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와 現代思潮(현대사조) - 墺地利(오지리) 쾌니히 樞機卿(추기경) 講演抄(강연초) (1)
音樂(음악)의 소리 다시 傾聽(경청)
敎會觀(교회관) 好轉(호전)
現代無神論(현대무신론)의 誤謬(오류) 認識(인식)하고
발행일1966-02-13 [제506호, 2면]
1965년 12월 8일로서 역사적 공의회는 종결되었다. 그러나 주교들편에서 본다면 이는 곧 출발이니 공의회의 쇄신의욕과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칠 그 결의를 주교들은 이제 각 교구 및 본당에 옮겨 실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의회 종결은 교종 바오로 6세의 말과같이 과거를 회고하기 보다 미래를 전망케 하는 것이다. 모든 공의회는 역사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교회의 영역을 넘어 깊이 세계사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공의회가 현대세계 즉 현대의 정신세력과 어떻게 대결하고 있는지 약술하고자 한다.
이같은 시도에는 두가지 점이 중요하며 그것은 즉 일반사회 여론이 어떠한 역할을 공의회에 대하여 하였는지, 또 공으회가 교회내와 세계안에 조성한 분위기는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계여론은 공의회 시작부터 적극적이었고 때로는 공이회의 본취지를 이탈하여 지엽적 문제에 치중한 폐단도 없지 않았으나 광범한 보도기관을 동원해주었다 또한 세계여론을 통하여 공의회와 세계간의 대화분위기는 기대이상으로 조성되었다. 공의회에 대한 세계여론의 이와같은 적극적인 태도는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교회에 대한 세계의 감정이 호전되어 간데 기인할 것이다. 「나치즘」 혹은 공산주의의 교회박해 인간의 영적 정신적 자유를 위한 교회의 투쟁, 그 피의 증거를 비롯하여 모든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홀로 교회만이 굳건히 서있다는 사실 등은 교회에 대한 세계의 신뢰를 증가시켰다.
다음으로 공의회가 교회와 세계 안에 조성한 분위기 역시 의미심대한 것이다. 세계는 다시금 교회와 같은 오랜 전통이 묵은 기구가 현대와 현대인생에 대하여 과연 결정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진 교회가 될 수 있는가고, 묻게 되었다. 이같은 설문을 비종교적 현대세계가 제기하였다는 자체가 이미 뜻깊은 것이며 이는 주로 그동안 세계 혹은 교회 내에서까지 몰이해에 부딪치면서도 쇄신된 교회의 모습을 마음 속에 품고 세계를 향해 문을 연 교회의 「비전」을 시현한 저 남녀 평신자 신부들의 공덕일 것이다.
그들은 신천지(新天地)의 개척자들이었으며 그중 많은 이는 도중에 좌절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희생과 업적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공의회는 정신적으로 획일화된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성신의 자유를 과시했다. 공의회에서는 아무런 「타부」도 배후 조종도 없었으며 어떠한 문제도 제외 또는 무시된 바 없고 어떠한 인간의 영적 혹은 육체적 곤궁도 도외시된 바 없다.
가장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상반된 입장간에 격렬한 토론이 전개된 적도 잇었으나 그때문에 공의회의 일치가 깨질 위험에 놓였던 바 없다. 오늘날 정신적 정치적 일치와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세계에 대하여 공의회는 좋은 본보기였으며 자유를 위해 자유를 유린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세계에 증거하였다. 현대의 회의론자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무신론자까지도 이같은 정신의 자유를 증거하는 교회는 내적으로 얼마나 강한 힘을 지닌 교회인가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란 외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적 결함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세계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정신세력의 부정적면과 긍정적면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공의회라는 망루(望樓)에서 뚜렷이 파악할 수 있는 부정적 정신세력 중에서 첫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무신론이다. 과거에도 종교적 무관심과 무신론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무신론은 서구(西歐)의 다원주의(多元主義)사회 위에서 「매스메디아」를 동원하여 또한 19세기 및 20세기의 반(反) 그리스도교적 · 세속주의적 정신조류를 배경으로 공공연하게 그리스도교에 도전해오고 있으며 이를 시대착오희 낡은 것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인도주의(人道主義)를 고창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무신론이라는 주의 아래 어느 정도의 반(反) 교회주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사랑의 불이행(不履行)에 대한 반항, 또는 거짓 신관(神觀)이 내포돼 있는지 살펴보지 않겠다. 우리는 또 무신론이 퇴패된 문화의 증표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이 자리에서는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같은 문제를 문화사가 제기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무신론은 그것이 실천적인 것에 불과하든 혹은 철학적 전투적 주의사상이든 그리스도교에 도전해오는 하나의 큰 정신세력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이다.
현대의무신론은 포이얼바흐, 맑스, 니체 혹은 레닌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으며 서구세계에서는 샤르트르, 까뮤들에 의하여 새로운 복음과 같이 선포되고 있다. 이같은 무신론은 아직은 우세하고 있으나 이미 회의와 허무주의의 암명을 던지고 있으며 특히 젊은 세대에는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인도주의적 그 이론은 듣기엔 아름답다. 하지만 일상생활면에 나타나는 현상은 실로 침울하다. 이런 무신론의 결과로 회의와 허무주의에 떨어진 젊은 세대가 내일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는 벌써 오늘의 일간신문에서 읽을 수 있다.
공의회는 결코 무신론이 정신세력임을 무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거듭 그것을 지적하였다. 공의회가 오랜 숙고끝에 주는 답은 신(神) 없이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고 인간은 단지 사회적 존재만이 아니라 동시에 종교적 존재라는데 입각해 있다. 인류역사는 우리에게 종교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 인간의 내적 본질에 속하는 것임을 뚜렷이 말해주고 있다. 공의회가 다룬 것은 직접 신의 존재증명은 아니었고 계시진리의 구원의 효과, 천주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즉 천주의 백성, 종교자유, 오늘의 세계와 교회의 대화 등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신자 비그리스도교신자를 막론하고 오늘의 세계는 공의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예기했던 이상의 반향을 보였다.
심지어 공산세계로부터도 20세기의 종교의 생동력에 대한 놀라움이 표명되었다. 이 모든 것은 무신론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근원이 깊이 영원하신 하느님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언제나 이 근원에 닿을 때 진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공의회는 이런 사실을 증거하였으며 이 한가지만으로도 의미심대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무신론이 하나의 정신세력의 표적이긴 하나 그정도는 한정된 것이라고 하였다.
공의회는 무신론을 교회의 교리와 생활의 정화를 촉구하는 하나의 도전으로 감득하였고 그때문에 신적(神的)인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흐리게 하지않고 오히려 더욱 밝게 반영할 수 있게끔 전력을 다하였다. 이같은 무신론의 도전을 우리는 천주의 구속사업에의 이바지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뭏든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계속 【KNA 特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