久遠(구원)의 "眞理(진리)” 피로 證言(증언)한 26位(위) 諡福者(시복자)의 受刑記(수형기)
刑場(형장)서 웃음짓고 「榮光(영광)의 길」 간 先烈(선열)
主敎(주교) 2 · 神父(신부) 7 · 信者(신자) 17位(위)
『고뇌를 통해 지식은 온다』는 이 인간정신의 깊은 법칙은 그 수난의 1백년후 바야흐로 한국성교회가 전교의 황금기를 시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인류사상 유래가 드문 병인년 박해로 무려 1만명 무고한 생령이 참살됐다. 그중 26위 순교자가 열복조사를 끝내고(1915년-1952년까지 제반수속을 끝냄) 교종의 마지막 재가인 칙령에 의한 정식선포를 기다리고 있다. 천사와 같은 영혼과 의지를 지닌채 금수처럼 폭정의 손에 살육된 선열의 천주에 빛날 그이름을 여기 다시 새겨본다.
① 장주교(1814-1866) 불란서 「러망」교구 출신. 월남에서 사형선고 받고 추방되어 만주 요동에서 10년 전교. 1856년 한국에 입국 제4대 감목 역임. 인쇄소 등 경영하며 10년간 많은 수확을 거둠. 2월 벽해가 시작됐을 때 끝내 귀국을 거부 혹형끝에 3월 8일 새남터서 3 부하신부와 함께 참수치명됨.
② 안주교(181-1866) 불 「아미앙」 출신. 1845년 10월 김대건 신부의 일엽편주 「라파엘」호로 입국. 20년간 전교. 제5대 감목을 역임. 「韓佛漢사전」 등 많은 저술을 남긴바 그중 「한국순교자전」이 유명함. 충북 수영 · 갈메못에서 그의 소원대로 예수수난날(3월 30일) 치명. 첫번칼에 목을 반쯤 베어놓고 돈4백량을 받은 후 휘광이가 두번째로 쳐서 절명했다.
③ 백신부(1838-1866) 불 「디죵」교구 출신 법관인 남작의 장남으로 부귀재능이 겸비했다. 1865년 입국. 서울서 체포. 3월 8일 장주교에 이어 참수. 군문효수됨. 죽기직전 몹시 갈증을 느꼈으나 군사들의 조롱만 받았을 뿐, 그러나 한국에 온 것을 끝내 후회않는다고 주장했다. 당시 28세.
④ 서신부(1840-1866) 불 「보르도」교구 출신. 1865년 공주지방에 임명. 2월 28일 경기도 광주에서 미리 잡힌 그의 복사가 대동한 포졸에 의해 체호됨. 말못한다는 핑계로 심문에 불응하여 곤장 · 혹형끝에 참수치명.
⑤ 김신부(1839-1866) 「뤼송」 교구 출신. 1865년 입국. 서울 근방 「손골」에서 8개월간 사목, 한국풍습에 누구보다 익숙하고 천품이 착해 교우들의 존경을 받았고 미리 순교를 기원했다. 3월 8일 장주교 두 동료신부가 참수되는 것을 목격후 그날의 마지막 치명목자가 되었다.
⑥ 신신부(1830-1866) 불 「알비」 출신 25세에 서품되어 1856년에 장주교 일행과 상해서 2개월이 모험항해로 입국. 「베론」 신학교 초대 교장 역임. 몹시 활동적으로 많은 교우촌을 이룩했고 자연과학에 조예까 깊어 많은 기록을 남겼으나 분실됐다. 10년 연구로 이룩한 「한국어 문전」 「韓_漢전」 등도 그때 분실됨. 「베론」에서 압송되어 새남터에서 명상하는 자세로 앉아 세번 내려치는 칼에 운명. 군문효소됐다.
⑦ 박신부(1828-1866) 불 「쌩디에」 출신. 한국어를 제일 빨리 배웠고 비상한 재능의 소유자로 「베론」에서 신신부와 사전편찬에도 공이 큼. 한국에 미구에 큰 재앙이 닥칠 것을 예언한 그는 3월 11일 새남터서 참수됨.
⑧ 오신부(1837-1866) 「앙구렘」 출신. 1863년 「베낭」의 한국유학생과 입국, 배를 타고 일시 피난했으나 풍랑으로 되돌아와 자수를 결심, 처음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왕의 병과 국혼으로 다시 충청도 수영으로 먼 형극의 길을 걸어 3월 30일 예수사난날 정오 주의 운명하신 그 시각에 그도 치명했다.
⑨ 민신부(1838-1866) 불 「랑그르」신학교 출신, 1865년 입국. 3월 14일 미리 체포된 안주교가 교우들에 대한 피해를 두려 자수하기를 명함. 곤장으로 헤여진 다리를 끌고 서울서 충청도 형장으로 가는 길 종시 유코했다고 함. 3월 30일 참수치명
⑩ 유정률 베드루. 평양 윤리면 함현리(논재) 태생. 1864년 상경하여 장주교께 영세받고 귀향, 병인년 정원 「고둔」공소에서 체포됨. 평양감영에 같이 잡혀간 배교한 백여명 교우로 하여금 1인 3대씩 그를 치게하여 매 3백대로 장살(杖殺)되니 때에 나이 약 30세.
⑪ 조화서 베드루. 수원태생. 기해년(1837) 순교한 조 안드레아의 아들, 부자함께 체포되어 서로 배교할가바 격려했다. 처형직전까지 태연자약 신앙을 고수한다고 역설하며, 참수되니 때 나이 40세.
⑫ 이명서(재덕) 베드루. 충청도 태생. 전주성 지동서 체포됨. 신병으로 들것에 메어가 한때 배교할번 했으나 돌이킴. 동료의 무고를 거절하여 병든 몸으로 혹형끝에 참수치명. 전주 서문밖 용마루에 매장. 향년 50세.
⑬ 정문호(계식) 발도로메오. 충청도 임천 태생. 평소 예모와 품행이 단정한 청빈한 관리로 원을 지냄. 옥중에서 일시 배교할 뜻을 가졌다가 베드루 조화서의 격려로 순교를 결심, 치명하니 65·6세의 고령이다.
⑭ 손선지 베드루. 충청도 임천 태생. 신리골서 잡힘. 16세에 회장을 지냄. 한마디만 배교하라는 말에 『만번 말해도 못한다』고 하여 팔을 비틀려 부러짐.
형장에서 술취한 휘광이가 칼을 잘못하여, 어깨를 치자 돌아보고 꾸짖었다. 하늘을 우러러 『예수 마리아』를 세번 부르짖고 세번 내려친 칼에 참수됨.
⑮ 한원서(재권) 베드루(요셉?). 충청도 태생 전주 대성동 거주, 옥중에 찾아온 아버지의 배교권유에 끝내 불복, 숲정이에서 치명, 37·8세.
(16) 정원지(서운) 베드루. 충청도 진참 출신. 효성이 지극해서 옥중에서 어머니를 생각고 울었다. 숲정이에서 참수치명하니 나이 21·2세.
(17) 조윤호 요셉. 조화서의 아들, 아버지가 참수된 이튿날 전주 서천교 밑에서 많은 장꾼과 어머니의 목격리에 곤장 16도로 목을 쳐 장살함. 때에 나이 19세.
(18) 이윤일 요안. 충청도 홍주 태생. 경상도 문경서 체포. 회장을 지냈고 사교의 우두머리로 석달동안 혹형을 받았으나 끝내 불복, 대구 남문밖 관덕당에서 태연히 참수치명하니 나이 45·6세였다.
(19) 남종삼 요안. 제천 태생. 26세 진사급제하여 영해군수로 후에 승지에 이름. 홍봉주(도마)와 함께 대원군께 「청원서」를 올려 더 큰 박해의 화근이 됨. 장주교 체포소식 후 순교를 준비함. 혹형 끝에 십자가에 달린채 수레에 실려 새남터에서 참수됨.
(20) 최형(치장) 베드루, 수원 태생. 1845년 안드레아 김신부와 상해로 고 주교, 안 신부를 모시러 감. 장 주교의 명으로 성서출판의 임무를 맡아 번역, 저술을 함. 갖은 악형 끝에 십자가에 달린채 수레에 실려가 새남터서 참수됨.
(21) 전장운(승현) ㅇ안. 서울 태생. 기해년에 배교석방됨. 안드레아 김신부 귀국으로 회귀하여 선서 판각을 장만하기에 열중. 피않고 판각을 지키다 체포. 다른 교우의 무고를 거절, 무서훈 「채장」형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수레에 실려가 참수되다.
(22) 정의배 말구. 경기도 용인 출신. 「산 성인」이랄 만큼 성덕이 높은 회장임. 자녀가 없었으니 결혼하고도 동정이 아닌가 함. 만반준비로 늘 포졸을 기다리다 붙들려 귀울 뀌뚫리고 참수되어 군문효수당함. 순교자중 최고령인 71세
(23) 우세영(세필) 아릭수 황해도 시흥태생. 평양논제에서 붙들려 혹형끝에 석방. 다시 서울로가 정말구 회장 집에서 자원으로 포도청에 감. 그의 청춘을 동정하여 배교를 권고받았으나 불복, 참수되니 때에 나이 21세.
(24) 황석두(재건) 누가. 충청도 연풍태생, 부유한 양반집 3대독자. 안주교 체포 당시 그를 잡지 않는 포졸을 따라 몇십리를 따라가 억지 체포당함. 압송도중 내내 전교하여 걷지 못하도록 혹형을 받음. 충청도 수영에서 치명함.
(25) 장주기(낙소) 요셉. 수원 태생. 「베론」 회장을 지냄. 그는 서양신부를 숨긴 장본인으로 혹형을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다시 수영으로 끌려와 참수치명되니 향년 65세였다.
(26) 손자선 도마. 홍주 태생. 병인년 3월 「덕산」 관가에서 안주교 소지물을 찾아가라는 연락받고 용감히 갔다가 잡혔다.배교시키려 두다리를 꺾었으나 끝내 불복, 교살되니 23세. 후에 순교한 많은 썩은 시체중 그의 것은 썩지 않고 깨끗했다는 증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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