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가 提示(제시)한 길로… 刷新(쇄신)되는 敎會(교회)들 ⑥
獨逸=難關(난관)은 自由(자유)와 規制(규제)의 調節(조절)
全體(전체)로는 公議會(공의회) 終結(종결) 待期(대기)
教會(교회)의 門戶(문호) 開放(개방)코 低開發國(저개발국) 經濟發展(경제발전) 布教事業(포교사업) 援助(원조)
발행일1965-06-13 [제474호, 2면]
【NC 特信】 독일 가톨릭교회안에는 공의회의 결과로서의 정신의 발효(發효)가 있다. 그러나 마치 누룩은 먼저 국부적으로만 익어가듯이 교회생활전반이 공의회를 통하여 고르게 쇄신 돼가고 있는것은 아니다.
뿐만아니라 공의회 초기에 일반적으로 느꼈던 도취감도 지난 수개월 전부터는 오는 가을에 있을 공의회 제4회기, 즉 최종회기의 결말을 기다리는 침착한 태도로 바꾸어져 있다.
공의회결과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독일가톨릭신자들의 그들의 주변사회에 대한 각성이 현저히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40년전 비스맑크 재상(宰相)에 의해 야기된 소위 「문화투쟁」에 연유된 고립관념(孤立觀念)은 사라져가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와 신자들의 새로운 문호개방은 인류세계의 문제, 특히 저개발국가들의 난(難) 문제에 대한 능동적이요 동정적인 의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같은 경향은 어디서보다도 그러한 나라들의 사회경제발전사업 원조증가에 있어 잘 볼 수 있다. 해외의 경제발전과 구제사업 원조를 목적하는 사순절 모금운동 「미세레올」은 1959년에 시작됐으며 이는 바로 요안 23세 교황이 공의회소집을 공포한 직후의 일이다.
또한 라띤·아메리카의 교회사업, 그 가운데서는 사제와 전도사 양성을 도우고 있는 장림절 모금운동 「암붸니앋」은 공의회개최 1년전인 1961년에 발족하였다. 공의회가 시작된 이래 이같은 운동에 있어서의 신자들의 이해와 협조정신도 크게 증가됐으며 「미세레올」은 첫해인 1959년에 이미 8백90만불(弗)이나 모금하였고 공의회이후에 있어서는 해마다 그 실적을 올려 평균 1천1백만「달라」(弗)라는 거액을 내고 있다. 장림절 모금운동 「암붸니앋」은 첫 해인 1961년에는 5백70만「달라」가 갹출되었고 1962년에는 6백60만「달라」, 1963년에는 8백60만「달라」 1964년에는 1천4백만「달라」로 비약적으로 증가돼 갔다.
서독(西獨)은 물론 날로 더 큰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총수 2천7백만인 독일가톨릭신자들이 「미세레올」과 「암붸니앋」에 바친 헌금은 1인당 수입증가와 비례하여 훨씬 더 높은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이같은 전국적인 모금운동에 덧붙여 각 교구는 전교지방의 어려운 교구들을 도우기 위한 특수 원조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여기서 갹출된 원조액수는 「미세레올」이나 「암붸니앋」의 그것보다도 더 큰 금액이다.
독일가톨릭신자들이 이같이 거대한 경제적 원조를 주고있는 것은 공의회를 통해 더욱 박차를 가한것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식돼 있다. 세계 도처에서 온 주교들과 만나게됨으로 독일주교들은 빈곤의 현실을 보다 더 뚜렷이 파악할 수 있었으며 이들은 다시 자기들의 교구민들에게 보고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을 일으켰다.
뿐만아니라 「로마」에서 맺게된 친선이 계기가되어 저개발국에서 온 많은 주교들이 독일로 초대까지되어 독일신자들에게 그들의 곤경을 직접 술회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하여 독일에서는 어느 본당신부가 자기 본당을 위한 재정에는 신자들의 간섭을 많이 받으나 전교지방원조에는 반대로 신자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같은 예민한 사회의식과 함께 공의회는 이나라 전체에 대한 종교적 활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58년 요안 교황이 선출되기전까지는 국내 중요한 일간신문들은 종교에 대한 소식을 한 주간(週間) 것으로 모아 짧게 보도하고 그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공의회가 시작된 후부터는 종교에 대한 관심은 점차로 증대되어 모든 일반신문들이 다 전세계의, 교회소식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같은 일반신문들의 태도 또한 간접적인 효과를 발휘하여 가톨릭신문들은 일반신문들과 대등한 무게를 가지기 위해서라도 현대화 되지않을 수 없었다.
공의회는 천주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와 그의 사명활동에 있어서의 평신도의 본질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문제는 독일가톨릭교회 내에서 도미해결의 문제이다. 평신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가톨릭계통학교에서 교리교사로 채용돼있고 기타 가톨릭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행정의 중요한 자리는 실제로 성직자들에 의해서만 점유돼 있다. 지금까지 있은 주목할만한 변화로서는 수개월전 「프라이불그」 대교구의 가톨릭 「액숀」의 책임자로 있었던 신부가 한 평신자로 대치되었다는 것일 것이다. 최근에는 「아욱스불그」와 「마인쯔」의 두 주교들이 평신도교구 평의원을 임명했으나, 아직은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다른 한편 사제로서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완전히 과거의 일이 됐다. 공의회를 통하여 정치는 평신도의 활동분야이고 성직자의 그것이 아님이 뚜렷해졌다. 독일에서는 과거에 성직자가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신부는 단 한명도 없다.
독일 가톨릭교회는 전례개혁의 선두를 걸어왔다. 그러므로 공의회에 의해 제시된 전례개혁은 이 나라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말하여 공의회는 독일 가톨릭교회를 훨씬 더 개방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의 난관도 없지않으며, 공의회에 의해 자극된 새로운 자유 관념은 『독일교회는 아직도 너무나 물질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권세를 추구하고 사목사명에 힘을 경주하지않으며 봉사하는 사명에 충실치 못하다』는 등의 비난을 표면화시켰다.
현재 독일교회의 분위기는 수개월전부터 공의회의 마지막 회기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공의회가 그 종결과 더불어 교회 장래의 길을 구체적인 규제(規制)로써 밝혀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보통수준의 신자들은 공의회가 십계명과 같이 명확한 규제를 내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공의회동향은 이와는 달리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강조하고 많은 제한과 금령을 폐지하는 편이다. 이것은 독일가톨릭신자들을 위해서는 어떤 의미의 조정(調整)을 요구하는것이 아닐 수 없다. 얼마만한 세월이 여기에 요하게될지 아직은 누구도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