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월 31일 개최된 가톨릭청년회 연합회의 임시총회 본회의에 이어 속개된 간부회의에서는 청년회사업으로서 인쇄소를 경영하는 것이 앞으로 복간(復刊)할 「천주교회보」를 위해서도 절대 필요하고 출판사업은 가장 의의있는 일이라는데 의결이 일치되어 청년회에서 인쇄소를 경영하자고 결정을 했지만 기계와 공장시설 및 운영자금을 청년회로서 출자할 길이 없어 연합청년회의 간부(교화부장)였던 요안 오(吳龍鎭) 교수와 대구교구 당국이 합자(合資)하여 발족한 것이 「대건출판사」였다.
이 인쇄공장은 주교관구내에 있는 전에 남산동교회 강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에다 시설하게 되었는데 8월말에 제1단계의 시설이 완료되어 9월부터 개업하였던 것이다.
요안 최(崔德弘) 주교께서는 「회보」와 「출판사」를 같이 육성하시려는 뜻에서 1년간 「회보」 간행의 인쇄비용을 교구에서 부담하겠으니 나머지 용지(用紙)와 다른 비용은 청년회에서 부담하여 발전시키도록 하라고 하셨다. 이리하여 한회분 발간비용도 없었던 청년회로서는 몇몇간부들이 용지와 잡비용을 번갈아 부담하여 1950년 4월, 속간 1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당시 「인프레」로 나날이 변동되는 용지대금과 물가상승으로 인한 기타의 비용을 마련하는데도 힘겨운데, 3·4개월 후에는 주교께서 지불해주시던 인쇄비의 원조도 기한이 만료되는 터이므로 청년회 간부들의 걱정은 태산같았다. 필자는 간부들을 역방하여 대책을 속히 세워줄 것을 거듭거듭 호소한 끝에 그해 5월 어느날 「대건출판사」의 앞뜰 잔디밭에서 긴급 청년회 간부회의가 열려 이 자리에서 「회보」와 「출판사」를 위해 반가운 결정이 우워졌다. 이 자리에는 당시 주교좌본당 주임이었던 서요안(徐正吉) 대주교님과 당시 교구경리부장이었던 부산교구 요셉(張炳華) 부주교님이 함께 참석하시어 이일 추진에 중개자적 역할을 맡아주셨는데 즉 이회합에서 다음과 같은 건의(建議)를 주교님께 올렸던 것이다.
『지금까지 청년회 간부들이 관리하고 있는 계산동교회의 취주악기(吹奏樂器)를 주교님께 바치겠으니, 주교님께서는 2백만원(圓-현재화폐의 千분의1)을 대건출판사에 「회보」 간행 기금(基金)으로 출자(出資)해 주십시오. 「출판사」는 그 자금으로 공장시설을 확장하고 용지와 물자를 확보하고 운영자금으로 활용함으로써 「회보」 매월1월 3천부 불행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자급자족하겠읍니다.』하는 것이었다.
최주교님께서는 이 건의를 받아들이시면서 『현재 교구의 재정사정이 한꺼번에 2백만원을 줄 수 없으니 3개월에 걸쳐 세차례로 나누어주겠다.』고 하셨으므로 청년회 측은 『그러시다면 마지막 자금을 다 주실 때가지 「회보」 인쇄비를 주교님께서 계속 맡아 주십시오』하는 조건을 주교께서 쾌히 승락하시었으므로 재정적 첫시련기는 넘기는가 하였던 것이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괴뢰군의 남침으로 모든 정세가 급변하여 또다시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다.
1950년 6월 27일, 주교님이 약속하신 자금이 예정보다 늦게되어 2백만원중의 일부인 첫번째로 주시는 50만원 현찰을 교구 경리신부님으로부터 받아 즉시 출판사에 전하였던 바 출판사에서는 급변한 시국과 정세에 어떻게 할바를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6월 28일부터 계산동교회에는 서울지구의 교우피난민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 나날이 늘어 청년회 사무실 겸 「회보」 사무실 옆에 있는 「해성학원」 교사는 어느새 피난민 수용소로 변했고 교회강당과 「해성국민학교」 교사는 포로수용소로 증발되고 주교관 구내인 대건중고등학교 교사는 육군포병부대에, 대건출판사는 공군인쇄소로, 효성국민학교 교사는 공군본부로 모두 증발당하였으며 피난민을 수용했던 해성학원 건물마저 군에 증발되어 피난민의 일부를 교회사무실에 수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계엄령(戒嚴令)하라 「회보」 간행을 위해서는 또 새로운 대구시에도 소개령이 내렸던 판국이므로 5월 25일(제83호) 발행 후 6 · 7 · 8 · 9의 4개월은 휴간(休刊(할 수 밖에 없었다.
10월에 이르러 속간(續刊) 허가수속을 하여 11월 10일(제84호를 전시하에서 까다로운 군의 검열(檢閱)을 받아 속간 첫호를 간행했으나 이에 앞서 사무실 없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니 군인들이 청년회 사무실과 집기마져 빌려써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1953년 4월 당시 제27육군병원(옛날 성유스디노신학교=現大建校 서무과 윗층)의 방들을 얻어 사무실을 차릴때까지 만2년6개월동안 편집원고 보따리를 들고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니며 떠돌이 편집을 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1951년 4월 최주교님께서는 청년회에서 「회보」 경영을 대구교구 당국으로 이양하였지만 얼마동안 발행한 연합청년회 명의(名儀)로 하고 발행인만 연합청년회 회장 「최정복」(崔正福) 명의이던 것을 현합처년회 부총재라는 자격으로 「최민순」 신부의 명의로 바꾸었다.
1951년 5월 교구 당국에서 「회보」 경영을 인수함과 동시 「천주교회보사」를 구성하여 사장에 요왕 최(崔玟順) 신부 주필에 아길노 이효상(李孝祥) 편집국장에 비오 윤광선(尹光宣) 인쇄국장에 대건출판사 대표 오창수(吳昌洙)로 진용을 짜고 매월 1착 발행하던 것을 매월 2회 발행으로 증간허가신청을 하여 5월 12일자로 허가되었다.
한편 주교님께서는 전에 2백만원 주시기로 약속했다가 50만원만 주시고 나머지 1백50만원을 6·25전란으로 못주신대 대한 물가병동에 따른 비율만큼 금액을 올려 7백만원을 「회보」 간행기금으로 출판사에 출자하여 매월 2회 3천부씩 발간하는 인쇄비와 용지대금으로 자급자족하도록 마련해 주셧으므로 이후 약3년간은 다른애로가 없은 것은 아니지만 간행을 계속하는데 큰 난관은 없었다.
1954년 12월 14일 최 요안 주교님의 서거(逝去)에 이어 「대건출판사」의 경영도 난관에 봉착하였으니 공군본부와 국방부정훈국(政訓局)에서 간행하는 모든 출판물과 그밖에 「동아출판사」 등에서 간행하는 여러출판물의 인쇄가 모두 「대건출판사」로 몰렸으므로 시설과 인원을 크게 확장했던 것이 휴전(休戰) 이후 육군본부와 공군본부의 서울이동과 함께 대구로 피난왔던 큰 출판사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갔기 때문에 큰 거래처가 없어져 버렸고 또한 외상거래의 수금이 제대로 되지않아 마침내 1955년 6월에 출판사 문을 닫게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부채로 9월에는 공장시설 전체가 경매 처분을 당하게 되어 가톨릭시보사는 아무죄없이 또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대건출판사」의 파산(破産)으로 「시보」의 인쇄문제는 첫째 기금(基金)이 고스라니 녹아버렸고 둘째 그만한 시설이 일간(日刊)신문사를 제외하고 대구에서는 없었기 때문에 인쇄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경매처분된 출판사는 소유권자(所有權者)가 바꿔졌지만 당분간 옮겨가지 못하고 주교관구내에 두어야 했기 때문에 「시보」 인쇄할때마다 몇일동안씩 그 시설을 빌려 기술자만 임시고용하여 조판(組版)과 인쇄작업을 해왔는데 이렇게 하기를 56년 8월까지 계속했다.
이에 앞서 56년초부터 「가톨릭시보사」는 따로 인쇄국 시설을 마련하기 위한 분지작업이 시작되었었는데 이에 대한 지금은 5년도와 56년 투 해에 걸쳐 CCK(中央協議會)가 「시보」를 위해준 찬조금 1千「달라」(佛)와 서 요안 주교님이 취임하신 후 「시보」를 위해 주신 착수한 것이다.
56년 8월말 대건출판사 시설이 옮겨가고 신설하는 인쇄국 설비는 아직 완공(完工)되지 못한 9월 28일에 발행한 제171호는 「대구일보」 공무국에서 인쇄작업을 했다.
대건출판사가 사용한 옛 남산동교회 강당건물(현재 大建校 자리에 있었음)을 인수하여 개축(改築)하는 한편 공장시설을 새로하여 새로 임명된 안드레아 임(林和吉) 사장신부의 집전으로 예수성심께 시보사 전체를 바치는 봉헌식을 거행함으로써 낙성식을 겸한 새출발을 한 것이 「그리스도왕」 축일 오후였던 것이다.
그후 시보사는 외견(外見)상으로는 훌륭한 사옥(社屋)과 인쇄국을 갖춘 버젓한 언론기관이 되었지만 인쇄국의 수입으로 신문에서 나는 적자(赤字)를 메우고 주간(週刊)으로 증간(增刊)할 수 있게끔 모든 시설을 확장해야 하는 과제(課題)가 남아있기 때문에 피눈물이 나도록 거약과 절약의 살림을 계속해야 했고 종사원들에겐 희생과 복사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괴로운 길을 걸어야 했던 것이다.
59년 6월 20일 당시 오지리에서 병치료중이시던 서 요안 주교께서는 시보사의 난제(難題)를 해결해주시려는 배려로 루돌푸 그라네빗티(서기호) 신부를 사장으로 임명해주셨다.
「시보사」가 지금까지 두 분의 사장신부님을 모셨지만 모두 교회내 다른 큰 직책을 맡고 계신 분들로서 시보사장직은 다만 명의(名儀)에 불과하였는데 이번은 비로소 전임(專任)사장을 모시게된 것이다.
9월 1일 취임한 서 루디 사장신부의 포부는 컸다. 「시보」를 대주간(大週刊)신문으로 발전시킬 것은 물론 인쇄시설에 있어서도 영남지방에서는 제일가는 최신식 시설을 갖추고 대대적인 출판사업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편집진영을 크게 보강확대하고 10월 11일자(제204호)부터 종전의 「다브로이드」판(版)을 신문판으로 지면을 확장하고 60년 1월 3일자(제210호)부터 오랜 숙원이던 주간(週刊)으로 발족하였다.
서 루디 사장의 재임동안 시보사는 획기적 발전을 하였으나 재정적으로는 안정되지 못했다. 젊은이다운 성급한 의욕과잉과 경영(經營) 원칙을 무시한 모험적 처사(處事)들로 재정파탄의 씨가 뿌려졌던 것이니 당초에 기대하였던 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뜻대로 되지 않아 새로운 위기가 닥쳐왔던 것이다.
61년 8월 베드루 장(莊柄補) 신부의 사장임명 발표가 있었고 이어 몇일후 시보사의 인쇄국이 교구찰판부로 독립되어 요안 김(金榮玉) 신부를 출판부장으로 임명하는 교구이 인사이동이 발표되었다.
미국에서 9월 21일 귀국한 장신부는 10월 1일에 사장으로 취임하였는데 장신부의 사장재임기간은 3개월이었지만 교구적인 큰행사(교구설정 50주년)와 아울러 인쇄국을 제외한 가톨릭시보 사옥을 현재의 남일동(南一洞)으로 옮겨 시내 중심지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끝-
(本社 前 主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