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韓佛辭典(한불사전) 등 共著者(공저자) 崔(최) 요안
殉敎直前(순교직전) 奇蹟(기적)으로 나타나
발행일1966-01-16 [제502호, 4면]
우리나라 최초의 사전인 한불사전 · 한어문법책을 저술한 리델(불란서인) 주교를 도와서 사전의 한자 발음, 그리고 활자화함에 있어 직접 서체를 남긴바 있는 선비 최 요안은 70여세에 옥중치사하였다. 백부랑(불란서인) 주교가 당시 한국에서 숨어 다니면서 전교하고 있던 어느날 아침 이미 생활풍속이 한국인과 다름없이된 백 주교는 아침에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버선을 신고 신공을 바치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최 요안이 광채를 발하면서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백 주교는 감옥에 무기형으로 갖혀있는 최 요안이 이 시간에 웬일일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얼떨떨해 있는데 사라졌다가 다시 두번 분명히 나타나더라는 것. 그래서 열심히 기구를 바치기만 했는데 바로 그 시간에 최 요안은 감옥에서 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후에 백 주교의 일기에 기록돼 있었던 것임을 리델 주교의 전기에서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지그도 리델 주교의 전기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면서 유홍렬(柳洪烈) 박사는 틀림없이 최 요안은 성인되기에 충분한 사람이라면서 한국에서 그러한 영적이 나타났던 사실은 크게 자랑삼지 않을 수 없다면서 영적을 보기까지의 최 요안의 평생을 통한 열심과 교회에 바친 공로를 잠시 더듬어보게 해주었다.
최 요안은 생전시 최선일(崔善一) 또는 최지혁(崔智赫)이란 이름을 썼다. 충청도 공주사람이다. 리델 주교의 복사를 하면서 한평생을 전교에 힘썼는데 1866년 병인박해의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간택받은 영혼으로서의 책임을 완수한 셈이다.
그때에는 전교를 하기위해서 옹기, 고려자기, 갓(머리에 쓰는) 등을 가지고 행상인 행세를 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리델 신부의 전교지방은 충청도였다.
최 요안은 항상 리델 신부 옆에서 잘 보살피며 받들었다. 그런데 어떤날 리델 신부는 경상도에 전교차 가 있었는데 서울에서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곧 최 요안에게 연락하여 제천신학교에 있던 권신부(불란서인)를 만나기로 하였다. 리델 신부 권신부 강신부 이렇게 세사람이 밤중에 산중에서 만났다.
물론 최요안이 연락을 맡았었다. 세 신부는 만나서 의논 끝에 2만3천명의 교우가 무참히 죽어가는데 그대로 있을 수가 없으니 살릴 방법을 생각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신부들은 서로 위험을 무릅쓰고 다투어서 남겠다고 했지만 선임자가 남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서 그만 권신부 강신부가 남고 리델 신부는 11명의 교우와 같이 아산에서 나룻배를 타고 황해를 건나 산동반도의 「지프」에 3일만에 도착하였다.
다시 만주 「착코」(分山灣)란 곳에 본부를 두고 한국에서 죽어가는 교우들을 살릴 길을 모색했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그만 「착코」에서 근 10년 가까운 세월 머물게된 리델 신부는 그때 한불사전과 한어문법책을 저술하였다. 최 요안은 리델 신부를 도와서 저술사업에 같이 공헌했다.
1876년 한일통산조약을 맺게되어 「착코」에 있던 최 요안은 먼저 한국에 나와서 성직자들을 맞는 일에 앞장섰다.
1876년 리델 신부는 주교품을 받고 다시 한국에 나와 숨어서 전교하면서도 북경에 꾸준히 편지로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사신이 의주에서 발각되는 바람에 한국안에 서양인 신부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때 불란서에서는 일본을 통하여 절대 선교사들을 죽이지 말라고 강경히 항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델 주교는 잡혔지만 죽이지 않고 국외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추방 당할 때 리델 주교는 개선장군 모양 말을 타고 당당히 호송군관들의 보호를 받았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호송하는 군관들이 말을 타고 리델 주교는 가마를 타고 갔었는데 군관들이 얼마 가다가 말이 불편하니 가마하고 좀 바꿔타면 어떻겠느냐 해서 결국 리델 주교는 말을 타고 갔다고 한다. 주교는 추방 당하고 최 요안은 잡혀서 무기형으로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옥에서 순교하고 말았지만 그의 한평생은 영적이 나타날만큼 성인의 길이었음을 알게한다.
1880년 일본 「요꼬하마」 「에꼬」사에서 한불사전과 1881년 한어문법책이 발간을 보게되었을 때 활자의 서체가 최요안의 글씨였다는 사실.
그때 우리나라에는 아직 활자가 없었다. 1888년 일본 「요꼬하마」에 있던 활자를 한국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같이 최 요안이 한국교회에 남긴 눈에 보이는 문화적인 공헌 이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불타는 신심생활은 후손들에게 길이 길기 빛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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