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世界文化界는 바야흐로 今年 특히 이달들어 지금으로부터 7백년전 中部 이태리 「플로렌스」에서 태어난 한 사람을 기념하는 標識아래 서 있다. 그는 알렉산델 시사 혹은 나폴레온 같은 帝王도 將軍도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뉴톤, 아인슈타인 같은 哲學者도 科學者도 아니었다. 그는 호머나 세「스피어가 그랬던 것처럼 꿈을 지닌 사람이며, 한 詩人이었다. 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단떼·알리기에리이다. 단떼는 아직 살아 있다. 그가 그 言語를 만들어주었다해도 과언이아닌 그의 민족(이태리) 안에서만 살고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完成된 宗敎詩를 남겨준 그리스도敎世界안에서만 살고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베토벤의 交響樂이 全人類의 所有로 남아 있는것과 같이 단떼는 오늘날 全人類의 文化財가 돼 있다.
■ 그의 生涯와 作品 「神曲」의 意義 올라프그라프(왜관 聖 베네딕도會員 神父)
호머, 섹스피어처럼 꿈을 지닌 단떼 20世紀에 說破
苦痛의 人生을 幸福에로 引導
作品意圖 宗敎와 藝術融和의 完成
作品解釋은 字句的 우의적으로 해야
∙凡常치 않은 일
이것은 凡常치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단떼의 世界觀은 기울어져가던 中世의 그것이었고 이 時代는 또한 이미 5백년 이래 우리의 그것이 아니니 말이다. 뿐만아니라 그는 깊은 信仰에산 가톨릭信者였다. 그리하여 그의 著名한 神曲은 그와 世界觀을 같이하는 사람만이 완전히 理解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人類中에서는 不過 5分之1 혹은 6分之1의 사람들만이 信仰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오래전부터 歐美에만 限하지않는 이같은 그의 名聲은 大體 무엇에 起因하는것인가?
∙原子時代에도 높은 名聲
우리 韓國에서도 단떼의 「神曲」이 이미 5년전 崔민순 神父에 의해 번역출판되었고(世界文學全集 第18卷) 2萬 餘部가 판매되었다한다. 이웃 日本京都大學에는 단떼 研究室이있으며 그곳에는 단떼와 그의 自書 및 思想에 관한 3千 餘部의 藏書가 있다.
이제 우리는 이 紙面을 통해 단떼를 기념함에 있어 먼저 그의 생애를 略述하고 神曲로하여금 世界文學史上 特有한 意味를 가지게한 것이 大體무엇인지에 대하여 간략히 答하고저 한다.
우리가 確信해도 좋은것은 단떼의 名聲이 이原子時代에도 사라지지않을 뿐만아니라 앞으로도 그럴것이며 3百年後에는 보다 더큰 勳意로써 그의 生辰1千 週年을 記念하게될 것이라는 것이다.
단떼·알리기에리는 아마도 1265년 5월 30일 그 當時 이태리에 있어 「로마」 다음으로 精神的으로 가장 隆盛했고 또한 經濟的으로나 政治的으로도 重要한 都市였던 「플로렌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貴族出身이었다.
∙베아뜨리체
프란시스꼬會 「산따·크로체」 修道院學校를 거친후 「산따·마리아·노벨라」의 도밍고會 大學에서 工夫한상싶다.(비체·풀꼬·뽈띠나리의 딸이요 後에 시몬·데이·발리의 夫人이라고 傅해지는) 少女 베아뜨리체에 대한 戀慕는 그녀가 죽은 다음(1290년) 神秘的으로 昇華되어 이詩人의 필생을 통해 지속되었다. 단떼는 1294년頃 「플로렌스」의 名門出身인 젬마·도나티와 結婚했다. 그는 當時 政治的으로 反敎皇派였던 白色 「궬프」黨에 屬해 있으며 1301년에는 敎皇廳(보니파시오 8世 敎皇」과의 平和交涉次使節어의 一員으로 「로마」에 派遣된바도 있다.
그러나 「앙쥬」의 佛蘭西王家支派出身』인 샬·발라는 敎皇廳平和仲裁者로 「플로렌스」에 나타나 단떼의 反對黨인 黑色 「궬프」黨으로하여금 勝利를 거두게 하였다.
그 結果 단떼는 詐欺와 反 「로마」 政治活動罪로 몰려 財産沒收와 함께 追收刑을 받게됐으며 이를 어겨 歸還하는 경우에는 火刑에 쳐해질 위험에 놓여 있었다.
∙20年의 流浪生活
그리하여 단떼는 이때로부터 그가 죽기까지 거의 20년 동안 中部 이태리 諸都市를 定處없이 放浪하게되었으며 아마 1306년에서 1309년 사이에는 그의 哲學·神學硏究를 마치기 위해 當時歐羅巴에있어 文化의 先驅地였던 「빠리」에 머문듯하다. 독일 皇帝 하인리히 7世의 이태리 遠征(1310~13)은 잠시나마 이 詩人에게 還鄕의 希望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皇帝의 大折로 因해 단떼는 다시 追放되어 그는 그의 生涯의 마지막 7年을 「베로나」와 「라뭰나」에서 보냈다. 이 「라뭰나」는 단떼가 「神曲」 「天國篇」의 後半을 終結한 곳임과 동시 그의 永眠의 땅이요(1321년 9월 14일)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이다.
∙「神曲」 世界文學 史上不減傑作
단떼의 제일 값진 作品은 上述한 바와 같이 「神曲」이다. 이 作品에서는 詩人 단떼의 광활한 지식과 위대한 情緖世界가 가장 詩的으로 表現돼있다. 예술과 종교적 理念世界를 言語의 手段으로 表象하는 것이 여기서는 궁극적 完成으로 展開돼가고 있다. 詩와 神學이 그렇듯이 融和돼있는 것으로는 世界文學史上 달리 그 類例를 볼수 없다. 三行一節詩形의 1백편의 詩歌로 이루어진 三部作으로된 「神曲」에서 단떼는 「地獄」 「煉獄」 「天國」에 이르는 幻視的通歷을 서술하고 있다. 이 通歷의 想定的時期는 1300년 聖年의 聖週間 및 復活週間이다.
地獄과 煉獄通歷의 案內者는 비르질리오(人間理性)이다. 그리고 詩人 단떼가 救援의 眞理의 모든 깊이와 끝으로 天主聖三位의 玄義를 觀照할수 있었던 「天國」에서는(神學과 聖者들에 대한 지식을 상징하는) 베아뜨리체와 聖 베르나르도의 案內를 받고 있다. 靑年時의 愛人에 대한 追憶은 여기서 가장 맑은 宗敎的體驗으로 淨化되어간다.
교리적인 것은 詩的表現에서 断切됨이 없이 토마스·아귀나스나 보나벤뚜라의 그것과도 같은 全神學體系로 제시돼 있다. 그러는 가운데 단떼는 그 時代相을 卓越안 手法으로 그려간다.
∙批判·順後의 龜鑑
이태리의 內紛派爭 悲劇, 執權層의 腐敗와 卑法, 敎會와 특히 그머리(敎皇 보니파시오 8世, 클레멘스 5世, 요안 22世 등)가 지닌 허물, 그들의 世俗的勸力追求 「시모니」, 「네포티즘」의 弊端등을 우리는 한눈에 볼수 있다.
그러나 단떼는 敎會와 宗敎的要求를 主張함에 있어서 그같이 大勝無双하였음에도 敎會의 最上權威앞에 언제나 믿음의 아들로서의 敬畏를 表하였으며 敎會의 가르침에 完全히 一致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狂信者도 「프로테스탄티즘」의 先驅者도 아니었다.
∙「神曲」의 意圖
그럼 到大體 詩人 단떼가 이 저승 三界의 幻視的通歷으로써 우리에게 말하고저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으로 地獄·煉獄·天國의 참모습을 그려보고자 하였던 것인가? 과연 그는 彼岸의 世界를 그렇게 상상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불행히도 「神曲」을 읽는 사람의 10중8·9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아마 「神曲」이 제시하는 그림과 幻想이 비록 뛰어난 것이고 뿐만아니라 그중 많은 詩篇이 世界文學上의 珠玉篇을 이룬다할 지라도 現代人으로서는 7백년전의 사람들과 같이 그 진실성을 믿을 수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단떼·알리기에리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말하고저하는 무엇인가를 가졌던가 여부를 알기위해서는 그 자신에게 그의도, 그의 작품의 극적인 意義에 대하여 물어보아야할 것이다.
이点에 대하여 단떼는 「天國」 篇의 一部를 바치는 뜻으로 그를 賓客으로 招待한바 있는 「뭬로나」의 칸그란데, 델라 스칼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간명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作品 全體의 목적과 또한 「天國」 編 「第三部」의 목적을 詭辯에 떨어짐없이, 짧게 말하면 現世人生들을 그 비참한 상태에서 끌어내어 행복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이 作品에서 그 전체와 그 모든 부분들의 尺度가된 哲學規範은 도덕과 윤리의 實踐的規範이기 때문이다.
思辯의 叙述을 위해서가 아니고 실천적 행위를 위한 자극으로써 전체와 個個의 것이 구상돼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作品의 主題를 두 가지 觀点에서 보아야 한다. 먼저 이를 字句的으로 알아듣고 다음으로 寓意的으로 해석해야 한다. 순수 字句的으로 取한다면 作品 전체의 의미는 死後의 영혼들의 狀態를 말하는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本作品은 사실 그것을 다루고 있고 全篇이 그것을 中心으로 圓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作品을 寓意的으로 해석한다면 作品의 主題는 人間自身이다. 여기 人間은 그 自身의 自由意思에 의해 공을 세우고 혹은 罪에 떨어졌으며 賞善罰惡하는 公義의 支配를 받은者로 나타난다』
∙主題는 「人間自身」
이 世界的 詩作品에 對한 著者自身의 해석을 완전히 알아들었다면 우리는 이 作品의 觀点과 깊이를 전혀 새롭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단떼는 저승의 詩人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神에서 絶對的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人間이 神에게 회두하여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 神과 永福속에 結合됨을 읊은 이승의 詩人이다.
그는 人間의 이같은 態度와 狀態를 永遠의 「스크린」에 投影시킬뿐이다. 그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 말함으로써 「베일」을 벗겨간다. 우리안의 無價値한것 즉 惡을 克服하기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얼마나 虛無한것인지 속속들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天主께의 「길」
그리하여 天主께로 向한 上昇의 길은 먼저 地獄, 어두움의 深淵으로 내려가는 下降의 길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여기서 惡은 그 假面을 벗기우지 않으려고 버틴다. 通歷者가 惡의 元兇인 「사탄」 自身이 天主를 가장 멀리떠나 冷酷히 자리잡고 있는 地獄 心臟部로 깊이 들어갈수록 길은 더욱 험해진다.
모든 假面的인 價値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卑劣과 醜惡을 더하는 허풍선이에 不過하다는것이 모조리 看似된 然後에 淨化가 시작된다.
倫理的自由로 이끄는 이 산길을 오르는것 역시 하나의 비유, 현세에 있어서 우리가 天主께로 돌아가는 길의 상장적인 서술에 불과하나 몹시 지리하고 힘든 것이며 그 시작에 있어 보속과 눈물이 많은 길이다. 超自然 즉 성총과 神秘의 문은 人間이 淨化의 頂上에 이르러 그의 完全한 道德的自由와 善을 다시 찾았을 때 비로소 열린다.
∙人間의 終着點
하늘나라를 向해 별과 같이 그속을 높이 높이 날으는 通歷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며 그것은 三一體이신 天主를 뵈옴으로 마친다.
이 빛의 나라의 光景역시 훌륭한 조형미술과도 같은 밝은 그림으로 展開돼 간다. 그리하여 地獄의 深淵에 있어 도덕적 不決断性과 中立性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일 밑창의 惡魔的인 憎惡에 이르는 그 모든 罪惡이 얼마나 可恐스럽고 自滅을 招來하는 것인지 通歷者의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驚惡을 永永 싹트게한것과 같이 여기 잃었던 善과 鬪爭, 惡한 術動과 怒情에서의 解放 역시 그 實情을 방불케하고 가슴조이는 그림으로 서술되어있어 人間이면 혼연히 이길로에 들어서지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모든 險難과 人間自身안에있는 墮落的衝動이 克服되고 肉體的인 것이 精神的인것, 아무런 무게도 없는 것으로 完全히 憂化된 다음 스스로를 성총의 손에 내 맡겼을때 그 즉시로 天主의 役事하심이 시작되며 그 안에서 모든 「事物의 原動力이시요, 사랑이신자」는 그로하여금 시위에서 떠난 날센 화살과 같이 빛의 세계, 즉 貴함과 强함과 아름다움과 善함의 모든 領域을 거쳐가면서 더욱더 변화되고 淨化되어 드디어는 天主親히 좌정하신 御座와 그 心臟에까지 도달하게 하였다.
∙神曲과 고탁 大聖堂
「神曲」은 흔히 그와 同時代에 불란서, 독일, 영국을 위주로 全歐羅巴에 聳立된 「고탁」大聖堂들과 비겨진다. 果然 이 大聖堂들과 같이 「神曲」의 百編외 詩歌역시 하나의 雄壯한 建築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神曲의 풍부한 詩的寶庫는 그 윤곽만을 묘사하기 위해서라도 이 짧은 紙面으로서는 不可能한일이다.
그것은 오직 단떼·알리기에리라는 建築家의 思想世界를 몇달 몇해를 두고 그 높이와 깊이에 이르기까지 探知해보려고 애쓰는 자에게만 可能한일이다.
끝으로 나는 위에서 말한 「神曲」의 韓國語 번역의 第2版이 같은 譯者의 손을 통해 「텍스트」 만이 아니고 序文과 더 상세한 註譯이 붙은 것으로 곧 出版되기를 희망한다. 왜냐하면 「神曲」은 非그리스도愛人은 말할것도 없고 信者일지라도 풍부한 註譯없이는 그 精神의 깊이와 아름다움의 断片밖에 理解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단떼와 우리 / 崔민순(聖家修女會지도 神父)
方言다듬어 伊語만들고 平和·敎會刷新·一致先覺·唱導
그는 人類의 永遠한 兄弟
異域서 숨진 사랑의 抒情詩人
『오 영광스러운 별들, 위대한 힘을 잉태한 오 빛들이 온통 나의 천재는 그 모두가 너희로 말미암은 줄 아노니 내 처음으로 「또스까나」의 공기를 맡을적에 죽을 모든 목숨의 어버이인 그것이 너희와 함께 나고 너희와 함께 몸을 숨기더니라』(천국편 22곡) 1265년 태양이 쌍자궁에 다다랐을 무렵 「훼린쎄」의 「아르노」강 언저리에서 천재 단떼는 「또스까나」의 공기를 마시며 태어났다. 그로부터 7백돐! 저 「파우스트」의 시인이 『「지옥편」은 지겹고 「연옥편」은 아리숭, 「천국편」은 지루하다』라고 말한것과는 정반대로 해가 거듭할수록 단떼는 그의 「神曲」과 함께 더욱 빛날 따름이다. 1965년은 바야흐로 제2차 「바티깐」 공의회가 무르익어가는 해! 세기적 감격 속에서 우러러보는 「또스까나」의 큰별은 오늘 따라 한결 찬란스럽기만 하다.
그가 일찌기 과거의 공의회에 존경을 표하면서 『공의회 안에도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라고 말하였듯이 주님이 그 안에 계시는 오늘의 공의회가 안팎으로 교회의 현대화를 마련하고 있지 않는가? 부르카르트의 말대로 『「훼렌쎄」가 세계 근대국가의 효시』라고 한다면 단떼가 근대 시인들의 첫째라함이 과장일수 없으리라.
그는 예언자이면서도 우리의 형제! 『세계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단떼를 바라보는 진실된 영혼은 그의 안에서 형제를 발견하리라.
그의 사상 그의 불행과 희망, 그 깊은 진지성은 동시에 진실된 영혼의 진지성에 말하여 주리라. 그들은 이 단떼가 그 형제임을 느끼고야 말으리라』(카를라일)
그렇다 그의 고민과 희망은 바로 우리의것, 교회의 아들로서의, 그의 위대한 이상은 「바티깐」 공의회로써 착착 실현 되어가고 있다. 교회자체의 내부 혁신, 갈린 형제들과의 대화, 교회일치의 기틀, 평신도 사도직의 적극참여, 전례용어의 국어화 등등….
- 그러나 보라 「그리스도여 그리스도여」라 외치는 많은자가 심판 때엔 그리스도를 몰랐던 자보다 그이한테서 덜 가까이 있으리라.
-「삐에로」는 은도금도 없이 그리고 나는 기도와 재소를 가지고 시작하였고 프란체스꼬는 겸손으로 그 모임을 착수했나니라.
- 이렇게 어느 것이든 그 시작을 보고 다음 지나온 계기를 살필양이면 흰것이 검게된 것을 너는 보리라.(천국편)
그리스도인이면서 그스리스도인이 아닌 위선자들, 수도회 본래의 정신을 떠나서 부패해간 수도자들, 심지어는 성 베드루의 후계자들 마저 황금과 권력의 유혹에 빠져들어 갔을때 단떼 처럼 교회의 내부혁신을 갈망하던 평신도도 드물었으리라. 더구나 자기 및 처자들의 오랜 귀양살이가 교황청의 속권남용에 연유되는 줄로 믿었을때 그는 영화같은 분통을 터뜨려 몇몇 교황들을 지옥과 연옥에다 집어넣어 버렸다.
그러나 교회를 가리켜 항상 「가장 사랑스런 어머니」 혹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의 신부(新婦)라 부르던, 그의 교회관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가 연옥의 순례에서 교황 아드리아노를 알아보고 그 앞에 즉시 무릎을 꿇자. 교황의 영혼이 『이렇듯 몸을 굽힘은 웬 까닭인고』하는 물음에 『지엄하신 존전에 서 있다 함이 불초의 양심을 찌르나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이었다.
인색한 한 개인의 죄업에는 절대 타협할 수 없었으나 교종직(敎宗職) 자체에 대한 존경만은 언제나 소홀함이 없는 그였던 것이다.
아직 교종의 무류권이 「로마」 성좌의 정의를 보기 훨씬 이전에도 단떼는 베드루를 『천주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그르칠수 없는 판관』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LINGUA NOS TRALATINA」(우리말은 라띤말)이라하던 시대에 「큰글」의 굴레를 벗어나 「상말」이란 제나라말의 터전을 닦아놓은 점에서 단떼는 또한 근대적이다.
때의 이태리 사람들은 「라띤」어를 국어로 삼고 이를 로마 제국의 오직 하나인 유업으로 받들었었다. 12세기쯤이면 이미 영국, 불란서 및 서반아에는, 저마다의 국민문학이 뚜렷하였음에도 이태리만은 뒤떨어져있었다.
단떼는 열네가지 방언들을 다룬 끝에 오직 「또스까나」말을 골라 이를 이태리 전토의 국어로까지 올려놓았다.
「상말」을 닦고 다듬어서 달콤한 꿈을 그의 LA VITA ZUOVA」(新生)에서 읊조리고 「상말」을 연장 삼아 숭고한 철학적 사색과 지식을 그의 「IL CONVIVIO」(향연)에다 담아보는 솜씨, 더구나 그 상말로 신학시 「신곡」의 대건축을 웅장미려하게 완성한 수법이야말로 어찌 이태리 한 나라의 말과 글을 한껏 빛냄에만 그치고 말으랴?
그는 독일어로 성서를 옮긴 루터의 선구자! 세계의 민족들이 제각기 제나라로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고 은혜를 비는 전례 생활에 있어서도 그의 「DE VULGARIE LOQUENTIA」(俗語論)은 「라띤어」의 장벽을 치우고 새로운 길을 터주지 아니 했던가.
끊임없는 정쟁, 피가 피를 부르는 싸움에서 평화를 열원하던 그의 마음도 우리의 마음이다.
어느날 그가 어느 어느 수도원을 찾아 문을 두드렸을때 문직이 수사가 그에게 『무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단다. 그의 대답은 외마디, 『평화를!』하더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강탄의 밤에 천사들이 노래하던 「평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인사말에 하려던 그 「평화!」 이 평화가 인간의 행복이며 인류문명의 목적 실현에 그 첫 조건이라는 것이 정치가로서의 단떼의 주장이었다.
세계가 하나의 국가 하나의 종교로 통일이 되어야 항구영원한 평화가 가능하다는 그의 「MONARCHIA」(帝政論)가 분열과,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신음하는 우리에게 얼마나 드높은 이상인가.
버트란드 럿셀도 말하지 않는가 『전쟁을 근본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유일의 수단은 여러 국민간의 모든 분쟁을 법률로 재결 할만큼 강력한 세계국가, 즉 초국가를 창조하는 일』이라고?
『또 다른 양들이 이 우리에 들지 아니 하였으니 나 마땅히 저들을 인도 하매 내소리를 들을것이요. 또한 한 우리 되고 한 목자 되리라하시고 모든이가 하나가 되기를』 염원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의 교회로 정신세계의 통일과 평화를 부르짖던 단떼는 현대의 과제인 「에큐메니즘」 교회일치를 우리 보다 앞서 깨달은 선각자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사랑의 시인! 사랑하다가 사랑하다가 그 사랑에 배신을 당한 나머지 참 사랑의 근본으로 되돌아간 시인 이었다.
베아뜨리체가 폴꼬 뽀르띠나리의 딸이었던 돈끼호떼의 둘시네아와 같은 가공의 인물이었건 어떻든 시인은 그를 짝사랑하였고 시인의 젊음을 맑게 지배하던 그는 한창나이에 죽고 말았다.
한편 또 단떼 처럼 그의 향국 「휘렌쎄」를 사랑한 시민이 없었건만 그이처럼 사랑을 거절당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조상 깍치아귀다가 『너 남의 빵이란 얼마나 쓰거운 것인지, 남의 집 사다리로 오르내린다함이 그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아볼수 있으리라』고 말하던 것과 같이 사형선고를 받은채 나그네살이가 19년이나 되었고 그가 귀양살이를 끝마친 「라뭰나」의 묘비명이 오늘도 『사랑에 인색한 어미 「휘렌쎄」가 낳은 단떼 조국의 경계에서 추방되어 여기 묻히다』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그토록 사랑하던 그의 「휘렌쎄」는 끝끝내 배반과 포악으로써 그에게 갚음을 하였었다.
열렬한 두가지 사랑의 댓가로 환멸과 절망만을 맛보게된 단떼였으나 그것은 오히려 그 자신에게나 우리에게 있어 극히 다행한 일이었다. 시들어간 아름다움 베아뜨리체는 어느듯 단떼를 「신곡의 시인」으로 환생케하였고 희망 끊어진 그의 향국은 그로 하여금 진정 미워해야될 지옥을 거쳐 별에서 별에로 올라 드디어는 성삼위의 영광속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다.
『아직도 올바른 길잃고 헤매는, 우리! 우러러 드높이 치어다. 보지않으려는가 유성의 빛살을 입은 뫼뿌리들이 사람들을 온가지길로 인도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