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깐」 공의회 교령(敎令)들중 교회헌장과 함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 『현대세계내의 교회사목헌장』은 최고의 문명발전을 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심각한 위기의식에 고뇌하고 있는 현대세계내에서 현대의 인류세계를 구하기 위해 교회가 어떻게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현존시키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그 사목적 지침을 제시하는 동시에 오늘의 교회의 좌표(座標)와 미래상(未來像)을 밝히고 있다. 이번 「바티깐」 공의회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교회를 먼저 내적으로(ECCLESIA AD INTRA) 관찰하고 동시에 외적으로(ECCLESIA AD EXTRA) 관찰한다는 두가지 원칙에 입각하여 다루었다. 여기 게재된 헌장은 바로 후자(候者)의 입장을 대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의회 동안 「제13의안」으로 알려졌었고 그것이 취급한 문제들이 현대의 모든 문제, 인간 · 결혼 · 인구 · 산아제한 · 빈곤 · 기아 · 무신론 · 기타 현대사조 · 경제 · 정치 · 문화 · 핵무기 · 전쟁과 평화 등 온르의 인류사회의 제반문제였음으로 해서 전세계의 관심을 모른 것이었다. 교회가 왜 이같은 문제들을 심각히 생각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과 세계를 구하는 것이 교회의 실존적 의미요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란 세계와 인류밖에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요 현실에 사는 인간들로 구성된 천주의 백성이요 인류세계 안에 인류세계와 함께 살고 또한 그 한 부분으로써 인류세계와 운명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 93개 조항으로 구성된 헌장은 전언(前言), 현대의 인간상황을 밝힌 긴 서론(序論)을 앞세운 후 본론을 다시 2부(部)로 나누어 그 제1부에서는 「교화와 인간소명(召命)」. 제2부에서는 「현대의 특히 긴박한 제문제」를 다루고 있다. 본지(本紙)는 편집관계상 위선 그중 일부분을 게재하고 다름 3우러말 호(號)에 나머지 전문을 싣게될 것이다.
■ 서문
- 교회와 인류의 긴밀한 관계
【1】 현대인들의 희비애락(喜悲哀樂), 더우기 가난한 자들과 고통중에 있는 자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희비애락이다.
사실 참된 인간이면 이같은 반향을 누구나 마음속에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자단체라는 것은 현세인간으로써 즉 그리스도 안에 모인 사람들로써 구성돼 있으며 이들은 성신의 인도로 성부의 나라를 향해 전진해 가며 만민에게 전달할 구원의 「메시지」를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단체는 인류 및 그의 역사와의 현실적인 긴밀한 유대를 인식하고 있다.
- 교회의 대상은 전인류
【2】 (ㄱ)바로 이런 이유로서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교회의 신비를 더욱 깊이 밝히려고 노력했고 이제 지체없이 교회의 자녀들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고자 하며 만민에게 공의회는 대세계 안에 있어서의 교회의 존재와 행동을 여하히 간주하는지 설명코자 하는 바이다.
(ㄴ)이같이 공의회는 그 모든 관심을 인간세계 즉 전체 인류가족과 함께 이 인류가족이 그 속에서 생존하는 세상만사에 집중시키고 있다. 이 세계는 인류역사가 실연(實演)되느니 무대이다. 그 무대위에서 인간의 온갖 활동, 그의 패배(敗北)와 그의 승리의 극이 전개된다.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볼 때 이 세계는 창조주의 사랑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죄악으로 인하여 노예상태에 떨어졌었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로써 악마의 권세를 물리치고 세계를 다시 구원했으며 세계로 하여금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변혁되고 그 목적들 달성하게끔 하였다.
- 인간에의 봉사를 위해
【3】 (ㄱ)한편 그 자신이 발견과 힘을 경탄해 마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불안과 마음으로 현재의 세계발전의 귀추, 우주안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역할, 인간 개개인과 그 집단의 활동의미, 사물과 인류의 궁극의 운명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결합된 천주의 모든 백성의 신앙을 증거하고 인도하면서 공의회는 이 천주의 백성도 속하는 인류가족 전체와의 유대, 이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명하고자 하며 이는 세계과 더불어 상술한 바와 같인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대화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설명하며 성신에 의하여 인도되는 교회가 그 창설자로부터 받은 구원의 힘을 인류에 봉사하기 위해 쓰는 것보다 달리 더 훌륭한 길이 없는 것으로 확신한다.
사실 구원받아야 할 것은 인간이요, 쇄신돼야 할 것도 인간사회이다.
여기서 인간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전일적(全一的) 인간을 뜻하고 영혼 육신, 마음과 양심, 생각과 의지를 가진 인간이며, 따라서 우리의 이 서술(敍述) 전체의 중심 「테마」 역시 인간이다.
(ㄴ)그 때문에 공의회는 인간의 고귀한 소명(召命)을 선언하고 그 인간안에 신적(神的) 종자(種子)가 심어져 있음을 천명하면서 이 소명에 부합하는 보편적 형제애를 복구하기 위해 교회의 진지한 협조를 인류에게 제공하는 바이다. 교회의 이와같은 기도(企圖)는 어떠한 속세적 욕망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며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하기 위해, 봉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사업자체를 위로자이신 성신의 감도에 분달되어 계속코자 함이다.
■ 현대세계의 인간생활
- 희비(喜悲)의 세상
【4】 (ㄱ)이같은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는 항상 시대의 표지(標識)를 검토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는 의무를 지고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각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써 현세와 후세인생의 의미, 인간 상호관계에 대한 인간의 구원(久遠)의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와 그 기대, 그 갈망, 그 빈번한 극적인 성격을 인식하고 이해해야 한다.
(ㄴ)오늘날 인류는 역사상 새로운 세대에 살고있으며 이는 급격한 변화를 기록하고 있고 이 현상은 점차로 전세계에 확대돼 가고 있다. 이같은 변화는 인간에 의해 즉 그의 지혜와 그의 창조적 활동에 의하여 자극되어 인간자신과 개인적 및 집단적 인간의 판단, 그 염원 및 사물을 비롯하여 인간들에 대한 그 사고와 행동양식에 다시 반영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미 우리는 오늘날 이런 사회적 문화적 변천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됐으며 이는 인간의 종교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ㄷ)무릇, 모든 성장(成長)에는 언제나 위기(危機)가 수반되며 그와같이 이 변화에 있어서도 역시 심각한 난관이 없을 수 없다. 그리하여 오늘날 인간은 한편 그 자신의 능력을 전에없이 넓게 확장시킬 수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힘의 주관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인은 어느때보다 자신의 존재의 가장 심오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더욱 깊이 파고들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가끔 스스로에 대하여 자신을 갖지 못한듯 하다. 한편 인간은 점차로 또한 더욱 뚜렷하게 사회생활의 법칙을 발견해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에게 지침이 될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ㄹ)과거 어느시대에도 오늘만큼 인류가 물질적 번영, 방대한 자원과 경제력을 누린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인구의 상당수는 아직도 기아와 빈곤으로 신음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또한 문맹자(文盲者)로 남아있다. 또한 현대인만큼 자유에 대한 생동적인 의식을 지녔던 자들도 일찌기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현대에는 동시에 새로운 노예(奴隸) 형태가 사회적으로나 시리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나아가 오늘의 세계는 강력한 세계적 일치의식과 모든 인간간의 상호유대가 필요하다는 의식이 높아가고 있가. 그러면서도 세계는 정치, 사회, 경제, 인종과 이념 차이의 분쟁으로 인한 힘의 대립으로 분열돼 있으며 전세계를 파멸시킬 수 있는 전쟁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사상의 교환이 증가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개념을 표현하는 말 자체가 이념의 차이로 인해 서로 전혀 다른 의미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드디어 인간은 보다 더 완전한 세계조직을 추가하는데 힘을 쓰고있으나 이같은 발전에 부합하는 정신적 발전이 병존하고 있지 않다.
(ㅁ)이처럼 현대상황이 복잡다단하므로 현대인들의 상당수는 항존적(恒存的) 가치를 분별해내기가 극히 곤란하며 그들은 동시에 이런 가치를 현대문명의 발전과 어떻게 체계화(體系化) 시킬 바를 모르고 있다. 불안에 사로잡힌 그들은 희망과 근심이 엇갈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현대세계의 발전의 귀추를 주시하고 있다. 현대의 문명은 인간에게 도전해오고 있으며 보다 더 그 해답을 강요하고 있다.
- 급격한 변화
【5】 (ㄱ)오늘의 정신적 불안과 생활조건의 변천은 전체적 변화로써 정신교육면에서는 수학, 자연과학, 인문과학 등이 주도권을 잡게되고 실천면에서는 과학의 소산인 기술이 주도권을 잡게되었다.
이 과학적 정신은 과거와는 다른 문화상태와 사고(思考) 방식을 만들어냇다.
또한 기술의 발전은 온 땅의 모습까지 변모시켜가고 있으며 이미 우주정복에 나서고 있다.
(ㄴ)시간의 영역에 있어서까지 인간지성은 어느정도 그 지배권(支配權)을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과거는 역사적 지식으로, 미래는 계획과 설계(設計)에 의해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발전으로 인간은 그 자신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유효적절한 기술을 이용함으로써 사회생활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고 그 앞날의 인구증가를 예견하고 이를 조절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ㄷ)역사의 움직임은 개개인의 추종을 허하지 않을만큼 급속도로 전진하고 있다. 인류는 공동의 운명을 질머지고 있으며 사회집단간에 각각 다른 역사란 이미 없는거나 같다. 한마디로 오늘의 인류는 사물에 대한 정적(靜的)인 개념에서 동적이요 발전적인 개념으로 변천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새로운 분석과 새로운 종합판단을 요청하는 새로운 문제들이 방대하게 야기되고 있다.
- 사회질서의 변천
【6】 (ㄱ)이같은 변화로 인하여 가부장적(家父長的) 가족, 동족부락(同族部落), 부족(部族), 촌락(村落) 같은 전통적 지역사회 및 여러사회단체와 인간관계는 날로 격변되어 갔다.
(ㄴ)공업화(工業化)된 사회형태가 점차로 번져가고 있으며 어떤 나라에서는 경제적 번영을 가져옴과 동시에 오랜 세기(世紀)의 사회생활에 대한 관념과 그 생활 조건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와같이 대도시와 그 인구의 증가로 인해 혹은 도시생활 양식이 농촌에까지 번져감으로써 도시화의 경향과 이에 대한 매력이 커가고 있다.
(ㄷ)새로운 또한 끊임없이 개량되고 있는 「매스콤」 수단은 수많은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여러가지 사건을 알리고 사상과 감정을 순식간에 전세계에 전파시키고 있다.
(ㄹ)동시에 무수한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유로써 이주(移住)하고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도 도외시할 수 없다.
(ㅁ)요약하면 인간상호관계는 이처럼 끊임없이 증대돼가고 있으며 이런 「사회화」(社會化)는 다시 새로운 유대를 형성하여 그것이 언제나 요구되는 바와 같이 인간과 참된 인격적 발전 즉 「인간화」에 이바지하고 있지는 않다.
(ㅂ)실제로 이같은 발전상은 특히 경제성장과 기술발전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나라에 있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동일한 현상은 공업화(工業化)와 현대화를 지향하는 저개발국에서도 노출되고 있으며 이런 나라의 사람들, 특히 오랜 전통에 젖어있었던 나라의 사람들은 보다 더 성숙한 인격적 자유의 소지자로 살 수 있기를 희구한다.
- 심리 · 윤리 · 종교상의 변화
【7】 (ㄱ)사회관념과 제도의 변경은 흔히 기존가치에 대한 의문을 수반시켰으며 이는 특히 청소년층에 있어 그러하다. 그들은 가끔 자신들의 현재의 상태에 불만을 품을뿐 아니라 반항의 기세를 보이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사회생활면에 있어 그들 자신의 위치에 중요성을 의식하고 점차로 이에 대한 책임분담을 요망하고 있다.
부모들과 교육자들이 흔히 그들의 임무수행에 있어 날로 더하는 난관에 부딪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ㄴ)사실 과거로부터 전래되는 생활환경, 법규(法規) 및 사고방식(思考方式)과 정서(情緖)가 현실에 반드시 적합한 것은 아니다. 그 결과로 행동거지와 그 규범의 더욱 큰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ㄷ)이같은 새로운 사태(事態)는 드디어 종교생활 자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한편 세상에 대한 주술적(呪術的) 개념과 아직도 상존하는 미신으로부터 종교생활을 정화하는 비판정신이 발전하고 보다 인격적이요 실천적인 신앙으로의 귀의(歸依)를 요청하여 하느님께 대한 생활한 의식(意識)에 도달한 이가 적지 않는가 하면 반면에 이와는 반대로 종교생활을 이탈하는 사람들의 수가 날로 격증하고 있다. 그리하여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아무런 유감조차 없이 신(神)과 종교를 거부한다는 사실이 이미 예외적인 일도, 어떤 개인의 경우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런 행동을 마치 과학발전과 어떤 새로운 「휴매니즘」의 요청감이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다. 세계 여러나라에서는 이같은 부정과 종교에 대한 무관심은 철학사상면에서만 표현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학 예술 인문과학 해설 및 역사 심지어 입법(立法)에까지 반영되며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크게 동요되고 있다.
- 현대세계의 불균형
【8】 (ㄱ)이렇게 급속도로 또 종종 무질서한 가운데 이룩된 발전은 세계의 고민인 분열을 더욱 예리하게 의식하게됨과 더불어 모순과 불균형(不均衡)을 낳고 이를 더욱 증가시키고 있다.
(ㄴ)이 불균형은 이미 개인의 현대적 실천이성(實踐理性)과 순수 이론적 사색(思索) 사이에도 노정(露呈)되고 있으며 인간의 이론적 사색은 지식의 총체(總體)를 지배하지못하고 이를 원만히 종합적으로 정리하지도 못한다. 이렇게 실리적(實利的) 행동에 대한 관심과 윤리적 양심의 요청 사이에도 균형이 없고 더구나 집단적 사회생활 조건과 개인의 사색생활 혹은 관상생활이 요청하는 것 사이에서도 균형이 상실되고 있으며 드디어는 인간의 전문화된 특수활동과 포괄적(包括的) 현실관(現實觀) 사이에 균형을 잃고 있다.
(ㄷ)가족간에도 인구증가, 경제 및 사회생활 조건의 중압, 혹은 세대차(世代遮)의 알력 또는 남녀간의 새로운 인간관계에 의해불화가 야기되고 있다.
(ㄹ)심각한 불균형은 인종간, 사회 각계층간에 드러나고 부(富) 한나라와 보다 후진적이거나 또는 가난한 나라 사이에 노정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많은 국민들의 평화갈망에서 생겨난 국제기구와 자가(自家)의 「이데올로기」 선전간에 전자(前者)와 여러나라 혹은 기타 단체가 노출시키는 집단적 이기주의(利己主義) 간에 불균형을 볼 수 있다.
(ㅁ)그 결과 상호 불신과 적개심, 분쟁과 재난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인간자신이 그 원인이면서 동시에 그 제물(祭物)이 되고 있다.
- 인류소망의 증대
【9】 (ㄱ)이같은 가운데 인류는 우주만물에 대한 그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잇고 또 강화해야만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인류는 언제나 인간에 더 봉사하고 개인과 모든 사회단체가 그 고유의 존엄성을 확인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 사회 및 경제질서를 세울 수 있고 또 세워야 한다는 확신이 증대돼가고 있다.
(ㄴ)그 결과 불의(不義)와 불공평으로 인해 재물의 분배에 스스로 침해를 받고있다고 믿고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에대한 권리회복을 강력히 요구하며 저개발국 및 신생국가들은 경제 및 정치면에 있어 현대문명의 혜택을 함께 나누어 가질 것과 세계무대에서 그들의 역할을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기를 희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국가들은 부유한 나라들이 급속히 발전해가는데 반해 더욱더 낙후(落後)되며 동시에 경제적 종속을 포함한 종속관계에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굶주리는 백성들은 유족한 백성들에게 그 부(富)를 나누도록 요구하며 아직도 남녀동등권을 가지지 못한 나라의 여성들은 남성들에 있어서와 같이 명실상부한 동등권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그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랄 뿐 아니라 노동으로써 그들의 인격을 발전시킬 것과, 보다 더는 경제 사회 정치 문화면의 생활체제에 참여할 수 있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리하여 오늘날 전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문화의 혜택이 모든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고루 분배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돼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ㄷ)그러나 이런 모든 요구의 이면에는 보다 깊고 보다 보편적인 소망이 내재돼 있으니 그것은 모든 사람들과 사회단체가 인간 존엄성에 부합되는 완전하고 자유스러운 생활, 현대 세계가 풍부히 제공하는 모든 것을 그들 사진의 복지를 위해 쓸 수 있는 그런 생활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국은 세계적 공동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끊임없이 비상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ㄹ)이처럼 현대세계는 한편 강하면서 또한 약하고, 보다 개선될 수도 잇으면서 더룩 악화될 수도 있고, 그앞에는 자유에로의 문과 노례상태로의 문이 도잇에 열려잇으며 더 발전할 수도 더 퇴보할 수도 있고, 형제애로 나아갈 수도 있는가 하면 증오로 타락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 인간은 그가 풀어놓은 모든 힘의 방향을 바로잡는 것은 그 자신에게 달린 이리고 그 힘은 자신을 멸망시킬 수도 있고 자신의 복지를 위해 이바지 될 수도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인간이 그 스스로 자신이 무엇인가 묻게된 것은 이때문이다.
- 인류의 심각한 문제
【10】 (ㄱ)진실을 말하면 현대세계를 고민케 하는 균형상실은 인간 마음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보다 근원적인 균형상실에서 온다. 사실 인간자신의 내부에서 이미 여러가지 요소가 서로 격투를 벌이고 있다. 인간은 한편 수다한 그 자신의 제약성(制約性)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그의 소망이 끝없고 보다 고차적인 생명에로의 소명을 받고있음을 느낀다. 수다한 사태(事態)에 자극되어 끊임없이 취사선택(取捨選擇)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더 불행한 일은 약하고 죄스런 인간으로서 그는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원치않는 것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그 자신안에서부터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으니 사회안에 있는 허다하고도 크낙한 불화의 원인은 다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실천적 물질주의에 젖어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같은 「드라마틱」한 현상을 뚜렷이 볼 수 있기엔 너무나 눈이 어두워져 있고 혹은 스스로의 바침한 현실에 짓눌린 나머지 그런데 유의할 겨를 조차 없음도 사실이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주어진 허다한 인생관과 세계관에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었다고 믿고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오직 인간의 노력으로써만 인류의 참되고 완전한 해방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래의 인간세계는 모든 소망을 다 채워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개중에는 스스로의 정신의 힘만으로 그 의미를 부여해보려고 시도하는 자들의 대담성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세계의 발전을 직시하면서 인간은 무엇인가? 어떻듯이 큰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이 고통과 불행, 죽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막대한 희생을 치뤄 쟁취한 이 승리는 무슨 소용이 있단 말힌가? 인간이 사회에 끼쳐줄 것은 무엇이며 사회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혹은 이를 새로이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들의 수도 증가하고 있다.
(ㄴ)그러나 교회는 만민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그의 최상의 소명(召命)에 응할 수 있게끔 성신을 통하여 그에게 빛과 힘을 주심을 굳게 믿고 있다. 동시에 교회는 하늘 아래는 이외의 다른 어떤 이름도 인간의 구제를 위해 주어져 있지 않음을(종도행전 4장 12절 참조) 확신하고 있다. 나아가 주(主)시요, 스승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또한 세상만사가 변전(變轉) 무상(無常)할지라도 「어제와 같이 오늘도 또한 영원토록 같으신 그리스도」(헤브레서 13장 8절) 안에 궁극의 바탕을 둔 많은 것은 불변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무형하신 천주의 반영(反映)이시요 모든 조물에 앞서 나신(콜로새서 1장 15절 참조) 그리스도의 빛아래 인간의 신비를 밝히고 이 시대의 중대한 여러가지 문제 해결의 길을 찾고있는 인류를 돕기위해 만인을 향해 지닌 바 그 소신을 피려코자 한다.
◆ 제1부 교회와 인간의 소명
- 성신의 감도에 응해야
【11】 (ㄱ) 하느님의 백성은, 스스로가 온 땅을 가득히 채우시는 주의 성신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의 현대에 있어 다른이들과 함께 체험하는 여러가지 사건과 요구 및 염원 중에서 무엇이 하느님의 현존(현존)과 그 섭리의 참된 표지(標識)인지 가려내고자 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모든 것을 새로운 빛으로 밝히고 인간의 전소명(全召命)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깨우쳐줌으로써 정신을 온전히 인간적인 해결의 방향으로 돌이켜주기 때문이다.
(ㄴ) 공의회는 무엇보다도 앞서 현대인이 가장 소중히여기는 제가치(諸價値)를 이 빛에 의하여 평가하고 이를 그 신적(神的)인 근원에 다시 연결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런 가치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천부적 정신에서 오는 것인한 대단히 좋은 것이나 인간마음의 부패로 인해 본래의 질서에서 이탈한 경우가 허다하며 그러므로 정화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ㄷ) 교회는 인간을 어떻게 보고있으며, 현대사회 건설을 위해 어떠한 길이 천거돼야할 것인가? 또 세계에서의 인간활동의 궁극적 의의는 무엇인가? 현대인은 이와같은 질문의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대한 답을 제시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과 이 백성도 함께 포함돼 있는 인류가 상호간 봉사해야함이 밝히 드러날 것이며 그러므로 해서 교회의 사명의 종교적 성격과 또 그때문에 그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임이 확언해질 것이다.
■ 제1장 인간의 존엄성
【12】 (ㄱ) 무릇 신자 · 불신자를 막론하고 인간이 이 지상에서 만물의 중심과 그 정점(頂点)으로 세워져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ㄴ) 그러나 인간은 무엇인가? 자신에 대한 인간의 견해는 지금까지 여러갈래였고 상반됐으며, 그것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에 의하면 인간은 혹은 제 스스로를 절대적 규범과 같이 높이는가 하면 때로는 반대로 절망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을 비하(卑下)시킨다. 그의 회의와 그의 불안은 여기서 결과된 것이다 이 어려운 문제를 교회는 깊이 감지(感知)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계시진리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는 여기에 답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답은 인간의 참된 상태를 확연히 드러내고 그의 취약성(脆弱性)을 밝힘과 동시 그의 존엄성과 그 궁극목적을 바로 인식시킬 것이다.
(ㄷ) 성경은 무릇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할 능력을 가졌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만물을 지배하고 만물을 자기 복지를 위해 쏟을 수 있는(집회서 17장 3-10 참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설정돼 있음을(창세기 1장 26절, 지서 2장 23절 참조) 가르친다.
『인간이 무엇이온데 당신이 그를 기억하시나이까? 또 사람의 자식이 무엇이온데 당신이 그를 돌보시나이까? 당신은 그를 천사(天使)들에 비해 크게 못지않게 만드셨으며 영광과 명예의 관을 그에게 씌우셨나이다. 그로 하여금 당신 손의 조물(造物)들을 다스리게 하셨으며, 모든 것을 그의 발밑에 굴복시키셨나이다.』(성영 8장 5-7)
(ㄹ)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외롭게 만드시지 않으셨으며 시초부터 『주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세기 1장 27절)이 남녀의 배합(配合)은 인간의 일치화합(和合)의 첫 표상이다. 인간은 이같이 깊이 본성적으로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도 그 자질(資質)을 발전시킬 수도 없다.
(ㅁ) 그러므로 하느님은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같이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이 매우 좋다고 판단하셨다.』(창세기 1장 31절)
- 인간의 죄
【13】 (ㄱ) 하느님은 이같이 인간을 의(義)로운 지위에 두셨으나 인간은 역사의 시초부터 마귀유인에 빠져 그 자유를 남용했으며 하느님을 거르시고 또한 그를 떠나 자기목적을 달성할려고 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인간들은 하느님께 합당한 영광을 드리지 않았으며 … 그들의 마음 눈이 어두워져』 조물주 보다 오히려 피조물을 더 서겼다. (로마서 1장 21-25절 참조) 하느님의 계시가 이같이 알려주는 바는 우리 자신의 체험이 또한 확인하는 바이다. 과연 인간은 그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때 악으로의 경향을 발견하며 선(善)하신 조물주로부터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온갖 죄악에 빠져잇음을 확연히 볼 수 있다. 인간은 가끔 하느님을 그 자신의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또한 바로 이런 태도로 인해 그를 궁극 목적으로 지향하게 하는 질서를 파괴했으며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또한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일체의 조화(調和)를 깨뜨렸다.
(ㄴ) 그때문에 인간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부터 분열돼 있다. 그리하여 개인 혹은 집단의 이난 생활 전부가 선과 악, 빛과 어둠의 치열한 싸움과 같이 나타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악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없음을 깨닫고 있으며 사람은 누구나 어떤 사슬에 묶여 있다는 감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주께서는 인간에게 그의 자유와 힘을 다시 찾아주시기 위해 친히 오셨으며 인간을 내적으로 새롭게 하고 그를 죄의 사슬로 묶고 있던 「세상의 임자」를 밖으로 내쫓으셨다. (요왕 12장 31절). 하지만 죄는 인간을 비하(卑下)시키고 그 목적 달성을 방해하고 있다.
(ㄷ) 이 계시진리의 빛 속에 무릇 인간이면 누구나 체험하는 인간 소명의 존귀함과 인간의 깊은 비참이 함께 그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 인간의 본질
【14】 (ㄱ) 영혼 육신으로 이루어졌으나 진실히 단일적(單一的) 존재인 인간은 그 육체구성에 있어서도 물질세계의 제요소(諸要素)를 한 몸에 결합한 집약체(集約體)이며 이로써 물질은 인간을 통하여 그 절정에 달하고 조물주께 자발적인 찬미를 바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육신생명을 경홀히 여겨서는 안되며 오히려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하느님이 세상 마치는 날에 부활시키실 육신을 존중하고 이에 대한 경의를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죄로써 손상된 인간은 자신 안에 육체의 반항을 감득한다. 그러므로 인간존엄성은 육신으로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마음의 악한 성정(性情)에 이를 굴복시키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다.
(ㄴ) 인간은 무릇 그 자신이 물질 이상의 존재임을 인식하고 그가 결코 자연의 한 조각 혹은 인간사회의 무명(無名)의 한 성분(成分)에 불과할 수 없는 존재라고 간주할 때 이는 바로 판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의 내적 품위로서 일체의 물질계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가 자기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갈 때 이 깊이에 도달하게 되며 거기서 사람의 마음 속까지 아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또한 그 하느님의 면전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내면에 있는 영적(靈的) 불멸의 영혼을 인식할 때 인간은 단지 물리적 사회적 조건의 산물인 상상의 조작(造作)에 희롱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는 반대로 실제(實存)의 심저(深底)에 도달하게 된다.
- 지성 · 진리 · 예지의 존엄성
【15】 (ㄱ) 무릇 인간은 하느님의 예지의 빛을 받아 그가 지력(知力)으로써 만물을 초월하고 있음을 바로 인식할 수 있다. 정히 인간의 천부적 지능은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꾸준히 노력하여 자연과학, 기술, 문예(文藝) 방면에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오늘날에는 특히 물질세계탐구와 그 정복에 있어 획기적인 성과를 기록하였다. 그런가운데 인간은 계속 더욱 깊이 진리를 타구했으며 이를 또한 발견하였다. 과연 인간의 지능은 현상계(現象界)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며 비록 죄로인해 다소 흐려지고 약화됐을 망정 인식할 수 있는 일체의 실재(實在)에까지 참되이 또한 확실히 도달할 수 있다.
(ㄴ) 인간의 지성(知性)은 예지를 통하여 완성되고 또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예지는 힘차게 또한 부드럽게 인간정신을 인도하여 진리와 선을 탐구시키고 이를 또한 사랑하도록 만들며 인간은 예지에 힘입어 가견적(可見的) 세계에서 불가견적(不可見的) 세계로 승화(昇華)될 수 있기 때문이다.
(ㄷ) 오늘 우리 시대는 과거 어느때보다도 인간이 탐색발전한 모든 것이 인간화(人間化)되기 위해 이같은 예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지를 지닌 사람들이 출현하지 않을 때 미래의 세계는 멸망의 위기를 모면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엇는 것은 오늘날 경제적으로는 빈곤하나 예지에 있어서는 풍요한 많은 나라 백성들이 있고 이들은 그 예지로써 다른 나라사람들을 크게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ㄹ) 인간은 또한 성신의 은례를 받아 신앙으로써 하느님의 뜻의 신비를 묵상하고 그 예지에 달할 수 있다.
- 양심의 존귀
【16】 인간은 그 양심의 심저(深底)에 스스로 설정하지 않은 그러나 순종해야 할 법칙을 발견한다. 선을 사랑하고 행하며 악을 피하도록 끊임없이 타이르는 이 양심의 소리는 필요한 때에는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준 것이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이에 순종하는데 잇으며 그 여하에 따라 인간은 심판을 받게된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곳이요 그 지성소(至聖所)이며, 여기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대면해있고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양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채워지는 그 사랑이 계명을 참으로 기이할만큼 뚜렷이 밝혀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신자들은 이 양심에 충실하면서 모든 사람들과 협력하여 진리를 찾고,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 야기되는 많은 윤리문제의 참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올바른 양심이 더욱 승리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과 사회단체들이 무정견(無定見)한 판단을 피하고 객관적 윤리규범에 준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양심은 때로 그 존엄성을 잃지않으면서도 불가항력의 무지(無知)로 인해 그르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진리와 선의 추구에 무관심한 사람 또는 상습적 범죄로 양심이 거의 마미된 사람에게 해당될 수 없다.
- 자유의 존귀
【17】 무릇 인간은 언제나 오직 자유의 사이에 의해 선을 지향하며 이 자유를 현대인들은 가장 높이 평가하고 또한 열렬히 추구한다. 이는 사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 자유증진에 있어 그릇치고 있으며 자유란 마치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지어 악한 일 조차도 할 수 있는 특권(特權)인양 오인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인간내면에 있는 하느님은 인간을 『자기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기를 원하셨고(집회서 15장 14절 참조) 그리하여 인간으로 하려금 스스로 조물주를 찾고 이에 귀의(歸依)하여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게끔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존엄성은 인간이 오직 본능의 충동이나 외적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신의 확신을 따라 움직이고 결정하여, 의식적이요 또한 자유스러운 선택에 의해 행동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인간은 모든 욕정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고 자기 목적을 추구하며 또 이를 위해 진정 슬기롭고 효과적인 방법을 취할 때 이 존엄성에 도달한다. 그러나 죄로인해 손상된 인간의 자유가 실제로 또한 완전히 하느님을 향해 있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서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각기 자기 생활의 선악에 대한 심판을 하느님 앞에서 받아야 한다.
- 죽음의 빈시와 교회의 해답
【18】 (ㄱ) 죽음에 직면했을 때 인생의 수수께끼는 그 절정에 도달한다. 임종에 이르러 인간은 육체의 고통과 그 점진적 쇠약으로 신음할 뿐 아니라 그 결정적 소멸에 대한 공포에 떨게된다. 인간은 그 마음의 직감(直感)을 따라 필연적으로 자신의 인간실존의 이 완전한 와해(瓦解)와 결정적인 파멸 앞에 저항하고 이를 거부한다. 인간 자신에 내재된 불멸의 씨는 순수 물질로 완원될 수 없으며 그때문에 이 불멸의 씨는 죽음에 저항항 일어서지 않을 수 없다. 훌륭한 기술을 다 써보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기술일지라도 이 인간의 고뇌를 진정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인 육체생명의 연장은 인간 내심(內心) 깊이에 절대적으로 뿌리박고 있는 더 고차적(高次的) 생명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ㄴ) 비록 죽음의 신비는 인간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이나 하느님의 계시진리의 가르침을 받은 교회는 하느님이 인간을 현세의 비참을 초월한 복된 목적을 위해 창조하셨음을 확고히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신앙은 만일 인간이 범죄치 않았더라면 면제되었을 이 육체의 죽음도 어느날엔가 극복될 것임을 가르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구세주께서 인간에게 그가 타죄(墮罪)로 인하여 잃은 구원을 완전히 돌려주실 때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이 그의 전존재(全存在)로써 당신께 결합되어 끝없이 당신의 불멸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르셨고 또 거듭 부르시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그리스도 친히 죽으심으로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거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확고한 객관적 이론으로 제시되는 신앙은 깊이 생각하는 모든 인간에게 미래에 대한 그 불안한 물음에 답할 것이다. 동시에 신앙은 이미 죽은 사랑하는 우리 형제들이 하느님 곁에 참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희망을 줌으로써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그들과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 무신론의 형태와 그 원인
【19】 (ㄱ) 무릇 인간존엄성의 가장 고귀한 면은 하느님과 결합될 수 있는 그 인간소명에 있다. 당신과 더불어 대화하도록 인간에게 말씀해오시는 하느님의 이 초대는 인간 실존과 함께 시작돼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그를 사랑으로써 창조하시고, 사랑으로써 끊임없이 그에게 존재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즐거이 이 사랑을 인정치 않고 또한 스스로를 하느님께 내맡기지 않을 때에는 그의 생활은 진리에 의거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하느님과 결합시키는 이 친밀하고 생활한 관계를 전혀 인식하지 않고 있으며 혹은 이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무신론이 가장 중대한 문제중의 하나로 대두하기까지에 이르렀으며 그때문에 이 문제는 신중히 검토돼야 한다.
(ㄴ) 다같이 무신론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가지 양상으로 나타나 있다. 개중에는 신(神)을 완전히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이 있는가 하면 신에 대해서는 어떤 절대적인 주장도 할 수 없다는 자들도 있고 혹은 신에 대한 문제를 무의미하게 취급해 버리는 자들도 있다. 또 이와는 달리 실험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 과학적 이론만으로 만사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혹은 반대로 여하한 결정적 절대진리도 인정치 않는 자들이 적지않다. 어떤자들은 신에대한 신앙은 인간의 무력(無力)을 뜻하는거나 마찬가지라고 여길만큼 인간을 과대평가하며 이들은 신부정(神否定)에보다 인간긍정(人間肯定)에 더욱 급급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혹자는 신을 제멋대로 상상하고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들이 거부하는 신은 복음의 하느님과 하등의 상관도 없다. 또 어떤자들은 신의 문제와는 대결해보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들은 마치 아무런 종교적 불안도 지니지 않았는 것처럼 종교에 대해 마음을 써야할 필요성 조차도 느끼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악에 대한 격렬한 반발심에서 혹은 어떤 인간적 이상을 그릇되게 절대시하여 이를 신과 같이 숭배하는데서 무신론이 초래된 경우도 적지 않다. 또한 현대문명은 물론 그 본질에 연유된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현세 사물에만 몰두해 있음으로써 가끔 하느님께로의 길을 방해하고 있다.
(ㄷ) 양심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고의로 하느님을 마음에서 몰아내며 종교적 문제를 배척하려 드는 자들에게 물론 탓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신자들 역시 어느정도 이에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왜냐하면 문신론이란 그 전체로 보아서 자체안에 근원을 가진 것이 아니며 그것은 여러가지 원인에서 연유된 것이므로 그 중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반항심, 특히 비판적 반항심에 기인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신자들은 무신론 발생에 적지않은 책임을 지고 있으며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 배양을 등한시 함으로써 혹은 교리를 그릇되이 가르치고 또한 그들의 종교생활 윤리생활 사회생활을 타당히 실천하지 않음으로써 신자들은 그만큼 하느님과 종교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었다기 보다 오히려 가리웠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 체계적 무신론
【20】 (ㄱ) 현대무신론은 흔히 조직적 체재를 갖추고 있으며 이는 다른 이유는 제쳐놓고라도 인간자율(人間自律)에 대한 원욕을 강력히 추진시켜 마침내는 하느님께 대한 원욕을 강력히 추진신켜 마침내는 하느님께 대한 일체의 종속관계를 저해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같은 무신론을 신봉하는 자들은 이난의 자유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목적이요 유일한 장인(匠人)이며 자신의 역사의 조화신(造化神)인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리(事理)를 이렇게 볼 때 이는 달리 만물의 창조자요 목적인 주(主)를 인정하는 것과는 양립(兩立)될 수 없으며 적어도 그같은 인정은 사족(蛇足)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이론은 현대의 기술문명의 발전이 인간에서 부여한 힘의 의식(意識)을 통하여 더욱 강화될 수 있다.
(ㄴ) 현대 무신론이 여러가지 형태중 묵과할 수 없는 것은 인간 해방(解放)을 무엇보다도 앞서 경제적 사회적 해방에서 기대하는 거것이다. 이 무신론 종교란 인간에게 후세(後世)에 대한 허황한 희망을 품게하여 그를 지상(地上)왕국 건설에서 외면케 함으로 그 자체의 본질상 상술(上述)한 해방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때문에 이 이론의 신본자들은 그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영역내에선 맹렬히 종교를 공격하며 특히 청소년 교육부면에 있어 무신론 선전을 위해 정치권력이 미치는한 모든 억압정책을 강행하고 있다.
- 무신론에 대한 교회의 태도
【21】 (ㄱ) 하느님께와 함께 인간에게 충실한 교회는 과거에 있어서와 같이 오늘날에 있어서도 인간 이성과 보편적 경험에 반대되고 인간을 그의 고귀한 천품(天稟)에서 떨어뜨리는 이같은 이론과 음흉한 책동에 대해 침통해 마지 않으며 또한 이를 단호히 거부하는 바이다.
(ㄴ) 그러나 교회는 동시에 무신론자들의 정신 안에 숨어있는 신(神) 부정의 이유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바이며 무신론이 야기시킨 문제의 중대성을 깊이 의식하고 또한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에 동하여 무신론의 이같은 동기들을 진지하게 또한 깊이 거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ㄷ) 교회는 하느님을 인정하고 절대로 인간존엄성에 배치되지 않음을 주장하며 그 이유는 이 존엄성의 근원과 완성이 바로 그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창조주이신 하느님에 의해 지혜와 자유를 지닌 사회의 일원으로 조성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인간은 무엇보다 앞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이 친밀한 사랑과 그 행복에 참여할 수 있는 부르심을 받고있다. 나아가 교회느 내세(來世)에 대한 희망이 지상에서의 인간노력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동기에 움직여 이를 달성시키도록 돕고 있음을 가르친다. 만일 이와반대로 인간에게 하느님의 도우심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상실되는 날에는 인간존엄성은 오늘날 흔히 목격할 수 있는 바와같은 심각한 상처를 입게될 것이며, 삶과 죽음, 죄와 고통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절망의 나락(奈落)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ㄹ) 인간은 아직도 누구에게나 하나의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으며 그는 이를 막연히나마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시간이 오면 특히 인간이 그 사활의 중대사에 부딪쳤을 땐 그 누구도 이와같은 물음을 회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설문에 대하여 완전하고 확고부동한 답을 줄 수 있는 이는 오직 우리를 깊은 반성과 겸손된 탐구에로 불러들이는 하느님뿐이다.
(ㅁ) 무신론에 대한 구제는 교리를 타당하게 설명해줌과 동시에 교회와 그 신자들이 참된 생활을 영위함으로 기(期)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신의 인도를 받아 끊임없이 자체를 쇄신하고 정화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강생하신 그의 성자(聖子)를 현존하신 자로 시현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생활하고 성숙한 신앙, 즉 여러가지 난관을 밝히 인식하고 이를 또한 극복할 수 있을만큼 탁마된 신앙의 증거로써다. 이같은 신앙을 수많은 순교자들은 찬란히 증거하였고 또한 끊임없이 증거하고 있다. 이 신앙의 생명력은 침투되고 또한 그들은 정의와 사랑 무엇보다도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인도함으로써 발휘돼야 한다. 마침내 하느님의 현존(現存)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펴기 위해 힘을 모아 일하고 그들 스스로를 일치의 상징과 같이 드러내는 신자들의 형제적 사랑이다.
(ㅂ) 교회는 무신론을 절대적으로 배격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런 저의(底意)없이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함게 살고있는 이 세계를 올바로 건설하는데 전심전력해야 함을 선언하는 바이며 이는 물론 성실하고 현명한 대화(對話)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정권들이 인간의 기본권(基本權)을 무시하고 신자와 불신자들간에 부당한 차별대우를 둠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이에 교회는 신자들을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필요한 실질적 자유와 그 가능성을 인정하도록 요구하며 무신론자들에게 관해서는 교회는 진정한 사랑으로 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허심탄회하게 검토해보도록 촉구하는 바이다.
(ㅅ) 교회는 그의 「메시지」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소망과 일치되고 있음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인간소명의 존엄성을 수호(守護)하고 인간목적의 위대성을 의심하는 자들에게는 다시 희망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이 「메시지」는 인간을 약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빛과 생명과 자유를 발휘하면서 그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메시지」를 떠나서는 인간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오 주여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평안치 않으리이다』 (성 아오스딩 고백록 1장 1).
- 새로운 인간 그리스도
【22】 (ㄱ)정히 인간의 신비는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를 떠나서 참되이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첫 인간인 아담은 장차 오실 자(者) 즉 주 그리스도의 표상이었고, 새 아담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는 바로 그 계시로써 인간에게 인간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주었으며 그의 소명의 고귀함을 밝혀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술(上述)한 모든 진리가 그리스도에게 그 근원을 두고 있고 그 절정(絶頂)에 달하고 있음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ㄴ)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의 모습』(콜로새書 1장 15절)인 그리스도는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며 그는 아담의 후손들에게 원죄(原罪)로 인하여 변모된 신적(神的) 유사성(類似性)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인간성은 그리스도안에 올려졌으나 소멸되지 않았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하여 이 인간성은 우리안에 있어 역시 비할바 없는 높은 품위에까지 올려져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성자는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어떤 의미로 당신 스스로를 모든 인간과 결합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손으로 일하였고 인간의 지력으로 생각했으며 인간의 의지로써 행동하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였다. 동정 성모 마리아 몸에서 태어나 그는 참으로 우리 중의 하나가 되었고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점에 있어 우리와 같았다.
(ㄷ) 결백한 고양(羔羊)이 되어 자진해서 흘린 스스로의 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얻어주셨다. 하느님은 그안에 우리를 마귀와 죄의 속박에서 풀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 더불어 또한 우리 서로를 다시 화합시켰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다 바오로 종도와 함께 하느님의 성자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스스로 희생되셨다. (갈라타서 2장 20절)고 말할 수 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에게 당신 뒤를 따르기 위한 표양을 남기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으셨으며 그때문에 우리는 삶과 죽음이 다 성화(聖化)되고 새로운 의미를 얻기 위해 이 길을 따라가야 한다.
(ㄹ) 많은 형제들 중에 맏이로 나신 성자의 모상과 동형이 된(로마書 8장 29절 참조) 그리스도신자는 「성신의 첫 은혜」(로마서 8장 23절)를 받으며, 그는 이 은혜에 힘입어 사랑의 새계명을 충복시킬 수 있다. (로마서 8장 1-11절 참조). 『상속(相續)의 담보(擔保)이신』(에페소서 1장 14절) 성신으로 인하여 『육신이 구속되기를 앙망하는』(로마서 8장 23절) 가운데 전인간(全人間)이 내적으로 쇄신되며 그래서 바오로 종도는 『만일 예수를 죽은자들 중에서 부활시킨 자의 성신이 너희안에 거하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로 조차 부활시키신 그이는 너희안에 거하시는 당신 성신으로 인하여 너희 죽을 육신도 살게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로마서 8장 11절). 물론 많은 시련을 겪고 죽음을 면치 못할지도 악을 거스려싸우는 것은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 필요하며 이는 또한 그의 의무이다. 그러나 「바스카」 비사에 결합되고 죽음에 있어 그리스도와 흡사하게 된 그리스도신자는 또한 희망에 가득찬 가운데 부활을 향하여 나아간다.(필립서 3장 10절 로마서 8장 17절 참조).
(ㅁ) 이는 또한 그리스도를 밎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될 뿐 아니라 마음속에 성총이 잠잠히 역사하고 있는 모든 선의(善意)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교회헌장 제2장 16항 참조). 그리스도는 사실 만민을 위해 죽으셨고 또한 이난의 궁극적 소명도 사실에 있어 유일하고 동시에 신성(神聖)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을 통하여 성신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바스카」비사에 참여하는 가능성을 주심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ㅂ) 인간의 신비는 이와같이 위대하며 이것이 또한 그리스도교 계시진리가 신자들에게 밝혀주는 인간의 신비이다. 그러므로 고통과 죽음의 수수께끼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만 풀 수 있으며 그의 복음을 떠나서는 우리는 그 수수께끼의 중압에 질식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써 죽음을 처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성자안에 하느님의 자녀되어 성신으로 인하여 「압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였다. (로마서 8장 15절 참조)
■ 제2장 인간사회
- 공의회가 추구하는 목적
【23】 (ㄱ) 현대의 중요한 국면(局面) 중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인간상호 관계가 비상히 증대돼 있다는 것이며 오늘의 기술문명의 발전이 크게 그 신장(伸張)에 이바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상호간의 형제적 대화는 이 수준에 도달해 있지 못할뿐 아니라 오히려 보다 깊이 인간공동체의 밑바닥에 처져있고 이 인간공동체는 인간의 정신적 존엄성을 상호간에 존중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계시진리는 사람들 사이의 이같은 인간적 교류의 발전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를 인도하여 조물주께서 인간의 정신적 윤리적 본성에 새겨넣은 사회생활에 대한 법칙을 더욱 깊이 이해시킨다.
(ㄴ) 그러나 교회의 교권(敎權)에 의해 최근에 반포된 여러 교서(敎書)들이 인간사회에 대한 그리스도교 교리를 충분히 설명하였기에(회칙 「어머니와 교사」, 「지상의 평화」 「그의 교회」) 공의회는 다만 몇가지 중요한 진리의 바탕을 계시(啓示)의 빛으로 설명하면서 여기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그치고자 하며 이어서 공의회는 그 진리들이 우리시대에 미치는 몇가지 중대한 영향에 대하여 강조하고자 한다.
-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인간 소명의 공동체 성격
【24】 (ㄱ) 자부적(慈父的) 사랑으로 만인을 굽어보시는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이 한 가족을 이루고 서로 형제와 같이 대하기를 원하셨다. 과연 만인은 다같이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하느님은 『한 혈육(血肉)으로써 온 인류를 조성하사 온 세상에 살게하셨고』(종도행전 17장 26절) 또한 만인은 오직 하나의 동일한 목적의 소명을 받았으며 이 목적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시다.
(ㄴ) 그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첫째 계명이요, 가장 큰 계명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서잇음을 가르쳐 『다른 모든 계명은 -남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이 한 마디에 총괄돼 있다.…그러므로 사랑은 법을 온전히 준행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로마서 13장 9-10절, 요왕1서 4장 20절) 따라서 이같은 사랑이 오늘날 상호 관계가 더욱 더 긴밀해져 가는 사람들을 위해 또한 끊임없이 하나이 되어가는 세상에 있어 지극히 중대한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ㄷ) 더 나아가 주께서 성부(聖父)를 향하여 『저 모든 이로 하여금 하나이 되게 하소서… 마치 우리가 하나이됨 같이』(요왕 17장 21-22절)라고 빌었을 때 그는 우리의 이성으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경지(境地)를 열어주었으며 하느님이신 성삼위(聖三位)의 일치와 사랑 및 진리안에 결합된 당신 자녀들의 일치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음을 시사하였다. 이 유사성은 또한 하느님이 피조물 자체를 위해 원하신 것으로 이 지상에서는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은 몰아적(沒我的)인 사랑으로써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루까 17,33 참조)
- 인간의 독립성과 사회
【25】 (ㄱ)인간의 사회성(社會性)은 개인의 인격향상과 사회자체의 발전이 서로 깊이 관련돼 있음을 알려준다. 사실 본성적으로 사회생활을 절대로 필요로 하는 인간은 사회 모든 제도의 근원과 주체(主體) 및 그 목적이고 또 그렇게 돼야한다. 그러므로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인간을 위해 덧붙여진 무엇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고 서로 봉사하며 서로 형제적 대화를 교환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에 상응한 발전을 이룩하고 그 소명에 응할 수 있다.
(ㄴ)인간 발전에 필요한 사회적 관계중에서 가족관계 및 정치체제를 갖춘 사회 단체같은 것이 가장 직접적으로 인간의 내적 본성에 응하고 있으며 기타의 것은 대체로 그 자신의 자유의사에 달려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여러가지 요인의 영향을 입어 인간상호관계와 의타관계(依他關係)는 증가일로에 있으며 그 결과 공적 혹은 사적 각종 단체와 조직이 결성되고 있다. 「사회화」(社會化)라고 일컬어지는 이런 사태가 비록 아무런 위험도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자질(資質)을 견고히 하고 성장시키며 또한 그 권리를 보장하는 등 여러가지 이점(利点)을 지니고 있다. (회칙 「어머니의 교사」).
(ㄷ)그러나 인간이 사회생활로부터 종교적인 면을 포함한 자신의 소명 달성을 위해 얻는 바가 많음도 사실이나 그들이 살고있고 어릴때부터 젖어있는 그 사회환경으로 인해 사람들이 선(善)에서 멀어지고 악으로 인도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오늘날 사회생활 내에서 허다히 목격되는 무질서가 어느정도 경제적 정치적 및 사회적 구조에 연유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무질서의 보다 깊은 원인은 인간의 오만과 이기주의에 있으며 이 역시 사회분위기를 혼탁하게 한다. 죄의 결과로 오염(汚染)된 사회질서 내에서 악의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은 그를 죄로 이끄는 새로운 유인에 부딪치며 힘찬 노력과 성총의 도움 없이는 인간은 이같은 유감을 물리칠 수 없다.
- 공동선 증진
【26】 (ㄱ)인간의 상호의존(相互依存) 관계는 오늘날 날로 짙어가고 또한 점차 전세계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단체나 개개 성원(成員)들로 하여금 더욱 완전히 더욱 쉽게 그 완성에 도달케 하는 공동선 즉 사회생활 조건의 총체(總體)는 점차 세계적인 차원(次元)을 취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전체인류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밝혀져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집단들은 다른 집단들이 요구하는 바와 그 소망을 고려해야 하며 더구나 전인류의 전반적인 복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회칙 「어머니와 교사」)
(ㄴ) 그리고 동시에 만물보다 우위(優位)에 있는 인간의 권리와 의무는 보편적이요 침범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인간이 지닌 고귀한 존엄성에 대한 의식(意識)은 날로 증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진정한 인간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의식주(衣食住)와 그외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와함께 인간은 어떤 사회 신분을 자유로이 선택하고 가정을 이룰 권리를 비롯하여 교육과 취업 및 훌륭한 평탄과 존경을 받을 권리와 합당한 정보(情報)에 대한 권리 그리고 올바른 양심에 따라 행동하며 사생활의 침범을 받지 않고 종교문제에 있어 정당한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져야 한다.
(ㄷ) 그러므로 사회질서와 사회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며 그 이유는 현세사물의 질서가 인간의 지위아래 서있고 그반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 친히 이를 시사하여 『안식일(파공날)은 사람을 위해 정해진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난 것이 아니다.』(말구 2장 27절)고 말씀하셨다. 이 사회질서는 끊임없이 발전돼야 하며 진리를 바탕으로 삼고 정의에 입각하여 세워지며 사랑에 의해 활력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이 질서는 자유를 누리되 언제나 보다 더 인간적인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회칙 「지상의 평화」)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회관념의 변화와 더불어 더 광범한 사회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ㄹ)오묘한 섭리로 시간의 흐름을 지배하고 지상(地上)의 면모(面貌)를 쇄신하는 하느님의 성신은 이러한 발전에 현존해 계시며, 또한 복음의 효소도 인간 존엄성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요청을 인간의 마음가운데 불러 일깨워 왔으며 지금도 일깨우고 있다.
- 인간에 대한 존경
【27】 (ㄱ) 실제적이며 또한 긴급한 중대사는 인간을 존경하는 것이라고 공의회는 강조하는 바이다. 즉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이웃들을 예외없이 또하나의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불쌍한 나자로에 관심이 없었던 부자(富者)(루까 16장 19-31절)를 닮지 말고 무엇보다 먼저 이웃 사람의 삶을 염려해야 하고 그들이 존엄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단들을 고려해 주어야 한다.(야곱서 2장 15-16절 참조).
(ㄴ)특히 오늘날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모든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그들에게 봉사할 의무를 지고 있다. 환언하면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은 노인이나 까닭없이 멸시받는 외국인 노동자, 피난민, 또는 비합법적인 결혼에서 태어난 자기캇이 아닌 죄악으로 말미암아 부당하게 천대받는 사생아 혹은 『너희가 미소한 형제중 하나에게 베풀때마다 곧 내게 베푼 셈이니라』(마테오 25,40)라고 하신 주의 말씀을 상기시켜줌으로써 우리의 양심을 쓰라리게 하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능동적으로 도와줄 의무를 가지고 있다.
(ㄷ) 더우기 여하한 종류의 살인행위나 인종의 대량살해, 낙태, 안사(安死) 혹은 고의적인 자살 등과 같이 생명자체를 거역하는 행위와 또한 지체(枝體)를 절단하거나 정신과 육체에 가하는 고문(拷問) 및 심리적 억압 등 인간의 자전성(自全性)을 침해나는 행위, 또는 인간이하의 생활조건이나 전단적(專斷的)인 구속(拘束), 추방, 노예취급, 매음 및 부녀자와 연소자(年少者)의 매매를 자행하는 행위는 물론이요 노동자의 신분을 비하(卑下)시켜 그들을 자유와 책임감을 지닌 인격자로 보다 단순히 이익추구를 위한 도구로 취급하는 부당한 노동조건 등과 같은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모든 행위와 또한 그와 유사한 모든 행위는 진정 불명예스러운 것이다.
상술(上述)한 바와 같은 행위는 인간사회를 부패케 한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그러한 행위를 자행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큰 치욕(恥辱)이 된다. 더구나 그러한 행위는 창조주의 영광을 거스리는 가장 큰 독성죄인 것이다.
- 적대자(敵對者)에 대한 존경과 사랑
(ㄱ)우리의 존경과 사랑은 또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들과 달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게도 확대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정중한 호의의 사랑을 통해 그들의 사고방식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될 때 그들과의 대화는 더욱더 용이해질 것이다.
(ㄴ)물론 이같은 사랑과 호의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와 선(善)에 대하여 결코 무관심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재촉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전하게 하는 것은 이 사랑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배격해야 될 오류(誤謬)와 오류에 빠져있는 사람 즉, 종교문제에 관하여 그릇되고 불완전한 설(說)에 떨어져 있으나 그 인간존엄성을 잃지 않고 있는 사람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회칙 「지상의 평화」) 하느님만이 인간 내심(內心)을 판단하고 살피시며 그때문에 하느님은 우리가 어느 누구의 내면적인 죄로 심판하지 못하게 하셨다.(루까 6장 37-38절, 마테오 7장 14-2절, 로마서 2장 1-11절, 14장 10-12절).
(ㄷ)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를 해치는 자들까지 용서하라고 요청하며(마테오 5,43-47) 당신의 새로운 법인 사랑의 계명은 우리의 모든 원수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주(主)는 『또 이른바 네게 가까운 자는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함은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너를 핍박하고 망증하는 자를 위하여 기구하라.』(마테오 5,43-44)고 명하셨던 것이다.
- 만민의 평등과 사회정의
【29】 (ㄱ)무릇 모든 인간은 이성(理性)을 구비한 영혼을 가지고 있고 하느님의 모상(模像)으로 창조되었으며 또한 그들은 같은 본성을 가졌고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 또한 만인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救贖)되었으며 같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같은 운명을 지녔다 그러므로 모든이가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은 점차로 널리 인식돼야 한다.
(ㄴ)지적(知的) 및 윤리적 역량(力量)이 다양(多樣)하다는 각도에서 볼 때 모든 사람이 동등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적 권리에 저촉되는 사회적 및 문화적인 차별, 혹은 성(性), 종족, 피부색, 사회적 환경, 언어 및 종교 등을 이유로한 어떠한 의미의 차별도 제거되고 근절돼야 한다. 왜냐하면 그같은 차별은 하느님의 의향(意向)에 반대되기 땜누이다. 진실로 인간의 기본적인 제 권리들이 아직도 보편적으로 존중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남편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가 거부당하거나 어떠한 생활상태를 가질 권리 및 남성들이 누리는 권리와 같은 교육적 문화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여자이기 때문에 박탈당하는 수가 있다.
(ㄷ)더 나아가 비록 사람들 사이에는 당연한 차잇점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동등한 존엄성은 어느 누구에게나 보다 인도적이고 정당한 생활조건이 부여돼 있기를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인류가족의 성원(成員)들과 각 국민들 간에 격심한 경제적 및 사회적 차이가 존재하게 되면 이는 물의(物議)의 원인이 되고 사회정의와 평등 및 인간존엄성에 위배되며 동시에 사회안녕(安寧)과 국젷평화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ㄹ) 사적(私的)이든 공적(公的)이든 인간의 제도(制度)는 인간의 존엄성과 목적을 위해 진력해야 한다. 동시에 그러한 제도들은 사회적이건 정치적이건 어떤류의 노예상태도 완강히 배격하고 여하한 정치적인 조직하에서든지 인간의 기본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런 제도들은 비록 소망한 바 목적에 도달하기까지엔 상당한 세월을 요할지라도 점차로 모든 실재(實在) 중에서 가장 고귀한 정신적 실재에 호응할 수 있게 돼야한다.
- 개인주의적 윤리관의 초극(超克) 필요
【30】 (ㄱ) 현실사물의 급격한 변화는 어느 누구도 사태의 발전을 무시하고나 권태에 빠져 단순히 개인주의적 윤리에 만족해 있지 말기를 요구하고 있다. 정의와 사랑에 대한 의무는 각 개인이 자기자신의 능력과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공동선(共同善)을 위해 기여하고 또한 인간의 생활조건을 개선하는데 이바지하는 공적(公的) 및 사적 제도를 촉진시키고 도와줌으로써만 더욱더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관대하고 고귀한 감정을 말로는 표명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바에 대하여 항상 오불관언이란 생활 태도로 살고있는 사람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나라에서는 법률과 사회법규를 멸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또한 적지않은 사람들은 세금이나 기타 사회에 대한 채무(債務)를 여러가지 사기 수단과 기만행위로써 회피하고 있다.
그외 어떤 사람들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일정안 규범들, 예를 들면 건강보호를 위해 마련된 규범이나 교통규칙 등을 경시(輕視)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에 조금도 유의(留意)하지 않고 있다.
(ㄴ)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사회적 연대책이을 지킴이 현대 인간의 중요한 의무중의 하나임을 인식하고 이를 이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가 단일화되면 될수록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의 영역이 개체집단을 초월하여 점차 전세계로 확대되고 있음이 더욱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발전은 인간 개개인과 그들의 단체들이 스스로 윤리적 및 사회적 미덕을 매양하고 사회안에 그 미덕을 증진시키지 않으면 이뤄질 수가 없다.
그렇게 될 때에는 필요한 성총의 도움을 받은 진정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인간성을 가진 일군들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 책임과 사회참여
【31】 (ㄱ) 인간 개개인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이 속해있는 여러집단들에 대한 양심상의 의무들을 보다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오늘날 인류에게 이용될 수 있는 방대한 보조수단을 모두 사용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보다 높은 문화적 수준을 갖도록 신중히 주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여러가지 사회적 배경 속에서 자라나온 모든 청소년들에게 교육이 실시돼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단지 학식많은 남녀들뿐 아니라 현대가 요구하고 있는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배출될 수 있을 것이다.
(ㄴ) 그러나 인간은 그의 생활조건이 인간의 존엄성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거나 하느님과 이웃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바침으로써 자신의 소명에 순응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 그는 이같은 책임감을 거의 느낄 수 없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안락한 생활을 너무 과분하게 누리거나 일종이 상아탑(象牙塔) 속에 스스로를 감금해버릴 때에 그 가치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로 극빈(極貧)에 처했을 때도 종종 위축된 자유가 되고만다. 이와 반대로 인간의 자유는 사회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을 수락할 때, 사회공동생활의 여러가지 요청에 즐거히 응할 때 또는 작시 스스로를 인간의 공동체를 위한 봉사에 헌신하려고 할 때에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ㄷ) 그러므로 공동사업에 참여하여 자기의 역할을 맡고자 하는 개인의 의사(意思)는 어디서든지 고무돼야 한다. 또한 대다수 시민들로 하여금 공적(公的)인 일에 아주 자유로운 참여를 가능케 하는 국민들의 행위를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개개 국민들의 실정(實情)과 안정된 정부의 필요성은 참작돼야 한다.
그러나 모든 시민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집단들의 제 활동에 자진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런 집단 안에 사람들을 끌 수 있고 또 그들에게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정신을 일으켜 주는 가치들이 발견돼야 한다. 이에 우리는 인류의 장래 운명이 내일의 세대에 삶의 의미와 희망의 근거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확고히 믿는 바이다.
【32】 (ㄱ)하느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하여 살도록 창조하지 않고 사회적인 단체를 형성하여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와같이 하느님은 상호간에 아무런 유대관계(紐帶關係)가 없는 개개인으로서 인간을 성화시키고 구하기를 원치 않으시고 하나의 백성을 이루게 하여 그런 백성으로서 당신을 진리에 의거하여 인식하고 거룩하게 섬기기를 원하셨다.(교회헌장 2장 9항). 또 그와 같이 하느님은 구원의 역사의 시초부터 인간을 개개인으로서 간선하지 않으시고 한 공동체의 성원(成員)으로서 간선하셨다. 그리고 이 간선된 자들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섭리를 계시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출애급기 3장 7-12)이라 부르셨으며 또한 이 백성과 더불어 「시내」산에서 계약(契約)을 맺으셨다. (출애급기 24장 18절).
(ㄴ)이같은 공동체적 성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 안에서 완성되고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인성(人性)을 취하여 강생하신 「말씀」은 친히 이 인간들의 상호교우(交友) 관계에 참여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가나」촌(村) 잔치에 참석했었고 자케오의 초대에 응하셨으며 아전들과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하셨다. 그는 또한 현실 사회생활의 가장 평범한 일들을 상기시키면서 또 일상생활에서 쓰여지는 말과 비유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인간의 고귀한 소명(召命)을 계시하셨다. 그는 인간관계 특히 사회생활의 바탕이요 근거인 가정을 성화시키셨고 자진하여 당신이 나신 나라의 법률을 준수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의 그 시대의 목공(木工)으로서 살기를 원하셨다.
(ㄷ)설교로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서로 형제와 같이 대접해야 한다는 계명을 밝히시고 기구하심으로 당신 제자들이 모두 「하나」가 되도록 간구하셨다. 만백성의 구원자로서 그는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기까지 만인을 위해 희생하셨고 『누가 그 벗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요왕 15장 13절)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온 인류로 하여금 사랑이 모든 법의 충만인줄로 아는 한가족과 같이 만들기 위해 종도들을 명하여 만민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ㄹ)많은 형제중에서 맏이이신 그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당신 성신의 은총을 통하여 신앙과 사랑으로 당신을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새로운 형제적 공동체를 설립하셨다. 이 공동체는 당신 몸을 이루고 이것이 바로 교회이며, 이 몸에는 모든 지체가 서로 각각 받은 바 다른 능력으로써 상부상조한다.
(ㅁ) 이 단합은 그 완성에 도달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성장돼 가야 한다. 그리하여 완성된 그날에는 성총에 의해 구원된 사람들 즉 하느님의 가족이며 이 구원된 자들의 형제인 그리스도의 가족은 완전한 영광을 하느님께 드리게 될 것이다. 【佛文譯에 의거 獨文 · NC 特信 對照】
【계속은 3월 제4주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