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随筆
너의 취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첫째가 술이 아니라 여행이라고 했었고 또 사실 그러했었지만 그것은 오랜 옛 일이요. 10여년, 아마 근 20년 그런 짓을 하지 못하고 지냈던 것이 요즘 복이 터졌던지 두 군데나 여행을 했다.
大田은 4월 24일.
대전일보사가 벌이는 어린이 글짓기, 그림 그리기, 글씨 쓰기 大會에 글짓기 심사를 보아달라는 청을 받고 돈·보스코 朴洪根 선생과 동행했다.
나는 그런 일로서 지방에까지 간적은 없다.
취미로의 여행은 우리 나라에서는 사치에 속하는 일이요. 또 지나치게 신경을 상하게 해서 오히려 불쾌하기가 시웁다는 생각으로 여행을 꺼려했기도 했지만 어린이 글짓기 꼬느기로 여행을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전은 주최하는 대전일보사장 南貞燮씨는 내가 관계하는 「마을문고 진흥회」의 理事라고는 하지만 그 뒤에서 아예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나타나는 일도 없이, 본부의 사무실, 서울도 종로 복판에 있는 방세가 금값보다 비싼 방을 무료로 빌려주었었고 급한때면 돈도 선뜻 내주었다는 말을 당사자에게 들은바 있었기에 그분을 만나게 될것을 크게 기대하는 마음으로 대전행을 승낙했던 것이다.
크게 기대했다는 일은 고문에게 대전에도 「어린이 헌장비」를 세워 주기를 권하고 싶었고 그러면 어쩌면 선뜻 응해주지나 않을까 하는 일이었다.
「어린이 헌장비」를 세운다고 해서 그 고장 어린이가 곧장 복을 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지나다니는 어른들의 눈에 그 글귀가 눈에 뜨이게 되면 차차로 어른들이 어린이를 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바로잡힐 것을 기대하는 마음에서이다.
1957년 제23회 어린이날에 정부에서 공포한 「어린이 헌장」은 대구의 뜻있는 분들이 비를 만들어서 다음해 어린이날에 達城公園에 세운것이 처음이었다. 그 다음해 1959년 어린이날에는 서울 경원과 전라남도 光州에 섰고 釜山에는 용두산공원에 세워져 있다. 그러니 대전에도 세워졌으면하는 욕심에서였다. 유성온천 만년장에서 남사장을 만나서 그런 말을 꺼냈더니 『하죠』 한마디 답이었다.
어처구니 없도록 쉬움게 성사가 되었으니 내일의 글 꼬느기는 젊은 분들께 맡기고 그날로 돌아올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내일이 주일이라 새로 선 대흥동성당, 명동대성당 보다도 조금 분명히 크다는 대성당에서 미사 참례를 하고 덕이 높기로 이름있는 오기선 신부님을 뵈옵는 영광도 지니고 싶었고 신문사 분들도 쉽게 놓아주지는 않았다.
유성온천관광 「호텔」 호화한방에서 두밤을 편히 쉬고 이런 환경에서는 소주보다 고급양주라야 어울리니 고급양주를 오래간만에 마시고 즐거운 날을 보냈다.
오기선 신부님은 대전 장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형편이었다.
자동차 안에서도 다방에서도 온천에서도 신문사에서도 그분의 이름이 넘나들었다.
대전 사회를 위해서 몸 바쳐 일하시는 분으로, 무슨 학교 기성회 일로 누구누구를 아들딸같이 돌보아주신 일로 이건 뭐 대전의 터주대감(城主) 같은 위치에 있는것 같아서 나는 그분을 뵈옵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괄괄하고 도도하고 내 구두에 입 맞추면 천당 간다는 식이 아닐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주일 아침차를 달려 8시 미사에 참례하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조반을 마치고 신문사서 심사를 보고 3시가 지났다.
신문사 차는 숙소인 유성온천으로 데려가는 줄 알았더니 성당앞에 내려놓았다. 일행은 신문사와 대전분 세분과 우리 두 사람이었다.
오기선 신부님은 괄괄하지도 도도하지도 않았다.
여느때 얼굴이 웃는 낯임을 짐작하기에 넉넉했다. 엄하기보다 자애가 드러나보여 친근감이 앞서는 인품이었다.
초면이지만 옛친구를 맞이하듯 대해주셨다. 책이 가득찬 골방같은 거치에 콩나물처럼 여섯이 거의 무릎을 맞대고 차를 마신 시간은 온종일 글짓기 꼬느기에 피로했던 심신을 활짝 풀어주었다. 신문사 사람- 문화부장이 다짜고짜 데려다주지 않았던들 손해볼뻔 했다고 생각했다.
26日 서울로 돌아왔는데 28日자 大田日報는 「어린이 헌장비] 건립운동을 벌였다고 1면에 큼직한 社告를 실리고 있었다.
春川은 5月 4日.
제43회 어린이날인 5월 5일에 어린이 헌장비 제막식이 있다고 해서 江原日報社의 초청을 받았다. 사장이 「어린이 헌장비 건립추진 위원회」 위원장이었다.
해질 무렵에 춘천에 닿아 昭陽江변의 산수정이란 집에서 도지사 시장 교육감 신문사장 등 여섯 명뿐의 아늑한 자리는 강 건너 산 너머로 지는 노을이 아름다웠다.
도청 뒤에 자리잡은 관광「호텔」은 유성온천관광「호텔」에 비할 바 아닌 호화판이었다.
5월 5일, 아침 여섯시반 나는 竹林동성당의 미사에 참례했다.
거리는 어린이날 일색이었다.
종합 운동장에서는 「어린이날 체육대회」가 벌어져 시내 여덟 국민학교 아동과 학부형이 모여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두 국민학교 아동들의 鼓笛隊는 分列行進도 멋지게 했고 千여명의 「마스께임」 다음에 어머니와 아이, 그러니 1·2학년 아동과 그 어머니가 손을 잡고 동그라미 셋으로 모여 민속무용을 보여주었다.
열한시에는 鳳儀山 기슭에서 「어린이 헌장비」 제막식이 거행 되었다.
「콩크리트」에 윤을 내고 놋쇠판에 헌장문을 양각해서 붙인 회고 높은 헌장비는 멀리 南春川廨에서도 똑바로 바라보였던 그것이었다.
춘천 시장은 어린이 헌장비를 세우게되어서 춘천에 없었던 공원을 마련하게되었다고 말했었다. 어린이 헌장비 둘레에 공원을 만련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제막식에서 申喆均 市長은 헌장문을 낭독했고 朴敬遠 도지사와 金東根 교육감 다음에 축사를 하게된 나는 간단한 축사끝에 서울서 정성들여 마련해 가지고 간 선물을 박도지사에게 증정했다. 이런 까닭이 있다.
작년 늦가을에 나는 한국일보사의 초청으로 설악산 탑승을 간 일이 있었다.
11월 2일 설악산 飛仙巖까지 오를 때에 나는 박도지사에게 넌지시 춘천에도 「어린이 헌장비」를 세워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말했던 것이다. 박도지사 전에 경상북도 도지사로 있었던 분이라 대구시 달성공원의 어린이 헌장비를 본일이 있었을 뿐 아니라 어린이에 대한 관심도 상당한 분이었다.
높은 산에 오르는 홀가분한 몸차림이었는데도 박도지사는 조그만 수첩을 꺼내더니 몇자 적어넣으며 『하죠』하고 선뜻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춘천에서 그런 일이 시작되는 것 같지는 않은채 해를 넘겼다.
3月도 하순께 편지를 받았다. 『보고합니다』로 시작된 글귀와 신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신문지는 큼직한 광고였다. 「강원 어린이들은 강원 어른들이 보살피자」라는 「어린이 헌장비 건립추진위원회」의 광고였다. 위원명단이 강원도내 각군에 걸쳐서 2백명이나 되었다. 3월 12일자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5월 3·4일에는 벌써 준공되어 5일 어린이날에 제막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니 그간 불과 50여일 밖에 안되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의 추진력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빨리 세워질 수가 있으랴하는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의 선물이었다.
나는 가면서 오면서 6년전 서울 창경원에 「어린이 헌장비」를 세울 때 고달팠던 일이 생각나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웃음이 솟기도 했다.
창경원 水亭옆, 지금은 어린이 놀이터 뒤라고 해야 알기 쉬움겠지만 그 자리에 그것을 세우는데 거의 1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고 하도 일이 되지 않아서 臺石 밑에 아무도 모르게 고상을 묻고 기구하기를 그치지 못했던 것이다.
馬海松(?童文學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