의 씨를 처음 뿌려서 순교한 이승훈(李承薰 1756~1801 獄死) 선생은 그의 부친 이동욱(李東郁 1739)이 청국 북경(北京)에 사신(使臣)으로 가는것을 기회로하여 북경으로 따라가서 남당(南堂)에 들렀다.
이때 소년 이승훈의 눈에는 모든것이 경이(驚異) 아닌것이 없었다.
이조개국(李朝開國) 이래 4백여년동안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만 가지고 막연하게 학문을 하던 것을 계승한 자기의 전문과 학식에 견주어볼때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우주(宇宙)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 아니라 땅은 지구(地球)라는 둥근것으로 되어 하루에 한번씩 자전(自轉)을 한다는 학문을 배웠고 모든 새로운 과학의 발견은 곧 그로하여금 이 학문을 소개해준 가톨릭에 입교하여 영세(領洗)를 받게했다.
향학열(向學熱)이 치열한 그는 고국으로 돌아올때 새로운 학설로 논술한 참신(斬新)한 서적을 행리에 많이싸서 돌아왔던 것이다.
고국에 있는 그의 동지인 이가환(李家煥) 이학규(李學규) 권철신(權哲身) 권일신(權日身)과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1760~1801 獄死)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새로운 학설과 새로운 종교에 심취하면서 실학(實學)의 큰 공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 1801년에 사색당파(四色黨派)의 정쟁(政爭)인 신유사학(辛酉邪學)으로 물리게되어 대부분의 사람이 옥사를 당했고 다산 정약용(茶山丁 若鏞) 선생만은 18년 동안 강진(康津)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그의 실학을 완성해서 오늘 우리학계에서는 실학의 척양산맥(脊梁山脈)으로 받들게 되었다. 나는 이점으로 보아도 가톨릭은 우리민족이 잊을수 없는 좋은 종교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순교정신으로 하여 교우간의는 의리는 형제보다도 더하다. 이것은 내가 가톨릭을 보는 장점이다. 아직 단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 外面 收拾式 信仰 - 聖職者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 鄭晚教(每日新聞主筆)
나는 때때로 이런 생각에 잠겨 본다! 『당신은 진정 당신의 신심(信心)에 거짓이 없다고 다짐할 수 있는가』 어떤 신자를 머리속에 그려보면서 이렇게 나는 물어보는 것이다.
그야말로 신이 아닌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부터가 부도덕한 작심(作心) 일지 모른다. 어떠한 힐문(詰問)으로 들려질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어서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본다.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신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미 그 사람은 천당이나 극락에 안주(安住)하고 있는거나 다를게 없으리라고… 반면 믿기는 하면서 내심 회의하는 사람의 심경을 그려 본다.
『얼마나 불안하겠느냐』 …이렇게 나는 동정하면서 경멸하기도 한다. 사람(肉體)은 과오(죄)를 범할수있으되 신심에는 거짓이 없어야한다.
외면 수습의 신자들이 눈에 걸리는 경우가 없지않기에 이 말을 던져둔다.
나는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 남의 신심을 건드려보거나 신앙의 길을 말할 처지에 있지않을 뿐더러 아무 자격도 없다. 신앙세계의 밖에서 신앙정신을 말하는것은 지극히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언행일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종교에 대한 비판태도는 비인격적이라고 말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앞에서 말했지만 나혼자 마음으로는 때때로 교리보다도 교리에의 신심을 의심해보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믿음은 자기완성의 길』 이렇게 전제해 놓고, 진실로 믿는 사람의 행복감을 흠모하는 반면에 믿으면서 믿음에 성실하지 아니한 사람의 심상(心象)을 위선으로 쳐서 경멸한다. 이런 심정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내 나름으로 그려 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이생에서의 「생애」는 말 거동 일상의 일체가 그대로 예술이 아니었던가? 『아니었던가』는 『그러했다』는 말보다 더강한 나의 표현술이다.
『예술은 신앙이다』 이렇게 나는 부연하기를 서슴치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이생의 생애속에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는 그러한 지혜로 신심을 다듬는 것이 신앙의 본인이 아닌가. 나는 이렇게 「휴메니티」에 입각해서 신앙세계를 넘어다보려는 버릇을 지켜왔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인간에의 총화(總和)요 완성이었거늘 모름지기 성직자는 양을 모는 목동의 얼굴로 신자나 신자아닌 사람과 인간으로서의 체취(體臭)를 같이해야함을 군소리로 덧붙여 두고자한다. 매우 외람된 실언이기는 하나 교회안에는 권위의식이 없는지 그로 인한 인간관계의 단층이 혹은 없는지 문외한(門外漢)의 편견을 용납해주었으면 한다.
■ 初期 殉教史에 感動 / 張德祚(女流作家)
최근에 내가 집필한 역사소설에 가톨릭(天主敎—西學)이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왔을때의 이야기가 있어 거기 대한 책들을 많이 읽었다.
마테오릿치(利瑪賢), 아담샬(湯若望) 사바티누스(能三拔) 에마뉴엘(陽瑪諾) 아레니(茶儒略) 등 청나라에 와 있던 서양인 선교사들의 행적과 그 학문에 대해서도 상고했다.
그리고 조선에서 처음으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배운 이승훈(李承薰)과 조선으로 처음나온 청국신부 주문모(周文謨) 등을 주인공으로 그당시 일을 소설로 엮었다.
그러나 나는 천주교를 모르기 때문에 소설속에서 묘사해야 할 의식같은데 여러 가지로 난처함을 느껴서 천주교를 믿는 이들에게 문의하여 간신히 작품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가톨릭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나는 신앙으로 천주교를 알려고 했다기보다 소설을 쓰기 위하여 잠시 천주교에 대한 공부를 했을뿐이나 천주교도들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끝내 배교(背敎)하지 않은 사실이며 더군다나 사탁(司鐸)의 자리에있는 이들이 용감히 순교(殉敎)한데 대해서는 깊은 감명을 받아 거룩한 눈물로 가슴속이 뿌듯해지는듯 했다.
그리고 누구나 이렇듯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살아갈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감동을 받은 것은 가톨릭의 의식(儀式) 들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가톨릭은 의식이 많아서 신교(新敎) 보다 퍽 번거로와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어쩌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문에 천주교당에 가는 일이 있는데 그 아름답고 장엄한 종교적제의(宗敎的祭儀)는 깊이 잡아 흔들어 주는 것이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천주교의 신자가 될 마음은 없다.
마음의 준비에도 부족하거니와 여러가지 의문도 있는 것이다.
혹 기회가 있어 천상의 복음을 전해 듣거나 종교적 의식의 엄숙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흔들릴때 마다 내 가슴속에 싹트는 것은 대공(大空)을 향한 혼돈(楎沌)된 신(神)에의 모색(摸索)과 가톨릭을 영원한 진리로 인식하려는 진지한 노력뿐이다.
■ 아쉬운 「庶民性」 / 李海浪(演藝人)
벌써 한 십년이 넘나 보다.
연극연출가 허남실씨가 중풍병으로 오래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시었다는 기별을 받고 달려가 보니 자하문 밖에 판자집을 짓고 사는 살림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유가족으로 미망인과 어린딸이 불기없는 냉방에서 오돌오돌 떨고있을뿐 하도 외딴곳이라 조객의 발길도 끊어져있었다.
불행한 선배의 영전에 묵묵히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있으려니 불쌍하게 돌아간 선배에 대한 슬픔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누룰길이 없다. 연극인의 최후가 이토록 비참한것이 남의 일같지만 않기 때문에 나의 슬픔은 컸다.
상가집에 조객이 없는 것처럼 처량한 일은 없다. 그것도 초라한 집의 초상에 조객이 없을때는 더하다.
이런 경우에 친지와 동료들의 방문을 기다리는 심정은 비할때없이 간절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때 뜻밖에 몰려온 조객들이 있었다.
그동리 장로교회 교인들이었다.
살을 저밀듯이 포효하는 설한풍이 몰아치는 산비탈길을 걸어온 그들은 얼른 몸은 녹일겨를도 없이 곧 손에 든 성경책을 펴고 그들의 일을 시작하였다.
뚫어진 문풍지 새로 스며드는 냉기로 불기없는 방안은 밖과 다름없이 을씨년 스럽기만한데 그들은 이 처량한 환경에는 조금도 개의치않고 정성을 다하여 오직 고인의 명복만을 빌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편 쌀이랑 나무를 장만하여 가지고와서는 유가족들을 돌보아 주었으며 삼일동안 번갈아 와서는 자기 일이나 진배없이 이 초상집의 일을 돌보아 주었다.
그들은 장지까지 따라와서 끝까지 상사를 돌보아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허남실씨는 그 교회의 세례교인도 아니요 병석에 눕기전에 한두번 교회에 나간적이 있는 말하자면 독실한 신자가 아닌 것이다.
그런 신자에게 이렇게 따뜻한 정을 쏟으며 정성을 기울이는 그들의 행동이 나는 한없이 고맙기만 하였으며 또 그러한 기독교에는 아무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친근한 마음을 느꼈다.
거기에 비하면 가톨릭교는 전통이 깊고 그 형식이 엄한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딘가 서민들이 손쉽게 접근할수 있는 그 무엇이 아쉬운 것 같다.
■ 傳敎않는 敎會…入敬後는嚴親슬하식敎育… / 崔錫采(朝鮮日報論說委員)
나는 정직하게 말해서 「가톨릭」과는 전연 인연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가톨릭」에서 경영하는 「대구매일신문」에서 6년간이나 봉직해왔고, 지금 가족중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일반사회」에서 「가톨릭」을 보는것 같은 객관성을 지녔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서다.
내가 지금 적을 두고있는 「조선일보」에서는 동료들이 농담으로 나를 부르기를 「최신부」라고도 한다. 아마 그만큼 품행이 단정한 탓이라고 우쭐하기도 해보았지만 실인즉 내가 「조선일보」에 오기전에 「가톨릭」 계통 신문에 있었다는데 유래한 「닉크·네임」임이 분명한 것이리라.
한데, 이렇게 「가톨릭」과 인연이 가까운 내가 그러면 왜 「가톨릭」에 입교하지 않고 있느냐하면 나로서는 별로 이렇다 할 이유가 없다. 구태여 찾는다면 그렇게 오래 신부를 사장으로 모시는 신문사에 있으면서도 아직 한번도 「가톨릭」 입교를 권고받은적이 없는 탓일지도 모르고, 아마 나는 「가톨릭」신문에 있으면서 「가톨릭」에 입교하면 그자리를 보존하고 싶어하는 불순한 속셈같이 남의 오해를 받을까봐 「가톨릭」에 매력은 느끼면서도 그런기회가 없었다는 단순한 심리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가톨릭」 신문에 있으면서 늘 느낀 것은 「가톨릭」이 교우와 교우 아닌 사람과의 차별이 전연 없어서 매우 유쾌했기도 했고 별로 불편을 아니느꼈다고하면 이상한 논법으로 들릴까?
이점은 확실히 「가톨릭」의 너그러움이요, 좋은 특징이라 지금 자신있게 말할수 있다.
기왕 「가톨릭」을 관찰의 대상에 올렸으니 한마디 더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개방적이면서도 한발 교회문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왜그리 엄한가하는 감상이다. 엄한것은 또 좋은데 신부가 「미사」를 올리는 것이나, 결혼식의 주례를 하는 때나 한결같이 신부의 말은 「라띤」어다. 듣건덴 금년부터 일부 우리말을 쓴다고하니 다행이긴 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도시알아듣질 못하니 교리가 좋고 그른 것을 판단할 형편이 아예 못된다.
그저 엄숙하고 근엄한 종교-. 어쩐지 접근하기가 주저되는 교회의 문, 이것이 내가 품고있는 「가톨릭」의 「이미지」라 한다면 「가톨릭」 신자는 어처구니없다고 비웃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