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가 提示(제시)한 길로… 刷新(쇄신)되는 敎會(교회)들 ⑤
印度(인도)=敎會(교회)-社會關係(사회관계) 劃期的(획기적) 變化(변화)
富者(부자)들만의 敎會(교회)아님을 認識(인식)
貧困(빈곤) 克服(극복) 運動(운동) 先導(선도)·힌두敎(교)에의 理解度(이해도) 높여 好感(호감)사고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들까지 友好的(우호적) 潮流(조류)앞에 屈服(굴복)
발행일1965-05-16 [제471호, 2면]
【NC 特信】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인도(印度)에 있어 교회와 일반 국민생활과의 관계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공의회 이전에도 교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교회를 아는 소수의 비그리스도교인들은 이를 오히려 비판의 눈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오늘은 교회에 대한 호의(好義)가 지배적이며, 그와함께 비난의 소리는 거의 사라졌다.
뿐만아니라 일간신문들은 전에 비할수 없을만큼 교회에 대한 소식을 크게 취급하고있고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이바지하고 있는 교회활동에 대하여 정부는 무조건의 지지를 보낼만큼 달라졌다. 심지어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이 조류앞에 굴복하였으며 교황 바오로 6세의 인도방문이 논의됐을때 공산당 서기장 S·A·당게씨는 이 방문을 환영하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오늘날 공산당기관지들은 교회의 진보적 활동을 찬양하는 편으로 보도하고 있고 반(反) 교회적 보도에도 과거와같이 적대적 표현을 쓰지않고 있다.
이와같은 변화의 중요원인은 가톨릭교회가 부자나 자본주의자들만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데서 이다. 과거에는 그 객관적 타당성은 어떻든 교회는 이 나라를 지배한 식민지주의자들과 동일시돼 있었다. 특히 1947년 인도독립이전에 있어서 독립운동에 직접적 참여를 주저한 일체의 단체와 그 세력은 인도의 사회경제발전의 적(敵)이라고 간주돼왔었다.
따라서 교회는 사실 그간에 있어 이 나라 국민들의 주류(主流)에서 완전히 탈락될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같은 위험에서 교회를 구제한 것이 바로 「바티깐」 공의회이다. 공의회는 전통주의자들에 의해 묶여있었던 인도교회의 혁신세력을 풀어주었다.
이 혁신세력은 성직자편에도 있었고, 평신자들 중에도 있었다. 그러나 불과 소수의 주교들만이 이들을 이해하고 지도해왔었다.
오늘날 쇄신되어가는 인도 가톨릭교회 내에는 크게 나누어 두가지 정신적 움직임이 있다. 하나는 인도의 빈곤극복문제이요, 또 하나는 인도의 오랜 종교문화전통인 힌두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말란카라」 전례에 속하고 젊은 주교의 한분인 그레고리오스 대주교는 인도의 빈곤문제해결에 대한 교회의 참여를 강조하면서 『일반 서민(庶民)들에겐 그들의 인간존엄성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인간적 생활이 확보되어있지 않는한 정신적 생활이란 불가능하다… 「아시지」의 성 프란치스꼬나 간디같은 성자들은 물질적 빈곤의 극한 가운데서도 높은 정신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예외이다』고 말하였다. 동 대주교는 계속하여 『물론, 과거에 있어 교회가 인도주의적인 사업을 하지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궁국민들에게 전교할때 복음전교와 동시에 그들의 일상생활의 경제적 개선을 위해 실질적으로 힘써야한다는 인식은 적었다. 오히려 과거에 있어서는 그같은 일은 마치 공산주의적인양 따라서 교회를 위해서는 부적당한것인양 생각돼왔었다』고 말하였다.
공의회결과로써 이 점에 있어서의 변화는 현저하다. 교회는 지금 사회경제발전분야에 있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주교들에 의해 전국적 구제기구가 설립되었고 지난해 「봄베이」 국제성체대회중에서도 이 점의 중요성이 매우 강조되었었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노력이 모든 부면에 있어 성과를 거두어가고 있다.
둘째문제-즉 힌두교와의 관계에 있어 「말라발」 전례의 라이몬드 대주교는 『과거』에 산발적이나마 힌두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교회는 수천년 동안 개발되어온 힌두교의 자리를 무시하는것 같은 인상을 힌두교인들에게 주고 있었다』고 논평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힌두이즘」을 잘아는 가톨릭지성인이 인도에서 소수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이 교의 사상과 신앙을 깊이 또한 우호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만일 한 종교가 4천년간이나 신봉되어왔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정받고 깊이 연구돼야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고 강조하였다.
공의회결과로 주교들에 의해 부여된 이같은 변화는 교회에 대한 일반사회의 태도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하였고 그 좋은 증거가 어디서 보다 「봄베이」 국제성체대회때와 그 당시의 교황방문중에 잘나타났다. 그 당시 비그리스도교인들인 일반국민이 대회와 교황방문에 아주 우호적이었음은 널리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공의회를 계기로한 관계개선이 교회와 사회안에 없었더라면 그런 우호적지지는 기대하기 힘들었을 거고 오히려 반대로 성체대회도 교황방문도 회복하기 힘든 비참한 결과를 교회에 끼칠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의회를 통한 또 하나의 변화는 이 나라에서의 가톨릭과 비가톨릭 그리스도교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다.
공의회 이전에는 인도의 그리스도교는 분열과 혼돈상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같은 분열상은 다 합쳐도 국민전체인구 비율의 소수만을 이루는 그리스도교회 자체에 불리했던것은 물론이다.
각 교회들은 첫째 모든 교파에 관계되는 문제, 예컨대 교회학교 혹은 선교사 입국 및 거주권 문제 등에 있어 행동의 일치를 기하지 못했을뿐아니라, 오히려 교파상호간을 반목질시케하는 당국의 유도작전에 농락되는 형편이었다. 또 하나 분열상이 비져내는 더큰 불행은 이것이 선교(宣敎)상의 큰 장해가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제각기 다 참된 그리스도교회라고 주장하였으니 누구의 말을 더 믿어야할지 구도자들은 판단할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은 비록 교회일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라도 적어도 분열이 낳는 혼돈상은 사라졌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작년에 「웃탈·프라데슈」 주(州)안에 있는 4개 프로테스탄교파들과 연합으로 동주의 교육법에 항의했으며 모든 그리스도교회의 공동명의로 대(對) 정부 각서를 발표하였다.
더 최근의 일로서는 「케랄라」 주선거때 가톨릭주교들이 다른 교파대표들과 함께 선거대책위원회를 설립하여 모든 선거구에 비(非) 공산당 단일후보를 내게 했다.
과거에는 이런 상호협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각 교파는 서로 서로를 믿지 못하였다. 이런 상호간의 의심을 제거해준 것이 역시 공의회였고, 특히 인도의 비가톨릭교회대표들을 공의회 「옵서버」로 초청함으로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