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幼稚園(유치원) 뺏으려는 共産(공산) 奸計(간계) 미리 막아
解放直後(해방직후) 黃海道(황해도) 信川(신천)서
발행일1966-01-30 [제504호, 8면]
어떤 곳에 있어서나 교회 유치원은 간접적인 전교에 크게 공헌함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누구에게나 어릴때의 생활은 한평생을 통해서 쉽게 잊을 수 없는 일이어서 미신자 집안의 어린이들이 성당 유치원에 다닌 것이 인연이 되어 후에 입교하게되면 뿌리깊은 구교가정의 자녀들보다 더 뜨거운 신앙을 유지하는 실례를 현실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당 유치원 경영에 많은 성직자들이 힘을 기울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다.
8·15 해방이 되자 북한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은 즉시로 공산정치를 펴기 시작했다. 이에 호응하는 일부 공산당원들은 제멋대로 교회건물을 자기들의 소유로 하려고 날뛰었으니 바로 황해도의 신천유치원의 경우를 들겠다.
신천이란 고장은 프로테스탄 교세가 센 고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말엽에 프로테스탄에서 경영하는 많은 유치원이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점차로 모두 문을 닫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성당유치원은 번성해나갔다. 9천평의 터를 잡아서 으리으리하게 유치원 건물을 설계하고 있었다.
황해도 곡산본당을 맡아서 일하던 구천우(具天祐 · 요셉) 신부가 새로 발령을 받고 신천에 부임했을 때에는 아직 유치원 건물이 완성하지 못한채였다.
건축공사를 중단하기도 했다가 다시 시작하고 또는 약속한 시일 안에 기와가 오지않아서 종이 지붕을 얹은채 유치원을 하다보면 비오는 날이면 낭패를 당하기도 하는 등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결국 으리으리한 유치원의 낙성식을 보게되었다.
8·15 해방을 맞았다. 그런데 구신부는 어느날 군청 학무과에서 일하고 있었던 교우로부터 이상한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앞으로 국민학교에 유치반을 두게된다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이말을 전해들은 구신부는 유치원 문을 닫을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는 유치원 건물에 종각을 새로 만들어 세워 성당으로 하였다.
한참 번성기에 있던 성당유치원이 문을 닫는다는 것은 아무도 이해 못할 일이었다 해방을 맞아 새로 유치원을 해보겠다고 서두르던 프로테스탄의 목사들도 이상하게 생각하여 구신부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놀람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단호히 유치원을 폐쇄하고 말았다. 공산당들은 모든 제도를 자기들 멋대로 뜯어고치리라 짐작 안한바는 아니지만 서울에 가서 좀 더 자세한 것을 알아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당시에는 시골에 있던 교회당에서 추수한 곡식을 서울에 올려보내야 하는 실정이어서 시골신부가 한번 서울 갈때에는 자기가 먹을 양식을 짊어지고 가야만했다.
그래서 꼼짝못하고 세상이 어찌되어갈지를 몰라 궁금한 가운데 지내다가 1949년 내무서에 잡혀가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의 눈을 피하여 구신부는 월남하는데 성공하였다.
6·25동란때 UN군이 북진하게 되었을 때 다시 구신부는 신천본당을 찾았다.
이때 신부님을 다시 만난 신천교우들의 기쁨은 말할 수도 없었으며 눈풀의 해후였다. 그리고 교우들은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은 앞일을 미리 아셨읍니다. 그때 신부님이 유치원을 폐쇄하고 성당으로 고치지 않으셨더라면 공산청년회에게 까닭없이 빼앗길번 했읍니다. 성당유치원 건물이 탐이 나서 그들은 국민학교에 유치반을 둘려고 했대요. 그것이 공산당 상부의 지시는 아니였고 신천공산당 청년회가 꾸며낸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
이말을 듣고 구신부는 긴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것은 위험했던 고비를 무난히 넘겼음을 다행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구신부가 미리 손을 써서 그들의 계약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고만 셈이 되었다. 이렇게 무난히 교회재산을 보호하게 되었던 구신부는 가끔 이상한 예감이 교회에 미치려는 화를 면하게 해주었다고 젊었을 때 겪은 일들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