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寅殉敎(병인순교)의 史的(사적) 意義(의의)
그 百周年(백주년)에 즈음하여
祖國(조국) 救援(구원) · 近代化(근대화) 寄與(기여)
殉敎者(순교자) 후예란 自負(자부)만으론 不足(부족)
現行(현행) 記念事業(기념사업) 너무도 微弱(미약)하고
금년은 우리나라 역사상에 있어서 네번째로 일어난 천주교의 큰 박해사건인 丙寅(1866년) 박해의 백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이러한 때를 즈음하여 이미 작년부터 敎區別로 기념사업이 각각 벌어지고 있음은 마땅한 일이나 이 기념사업을 한낱 어떤 敎區의 사업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보다 全國的 擧族的인 사업으로 이룩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병인년 순교의 史的意義를 중심으로 하여 우리 조상들이 이 나라의 近代化를 위하여 흘린 피의 발자취를 살펴보고자 한다.
■ 한글 發展 · 封建制度 打破로 寄與
(1)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천주교회는 權哲身 · 日身 兄弟, 丁若鍾 · 若鏞(茶山) 兄弟와 같은 南人學者들이 北京으로부터 전래된 天主實義 등의 교리책을 연구하다가 李承薰을 그곳에 보내어 聖洗를 받고 돌아와 1784年에 中人 金範禹의 집을 교회로 쓰게 함으로써 세워진 것이다. 이와같이 밖으로부터 성직자가 들어와 전교함이 없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온 세계의 전교사에 있어서 오직 우리 겨레만이 가진 바 큰 자랑인 일인 것이다. 이때부터 그들은 天主十誡를 굳게 지켜 이 땅에 처음으로 참되고 올바른 신앙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서로 교우라고 부르면서 당시의 엄격한 階級制度와 어리석은 온갖 迷信行爲를 打破하는 일에 앞장을 서며 諺文이라고 불려 쓰기를 싫어하던 우리 訓民正音으로써 교리책을 만들어 國文專用운동을 일으키고 北京의 主敎를 거쳐 편지를 멀리 西洋의 나라에까지 보내어 그들과 近代的인 國際條約을 맺음으로써 當時의 固陋한 鎖國政策을 打破하려하고 西洋의 新進文物制度를 받아들여 開化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이 나라를 近代化하고자 한 거룩한 愛國愛族운동이었으나 祖上祭祀를 强要한 朱子學을 指導理念으로 받들고 밤나무토막인 神主를 神처럼 崇拜하며 國民의 大部分을 쌍놈(常民) 奴婢라고 불려 賤待하며 __등 온갖 非人道的行爲를 마음대로 하고 있던 封建支配階級인 兩班들에게는 容納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나라의 천주교회는 창설되던 그해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하여 이후 1386年에 맺어진 韓佛修好通商條約으로써 전교의 권한을 억지로나마 인정받게될 때까지 백여년간에 걸쳐 모진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 백년동안의 박해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첫번째는 中國人 周文謨 神父 以下 3백여명이 순교한 辛酉(1801년) 박해이고 두번째는 佛國人 앵베르 주교 以下 2백여명이 순교한 己亥(1839년) 박해이고 세번째는 金大建 신부 이하 10여명이 순교한 丙午(1846년) 박해이고 네번째는 불국인 뵈르뇌 주교 이하 근 만명이 순교한 丙寅(1866년) 박해이었다.
이러한 거듭한 박해로 말이암아 순교한 교우들은 나라에 대하여 아무런 죄도 저지름이 없이 오로지 천주를 받들어 숭배하고 조상의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는 탓으로 거룩한 피를 흘림으로써 이 땅에 평화와 사랑의 복음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이러한 순교자들 가운데에는 외국인 성직자들은 물론 위로는 王族으로부터 아래로는 천한 노비까지도 들어있었다. 王族으로서는 우리 천주교회가 창설되던 때의 임금이던 正祖의 배다른 동생인 恩彦君의 夫人 宋 마리아와 그 며느리이던 申 마리아가 辛酉박해때에 순교하였었다. 그런데 이 宋 마리아의 손자는 뜻밖에도 1849年에 임금의 자리를 얻어 哲宗이 되었다. 그러므로 哲宗이 다스리던 14年 동안에는 그리 큰 박해가 없이 지나게 되어 그 末年까지에는 12명의 불국인 성직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2만3천여명의 교우를 거느리게 되었다.
■ 大院君과 政略과 憤怒
(2)
이러한 떄에 哲宗이 1863年 12月에 갑자기 죽고 앞서부터 己亥박해를 일으킨 일이 있던 趙萬永의 딸인 趙大妃가 王宮의 女主人이 되어 12歲의 먼 王族인 高宗을 임금으로 삼고 實權은 임금의 아버지이던 興宣大院君 李昰應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高宗은 어릴때에 교우이던 乳母 朴 말다의 젖을 먹고 자랐던 관계로 그 어머니이던 閔氏夫人도 일찍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따라 閔夫人은 그 아들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하인을 뵈르뇌 主敎에게 보내어 새 임금의 행복과 나라의 태평을 비는 생미사까지 청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뵈르뇌 주교들은 곧 우리나라에서 信敎의 자유를 얻게될 것을 믿고 서울에 큰 성당과 학교 고아원을 세우기 위하여 많은 돈을 불란서로부터 모아다 두고 있었다.
이리하여 천주교가 크게 전국적으로 퍼져가려할 무렵에 러시아가 極東으로 進出하여 1860年에는 「우리디보스톡크」 港口를 開設하고 1864년부터 바로 그 남쪽에 있는 豆滿江地帶에 거듭 군대를 보내어 우리나라에 대하여 通商을 强要하였다. 이 사실을 듣고 大院君이 크게 당황하고 있을 때에 그를 잘 알고 있던 교우 洪鳳周는 1865년 겨울에 그에게 글을 올려 러시아의 侵入을 막으려면 우리나라에 와있는 불란서 성직자들의 힘을 빌어 불란서 영국같은 나라와 同盟을 맺는 길 밖에 없다고 아뢰었다.
이 편지를 거듭 읽고 한참 생각하다가 대원군은 그러면 곧 뵈르뇌 주교를 만나게 해달라고 홍봉주에게 부탁하였으나 때마침 12월 성탄때이라 주교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위하여 멀리 황해도 지방에 내려가 있어서 곧 대원군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北京으로 가고있던 우리 使臣들이 急한 거짓편지를 대원군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淸國에서는 모든 西洋人을 죽이고 있으니 우리나라에서도 걱정할 것 없이 그렇게 하시오』라 하였다. 이 거짓 소식을 가지고 천주교 배척파의 領議政이던 趙斗淳들이 대원군을 충동하니 뵈르뇌 주교를 제때에 만나지 못하여 화가 복바쳐 있던 대원군은 갑자기 마음을 돌려 그해 12월末에는 주교의 하인이던 李先伊를 먼저 잡아 교회의 사정을 샅샅이 듣고 이를 앞잡이로 내세워 다음해인 병인년 正月부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모지고 큰 박해를 일으키게 되었다. 한편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게된 또하나의 까닭은 그가 1865年 4月부터 시작한 景福宮의 再建費用에 不足을 느끼어 이를 교회의 財産을 뺏음으로써 메우려 한데 있었고 그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이를 재촉질한 것이었다.
■ 平和와 사랑의 福音의 씨들
이리하여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 이하 6명 불국인 성직자와 承旨 南鍾三 洪鳳周 等 主要한 교우를 잡아 그해 3月 8日에 漢江가 새남터에서 목베어 죽이고 다시 다블뤼 부주교 이하 3名의 불국인 성직자와 많은 교우를 忠淸道 保寧水營에서 3月 30日에 죽임으로써 모진 박해를 내딛기 시작하였다.
이때 우리나라에는 12명의불국인 성직자가 머물러 있었는데 多幸히 忠淸道地方에서 전교하고 있던 리델 신부 이하 3명의 성직자는 교우들의 도움을 얻어 배를 타고 天津으로 건너가 이 억울한 박해사실을 그곳에 있던 불란서 艦隊에게 알리었다. 이에 불란서 艦隊가 그해 8月과 9月에 江華島를 거쳐 漢江으로 들어와 그 성직자를 죽인 까닭을 묻게되니 대원군은 이를 물리치는 한편 교우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西江의 切頭山에서 강물에 던져 죽이게 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先斬後啓」하라는 명령을 내려 『누구나 敎人을 만나면 먼저 죽이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방법을 썼으므로 그해동안에만 8천여명의 교우가 순교하게 되었다.
대원군의 박해는 그후 西洋배가 나타날때마다 거듭되어 독일 商人 옵펠트의 배가 나타났던 1868年과 미국 艦隊가 나타났던 1871年에도 각각 큰 박해가 일어났었다. 이리하여 대원군의 박해는 전후 6年동안 계속되고 이로 말미암아 적어도 1만명 이상의 교우가 순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같이 모진 박해를 내리던 대원군도 그 며느리이던 閔妃의 세력에 내몰려 1873年에 隱退하게 되고 우리나라는 1876年부터 日本을 비롯하여 西洋의 나라들과 近代的인 條約을 맺게되었다. 한편 대원군의 夫人이던 閔씨는 1896年에 마리아라는 敎名으로 領洗하게 되고 그의 孫子이던 義親王도 1955年에 領洗하였으며 또한 孫子인 英親王도 1962年에 東京에서 영세하고 오늘에는 聖母病院에 入院中이다. 이렇듯 천주교회는 백여년동안에 걸쳐 모진 박해를 받음녀서도 끊임없이 발전하여 이나라를 近代化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고 마지막의 승리를 거두어 오늘에는 70만의 교우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순교자의 거룩한 피가 씨로 되어 잎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한 결과라 하겠다. 이렇게 보아올때 병인박해 백주년을 맞는 금년의 기념사업이야 말로 우리나라의 모든 교우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한덩어리로 되어 이룩하여야 할 일이라고 믿는 바이다. 이러한 뜻깊은 일이 한밭 어떤 교구의 일로만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이 셋이 모이면 세 黨을 만들고 모일수록 힘이 약하여진다』는 分裂性만을 國內外에 드러내는 결과밖에 안될 것이다.
더우기 今年에는 새로이 병인순교자들 가운데에서 26位의 福者諡福이 있을 豫定이라는 소식이 있으니 이 새로 나온 福者가 어찌 어떤 敎區만의 福者일 수 있으랴. 1925年에 諡福된 己亥 丙午 박해의 순교자 79位 福者가 우리 한국 全體의 榮譽로운 福者이듯이 앞으로 새로 나올 福者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우리 한국의 모든 성직자 교우들은 마땅히 한덩어리로 되어 금년의 병인순교 백주년 사업을 알차고 성대하게 치르는 한편 우리 福者中에서도 하루바삐 聖人이 나오시도록 열심히 祈求함이 거룩한 우리의 순교자들의 精神에 報答하는 길임을 다짐하여 둔다.
柳洪烈(史學家 · 서울大 교수 · 文學博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