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톨릭을 이렇게 본다 - 一般社會(일반사회)의 敎會觀(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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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1965-05-16 [제471호, 4면]
■ 敎會參與거의 없어-敎會自體의 態勢도 未備 / 朱耀翰(經濟科學審議會常任委員, 前復興·商工部 長官)
한국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내가 가진 어렴풋한 지식은 이조말엽에 큰 박해사건으로 많은 성직자와 교도가 순교했다는것 그리고 정(丁약용)씨 일가와 기타 가톨릭계통 학자들의 손으로 서양문명과 문물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는 사실 등이다. 두가지가 다 한국의 근대화운동에 기여한바 있겠으나, 앞의 것은 주로 종교적인 면에서 의미가 있고, 다음 것은 사회적 영향이 컸었다고 생각된다. 매우 천박한 관찰일지 모르겠다.
순교시대의 영향은 정치적인 뜻도 있을 것이요, 어떤 의미에서 사회구조의 변혁이라든가 사상적인 변천의 시동력으로 간주될 것도 같다. 그러한 격동적인 순교 역사의 반발이었는지는 모르나, 여하간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있어서 가톨릭의 저항정신은 비교적 두드러지지 않는 것같은 인상을 준다. 그 실례로는 3·1독립선언서에 프로테스탄계통의 서명자가 많았음에 비겨서 가톨릭지도자의 이름이없고, 그뒤의 종교적 의식을 중심으로 한 저항운동에 있어서도 가톨릭계통보다는 프로테스탄계통의 희생자가 많았던 것 같다. 혹시 이것은 나의 지식이 부족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프로테스탄의 도래는 구한국의 종말과 일본의 침략초기에 시작되었으므로 종교적인 순교사건은 적은 대신에 일본과의 항쟁이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20세기 상반기의 신문화 운동, 교육운동 등에 있어서는 가톨릭이 약간 후퇴하는 반면 프로테스탄이 비교적 활발하게 진출한 감이 있다. 가령 사립대학교육의 발달같은 부문에서 프로테스탄이 앞선 것이 아닌가 한다.
해방이후에 프로테스탄의 일부분이 정치계에 나섬으로 그 교회자신이 부분적으로 부패화한 것이 사실이라면, 가톨릭은 (어찌 본다면 자연적으로) 저항세력을 이룬것도 같았다. 예를들어 말하면 가톨릭 계통의 실질적 대표자로 정계에 등장한 장면박사와 그 지지자들이 야당세력의 중요한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비극적인 최후를 가졌던 한국의 이승만과 이기붕이 프로테스탄 교인이었고, 반대로 베트남의 전 대통령 오염일가가 가톨릭이었다는 것이 대조적이라고 할까?
최근에와서 한국의 저명한 지도자중에서 가톨릭에 귀의한이가 많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은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것 같다. 김성수, 최남선 등이 현저한 실례요, 현존한 인물중에는 박순천 여사와 그 외의 몇몇 민주당간부가 있다. 그리고 현재의 국회의장도 가톨릭신자로 알려져있는데 그이가 현재의 집권세력 중에서 약간 이질적인 존재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이르러 가톨릭계통의 의과대학이라든가 가장 실력있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새로 등장한 서강대학의 활동이 한국가톨릭의 사회적 관여의 새로운 경향인지는 더 두고 보아야 알것 같다.
가톨릭이거나 프로테스탄이거나, 통털어서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있어서 정치적, 경제적 또는 사회적 변천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에는 양으로 보아도 미흡한 것이다.
「전체 인구의 10퍼센트」 내외밖에 안되는 수량으로서 불교, 유교, 및 원시적 신앙에 뿌리박은 한국사회를 크게 움직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듯하다.
교회가 서북지방에서 더 빨리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그 지방의 사회적, 사상적 전통세력이 비교적 약했었다는데 원인되었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거기는 일종 사상적인 진공상태가 있어서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일 바탕이 컸던것 같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지역이 공산치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기독교가 한국에서 사회적인 영향을 겉으로 많이 주었으되 내면적인 민족성격면에서 큰 변화를 못가져왔다는 것은 양의 제가 아니라, 질의 제인 것도 같다. 즉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내세사상의 영향을 부지중에 받았는지 모르거니와, 한국의 기독교는 어느덧 은퇴 주의적인 면이 현저해진것 같다.
기독교사상의 중요한 면인 현세적인 인생관, 즉 인도주의, 자유의 개념, 도덕적인 인격의 권위-이런 면에서 한국인의 사고방식에 기본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이다. 적어도 이런 방면에 있어서 교인의 경우와 비교인의 경우 큰 차이를 발견하기 힘든다. 가령 부정과 부패를 대항하여 싸운다는 면에서 교인들의 실천적 행동은 비교인이나 마찬가지로 말뿐이요. 행위로 나타나는 신념과 용기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즉, 순교정신이 사회참여에서는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런 비판은 가톨릭에게도 적용되고 프로테스탄에게도 같이 내려질 수 있는 것이다.
■ 가톨릭서 同族의 溫氣 못느껴 / 申永澈(韓國日報論設委員)
사실, 나와 가톨릭은 그다지 인연이 없다.
몇사람의 신부, 신자를 제쳐놓곤 그 방면에 알만한 사람마저 별로 없다.
굳이 따지자면 내 여식(女息) 둘이 가톨릭에서 경영하는 유치원을 다녔다는 정도일까.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가 나와 가톨릭을 결연하고 또는 내가 가톨릭을 이해하는데 도움될만한 것들이 아니다.
다만 그래도 내가 가톨릭을 호흡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재불시(在佛時) 약 닷새 동안을 대서양안(大西洋岸)에 있는 「낭뜨」란 도시의 한 수녀원에 머물렀던 때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종교와 인간애에 전 인간을 바친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를 아주 가까이서 따스하게 대할 수가 있었다.
그저 이정도이다. 그렇듯 나와 가톨릭간의 왕래는 별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대로 나는 가톨릭에 대해 할 말이 있다. 하긴 모르니까 할수 있는 말일진 모르지만, 같은길의 한선배로부터 이런말을 들었다.
한국이 높은 쇄국(鎖國)의 울타리를 쌓고 깊은 잠을 자고 있었던 18세기말엽 이후 서구문명의 파도는 남북극을 넘어 동으로 동으로 뻗고 있었다.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다. 이때 서학(西學), 가톨릭이 이땅을 찾아 들었다.
한국근대화의 최초의 씨앗은 그때 뿌려졌다. 다시말하면 한국근대화의 시동을 가톨릭이 걸었었다는 이야기이다.
헌데 그렇게 찬란한 첫발자욱을 새긴 가톨릭으로서는 그후의 족적이 모든 역사의 경로에서 별무신통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그 선배가 지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3·1의 거화(巨火)가 온 민족성원(民族成員)들의 가슴속에서 불타 올랐을때 가톨릭은 의외로 그 그림자가 흐렸었다는 것이다.
33인 명단에서도 찾아볼수 없으리만큼….
그후에 있어서도 가톨릭은 민족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정신(挺身)이나 한국근대화에 의해서 눈부신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생각되는 바가 있었다.
한국사회의 폐쇄성을 깨뜨리려던 가톨릭은 그 스스로가 지니고있는 어떤 폐쇄성 때문에 스스로 행동할수 있는 폭에 한계를 짊어졌던 것이 아니었던가하고.
적어도 나의 눈에겐 가톨릭이 지금까지도 그 뿌리를 이 땅에 굳건히 박고있는 것으론 비치지 아니한다.
그 폐쇄의 인상도 말끔히 가셔 보이질 않는다.
그것은 가톨릭의 교리에서 오는 것일수도 있겠고 혹은 그 계율·의식 나아가선 그 국제주의에서 오는 것일수도 있겠다.
어떻든 내가 아직도 가톨릭에서 같은 핏줄기와 같은 온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만은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종교가 낯설어서는 안된다. 경원되어서는 물론 안된다. 더우기나 오묘한 교리뒷곁에 도사려서는 안된다.
가톨릭은 보다 한국의 것이 되어야할것이 아닌가?
민족이 피고 괴롭고 외롭고 가난하고 학대 받을때 가톨릭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의 교로서 완전무결하게 그 고난속에 용해해 들어가 울어야할 것이 아닌가.
촌호(寸豪)라도 민족의 진운(進運)에서 눈을 돌리고 행동의 기축(基軸)을 그곳에서 떼어놓는 경우가 있다면 아니될 일이다.
물론 보다 적극적으로는 오늘날과 같이 조국의 근대화와 자주의 회복이 애타게 갈구되고 있을때 가톨릭은 스스로 역할할 수 있는 장(場)을 찾아야할 일이다.
가톨릭은 더욱 해되어야할 것 같다.
민족의 염원이 흐르는 곳에 가톨릭은 언제나 자리를 같이해야할 것이며 끊임없는 정신의 영양과 활소(活素)를 부어넣어야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톨릭은 한층 더 명도 실도 토착화되어야 한다.
그때야만 가톨릭은 나나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서 결코 낮설은 것이 아니될 것이다.
■ 責罰 強調보다 寬容을… / 洪承勉(東亞日報論說委員)
나는 종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종교에 관심을 가졌던 일은 있지만 어느 종교에도 귀의한 일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프로테스탄 예배당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있지만 세례를 받은 일은 없고, 가톨릭성당에 발을 들여 놓은 일은 있지만 영세를 받은 일은 없다.
그러나 나는 무신론자는 아니다. 이상에 신(神)이 없다고 단정할수 있을 만큼 내가 이 세상을 샅샅이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앞으로 내가 어떤 종교를 믿을 것인지 아닌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 다만 나 자신도 확실한 것은 내가 무신론자가 되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이다.
나는 학생시절에 가톨릭성당에서 주최하는 강연회를 들으러간 일이 있다. 또한 가톨릭에 관한 책도 몇권 읽어 보았다. 대학에서는 가톨릭에 관한 강의를 듣기로 신청한 일도 있다. 시험을 치르지 못해서 그 대신에 제출했던 「리포트」를 교수께서 가톨릭 계통의 잡지에 실어 주신 일도 있다.
6.25사변으로 나는 지원하여 군대에 들어갔다. 내가 집에 있지 않는 동안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톨릭을 믿게 되셨고 영세를 받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게 되었다. 물론 가톨릭의 의식대로 장사는 진행 되었다. 아버지는 지금 가톨릭 묘지에서 잠들고 계시다.
부모가 가톨릭을 믿는데 왜 아들은 믿지 않느냐 하는 꾸지람을 나는 많이 들었다. 집안에 가톨릭을 믿는 분들이 많은 것이다. 나는 부모가 가톨릭을 믿는다고 해서 꼭 아들이 뒤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해 왔다. 나의 신앙은 내가 결정해야 할 문제다. 앞으로 내가 어떤 종교를 믿게 되거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앞으로 내가 자기의 종교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가톨릭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부모가 믿는 종교라는데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가톨릭을 가장 종교다운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 나는 가톨릭을 가장 종교다운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말이나 글로써 정확하게 설명할수가 없다. 다만 나는 가톨릭성당 안에 발을 들여놓으면 프로테스탄의 예배당이나 불교의 절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엄숙한 기분을 맛보게 된다. 어떤 위대하고 절대적인 힘앞에 서있는 무력한 인간인 자기를 느끼게 된다.
물론 가톨릭에 대한 불만도 나에게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가톨릭과 과학이 대립했던 과거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도 가톨릭에는 사회적으로 편협한 태도가 전연 없지 않은듯이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을 나는 유감으로 여긴다. (그러한 불만이 나의 무식의 소치이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가족계획에 대한 가톨릭의 태도는 나의 눈에는 너무 완고한 것처럼 비친다. 가족계획의 방법에도 여러가지가 있는 것이지만, 살인(殺人)에 준하는 방법이 아닌 바에야 상당한 광범위에 걸쳐 가족계획에 대한 금령(禁令)을 완화할 시기가 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혼에 대한 가톨릭의 태도도 나의 눈에는 너무 완고한 것처럼 비친다. 이혼은 사람들의 죄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비극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가정에서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야겠다. 그러나 일어난 비극에는 동정할망정 그것을 규탄 할수는 없다. 이혼은 동정해야 할 문제이며, 금지해야 할 문제는 아닌것 같다.
혼인에 있어서도 가톨릭의 태도는 나의 눈에는 너무 배타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혼인하려 남녀가 가톨릭의 신도들이거나 아니거나 그들이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꼭 성당에서 축복을 받으려고 할때에 성당이 그들에게 축복을 거부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혼인에 대한 규정도 완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나는 미국 영화 「나의 길을 가련다」에 나오는 신부님의 인도주의, 또한 미국영화 「워터프론트」에 나오는 신부님의 사회정의감에 깊은 감명을 받은바 있음을 적어 두려고 한다.
■ 嚴律 克己主義 등이 疏遠케해 / 申右艸(한국일보논설위원)
가톨릭에 대해 나는 문외한이다. 나와 같은 이교도가 이에 대하여 무언가 말하는 것은 망발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일은 아는사람은 말하지않고 모르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실 말하면 가톨릭의 엄격한 계율, 청렴하고도 강인한 극기주의, 중세의 어두운 전설적인 승원(僧院), 세속을 떠난 고고한 수도승, 이러한 「이미지」들은 한편으로는 꿈, 한편으로는 현실유리(遊離)의 멀고먼 일로 비쳐져서 나를 소원케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이 세계의 문화역사에 다대한 영향을 끼쳐온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특히 그것은 문학, 예술, 지적인 정신적인 창작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톨릭의 정신과 풍토는 우리 영혼의 영역에 실로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여러가지것을 남겨놓았다.
허다한 유명한 소설, 전기, 시, 작품들이 이 고독하고도 엄격한 정신적인 환경 속에서 산출되었다. 데칼트도 파스칼도 승원에서 그 위대한 정신작품을 낳았다. 현대에도 서구의 문학자들이 사색의 편력을 하다가 결국 가톨릭에 귀의하는것을 보면 영혼의 구제는 그밖에 다른길이 없는 듯도 싶다.
우리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80여년전 1783년에 명류(名流)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것으로 효시를 삼는다. 한데 가톨릭은 이곳에서 옳게 처우를 받지는 못하였다. 당시 완강한 유학자(儒學者)들의 반발을 가져왔으며 당쟁(黨爭)의 미끼로 이용되는데에 지나지 않았다. 정조신해교옥(正祖辛亥敎獄)과 순조신유옥사(純祖辛酉獄事)는 처참한 유혈의 자취를 남겨놓았으며 최근세에 이르러서도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하여 병인옥사(丙寅獄事)가 있어 수많은 교도들과 외국인 선교사들까지 크게박해를 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도 일종의 문화충격(文化衝擊)이라고나 할 것인가.
그러나 특기해야할 일은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옴과 함께 서구의 학문전적(學問典籍)이 유입됨으로써 효·현(孝·顯) 년간에서부터 대두 되었던 실학(實學) 풍조에 크게 박차를 가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정다산(丁茶山) 박연암(朴연巖) 박초정(朴楚亭) 등의 해박하고도 광휘있는 학문이 이를 계기로하여 이룩되었던 것이다. 이일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싹을 트이기에 충분하였으나 소위 배외척사(排外斥邪)로 좌절되고 말았다.
만약 우리나라에 처음부터 선교(宣敎)가 자유롭게되었고 서양의문물이 더좀 활발히 수입되었더라면 우리사회의 근대화는 벌써 완성되었었을 것이고 따라서 40년간의 저 억울한 암혼시대는 격지않고도 지났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할 것이다.
어쨌든 기독교가 구라파의 문화를 형성했을뿐만아니라 세계의 구석구석에 까지 문명의 씨를 전파했고 오늘날의 고화(高化)된 과학문명의 시대에 있어서도 오히려 불멸의 빛깔을 지니고 있는것은 그를 신봉하고 신봉하지 않음에 불구하고 누구나 부정 할수가 없다. 실로 과학이나 물질이 인간의 영원무궁한 정신과 영혼의 세계를 어떻게 할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라는 세기는 인간이 경험하고 개발 해온 정신영역의 막다른 벼랑에 이르러 있다고 할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나락(奈落)으로 향할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시 새로운 지적인 「피라미트」를 쌓아올릴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보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같은 상항속에서도 로마교황청 「바티깐」에서 울려나오는 신성한 말들은 세계의 귀에 아직도 엄숙한 권위를 느끼게 한다. 평화와 구제-우리에게 이보다도 더 절실하고 성스러운 날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