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97) 自我의 價値 ③
발행일1965-05-16 [제471호, 4면]
우리는 비탈가의 우거진 신록아래에 자리를 잡고 서울 시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높은 나무가지에 비치던 보라빛 햇살도 걷히고, 성급한 일부의 「네온」은 시가 한구석에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저녁 그늘 속에, 마음의 그늘을 감추듯, 나는 오랫동안 바라보던 시가에서 눈을 떼어 진호를 바라보았다. 진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호주머니속을 바시닥 거리며, 무엇인가 꺼낸다. 시선이 마주치자 계면쩍은 듯한 미소를 담고 조그마한 「케스」를 꺼내더니 내 무릎에 놓는다.
『이거 뭐지요?』
『펴 보아!』
오원짜리 만한 원형의 백통 「메달」인데, 합장하고 섰는 성모마리아상이 부각되어 있었다. 줄도 백통인데 선듯 보기에는 백금줄 비슷하니, 잘게 세공한 것이었다.
『목에 거세요!』
진호는 당장 목에 달기를 바랐다.
선듯한 차가운 촉감은 차츰 체온속에 녹아내렸다.
진호는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순간 나도 마음의 그늘을 씻고 구김살 없이 웃었다.
「미스터」배의 재산에 비교해보면 돈 값은 극히 적은 것이겠지만 그속에 담긴 진호의 마음이 강하게 가슴에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이따금 느껴지는 가슴켠의 그 촉감이 이상하게 물결친다.
진호의 시선 속에는 아무런 그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의 그늘진 마음의 구석이 진호에게 감득되었을까바, 경계하고 있던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 마음의 그늘을 한구석에 접어 둔채 밝은 표정으로 진호를 대했다.
『남이 보면 백금목걸이라도 한줄 알겠어요?…』
『성모 마리아상을 백금 줄로 달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백금 줄아닌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
진호의 그 소박한 마음은 나도 이해할수가 있었다.
「미스터」배나 「미스터」꼬마와의 대화에서는 얻어 볼수 없는 것이었다.
나의 앉을자리와 숨쉴 자리를 진호는 다소곳이 주는듯했다.
진호를 만날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돈값을 들이지 않고도 우리사이에 무엇인가 밥을 채워주는 풍족감 같은 감을 느끼게 한다.
진호는 시계를 보더니 아쉬운듯이 일어섰다.
『시간이 없어. 부대로 가는 차가 8시에 있는데 시간까지 대가야 해!』
우리는 급한 비탈길을 누비며 내려와서 퇴계로까지 왔다.
진호는 거기서 용산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떠났다.
혼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목의 성모상 「메달」을 꺼내 다시 보았다.
주던 때의 진호의 그 표정이 완연히 눈앞에 재생된다.
그 영상은 가슴살에 닿는 「메달」의 촉감과 함께, 잠시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그날밤, 나는 그 「메달」을 갖다준 진호의 마음을 고맙게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스터」배의 청혼에 맘이 끌리고 있었다.
『내 마음 속에 이런 그늘이 있는 것을 진호가 안다면 얼마나 나를 경멸할까?』
이런 생각도 하면서 여전히 한달 월급 삼십만원이란 놀라운 액수에 내 마음은 다가들고 있었다. 진호의 진실, 그것이 아깝고 귀한 것이면서 「미스터」배의 재산은 그 이상 아깝고 귀해 보였다.
그러나 문득 유리에 김이 서리듯 내 마음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미스터」배의 어머니가 반대하실거야 대개의 어머니는 나 같은 출생의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다가 진호의 가슴에 상처를 주어서는 안되지!」
호화로운 생활에 유혹되었던 내 마음은 단꿈을 깬듯이 번쩍 눈이 뜨인다.
「다소곳이 진호와의 대화 속에서 느낄수 있었던 나의 하나의 위치, 거기에 만족할 것이지 더 무엇을 바라랴!」
이렇게 생각하니 백화점 진열장 속에 반짝이던 수많은 금은보석의 빛깔과 같이 나에게는 「미스터」배가 인연이 먼 존재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불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성모상이 부각된 백통 「메달」을 고즈녁이 바라보며 내가 안길 마음의 자리를 그 속에 발견하였다.
진열장 속에 값진 정가표를 달고 진열된 패물이 내가 가진 이 백통「메달」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이었다.
이튿날 「오피스」에나 갔더니, 점심휴식 시간에 「미스」신이 서너명의 여사무원들에게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척하고 내 자리에서 읽던 책을 보았다.
『부잣집 며느리가 되는 것도 운이 좋아야 해! 「미스」양은 정말 운이 좋아!』
「미스」신은 이 모퉁이에서 내가 듣는것도 별로 상관않고 말했다.
『얼굴도 예쁘고 체격도 좋고 그러니까 「미스터」배의 마음을 끌었지, 순전히 운이라고야 할수없지않아?』
얼굴은 못났으나 마음이 무던한 「미스」권이 말한다.
『얼굴이 좀 예쁘다구 다 부잣집 며느리 되니? 얼굴 예쁜 여자들은 되려 「바」나 「캬바레」 같은데로 잘 흘러버리더라. 우린 왜 운이없을까?』
흘꿋 고개를 드니 「미스」신은 입맛을 다시며 그도 흘끗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미스터」꼬마가 밖에서 들어오더니 얘기할 것이 있다면서 복도로 불러낸다.
여사무원들의 시선을 뒷꼭지에 느끼며 나는 복도로 나갔다.
『오늘 여섯시반에, 어제 그 다방에서 「미스터」배가 기대리고 있겠다고 하였으니 그리 아세요. 일곱시에 아버지가 저녁 식사에 초대했데요.』
[…………」
나는 냉담한 태도로 가만히 있었다.
『딴데가면 안돼요.』
「미스터」꼬마는 반 명령적으로 다짐을 하고는 바쁜듯이 내옆을 떠났다.
(내 의사는 들어보지도 않고 당연히 갈듯이 생각하는군! 갈게 뭐야.)
이렇게 반발하며 「타이프」 앞에 돌아왔다.
그날은 일거리가 밀리어 퇴근 무렵까지 「타이프」를 두들기고 있자니 「미스터」배가 「타이프」된 것을 가지러 와서 나직히 속삭인다.
『나갈적에 같이 갑시다.』
『저 오늘, 집에 좀 볼일이 있는대요!』
『아까, 「미스터」꼬마 한테서 얘기 못들으셨나요?』
『들었어요.』
『아버지가 저녁식사에 「미스」양을 초대하고 기다리시는데, 안가면 돼요. 한시간이면 충분해요.』
「타이프」일이 끝난 것은 여섯시가 다되어서였다.
「빽」을 들고 나설때 까지 나는 「미스터」배와 같이 안가리라고 맘먹었는데 문득, 현관에 서서 기다리는 「미스터」배를 보니 강하게 거절을 못하고 그를 따라 나섰다.
「운명을 한번 시험 해볼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