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아홉살에 迫害(박해) · 獄(옥)살아 눈멀고
열네독에 가득했던 葉錢(엽전) · 田畓(전답) 沒收(몰수) 당해
광속에서 은신하며 지내던 閔(민) 主敎(주교) 奉養(봉양)한 朴氏婦人(박씨부인)
발행일1966-02-20 [제507호, 4면]
1866년의 대원군 박해는 많은 눈물겨운 「에피소드」를 낳았지만 우리 후손들에게 그 백분의 일도 전해오지 못하고 있음은 매우 유감스럽다.
충청도 「함박실」이라는 마을에 살던 교우 박상호(朴尙浩)씨의 아들로 태어난 박래원(朴來元 · 방지거)씨는 9세때 예산의 형제바위라는 고개에서 부친과 함께 잡혔다. 많은 땅과 재산을 가진 것을 알게된 해미구수는 계획적으로 땅을 몰수하고 재산까지 빼앗아 벼락부자가 되려고 했으며 그 당시 사용하던 엽전을 열네독에 가득 가득 채워서 땅 속에 묻은 것을 알아채고 파내기 위해서 포졸 10여명과 당나귀 일곱마리를 끌고와서 밤새도록 삼줄을 꽈서 엽전을 뀌어 가지고 새벽에야 도망갔던 것이다.
그후 해미군수는 갑자기 큰 부자가 되니 군수자리도 그만두고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박상호씨와 그의 아들을 옥에서 내어 놓게 되었다.
부친은 감옥에서 나온 후 한달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어릴때부터의 심한 옥고로 눈이 나빠진 박 방지거씨는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앞을 잘 보지 못해서 고생하였지만 이 옥중의 선물을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열심한 신심생활을 계속했다.
방지거씨는 장성하여 권 아뽈니오 여사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부인은 안동 권씨로 매우 총명하고 신덕이 두터운 여인이었다. 가정을 가졌으면서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다가 1880년에는 황해도 장연의 태탄장터 근처에 있는 배마당이라는 교우촌에 자리를 잡게되었다.
때마침 민 신부님(뮈뗄 · 나중에 주교로 승격되었다)이 입국하게 되니 집이 모시고 밤낮으로 그 시중을 들게되었는데 낮에는 나무광속에서 하루종일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민 신부님을 나무광 속에 숨겨놓고는 밭에서 일하는 척하면서 망을 보았으니 그 마음 졸입이 어떻하였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처음으로 한국에 발을 들여놓은 민 신부님은 한국말을 알 까닭이 없었다. 종일 갇히운 생활에서 밤이되어야 해방되는 민신부의 안타까운 처지를 모든 교우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어둠 속을 더듬으면서 민 신부님은 총명하고 신덕이 두터운 권 아뽈니오 여사의 치마자락을 잡고 나무광속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장독입니다.』
『그것은 고추장이고, 이것은 된장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말보다 먼저 민신부님은 한국의 풍습을 배울 수가 있었다.
어둠이 천지를 뒤덮으면 민 신부님은 한발자국 한발자국 옮겨디디기에 무척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지만 한국의 남녀 7세 부동석이 뿌리박은 사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권 부인의 손을 잡을 수도 없고해서 무척 더듬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권 부인의 시앙은 곧 동리 사람들에게도 모범을 주었으며 민 신부를 날카로운 감시속에서 보호할 수 있었던 그 기지는 남성들도 따르지 못하는 것이었다.
낮에는 하루종일 갇히운 생활이었으나 밤이되면 동리에서 모여드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지도하기에 여념이 없는 신부의 생활이 계속되어갔다. 박 방지거씨와 부인 권 아뽈니오 여사이 인간성은 곧 민 신부에게 한국인을 대표한 인간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현재 아현동성당의 주임인 박희봉 신부님은 할아버지인 박 방지거씨와 할머니인 권 아뽈니오 여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추억하고 있었다.
『나의 신심생활은 어릴때 할머니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음이 사실이지요.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서 적어도 3시간씩은 기구를 바치는데 어릴때 그저 무릎을 꿇고 앉아서 경문을 따라 외우던 생각이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아요』
대대로 내려오던 많은 재물을 한꺼번에 빼앗기고 또 눈까지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불편이 있었지만 조금도 불평함이 없이 생활한 그 열심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웅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