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강화도 싸움때의 웃지못할 이야기
굴뚝과 바퀴만 달고 군함될까 착각…대원군
발행일1965-06-13 [제474호, 3면]
1866년에 시작하여 5·6년 동안 계속되었던 대원군(大院君)의 박해는 몹시 비참하여 눈물겨운 이야기들을 많이 낳았지만 그중에서는 웃지못할 「넌센스」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것은 군란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상해(上海)로 탈출했던 리데·이 신부는 다시 한국에 들어갈 길을 모색하기 위해 당시 한국인들이 가있었던 일본 「나가사끼」로 향하면서 그당시 당신이 데리고있던 한국교우 3인중 2명을 뽑아서 국내의 교회소식을 탐지해올 사명을 띠게하여 보냈다. 그 후 리데 신부는 「나가사끼」에서도 한국에 다시 들어갈 희망이 없음을 알고 「상해」로 다시 건너가 있을 동안 1년전에 보냈던 두 교우가 12개월만인 1868년 9월경에 돌아와 이신부에게 전하는 군란의 소식은 너무나 비참한 단장(斷腸)의 애화였다. 그런 중에도 강화도(江華島)와 양화진에 들어왔던 불란서군함을 보고 소란을 일으켰던 정부(政府)의 포도대관들 일은 웃지않을 수 없다고 현재 춘천(春川)에 계신 주재용(朱在用) 신부는 이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서 다음과 같이 전해주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대원군 박해에 대한 시위 겸 또한 지리탐색(地理探索)을 목적으로 불란서의 군함(화륜선)이 강화도와 양화진에 들어 왔다. 양화진까지 온 것은 두척, 한척은 한강하류에 있었고 둘째번 본격적으로 온 것은 7척이었다. 불란서군함은 강화도읍을 점령하고 거기에 보관해두었던 여러가지 귀한 나라문서들을 몰수해갔다. 그러나 정족산성에서 패 하였다. 그런데 군함을 처음본 대원군의 포도 대관들은 보통 다른배에 비해서 다른 점은 오직 바퀴달린 것과 굴뚝 세운것만이 다르다고 생각해서 즉시 그와같은 군함만들기에 착수했는데 만1년만에 겨우 비슷한 병선(兵船) 3척을 만들어 한강물에 띄웠다.
그리고 이것을 국왕께서 친히 관람하셔야 된다고 해서 총융청(總戎廳)이 있던 양화진(배만든 곳)에서 국왕이 나와 앉을 자리(아마도 龍山 어느 江가)까지 약 십리나 되는 거리로 이배를 끌어오는데 있는 애를 다썼는데, 배에 단 굴레에다 큰 손잡이를 달고 여러 사람이 암만 돌려도 배가 올라가기는커녕 자꾸만 아래로 떠내려가니 울상들이 되었다. 이제는 바퀴달린 것이나 연기내는 굴뚝이나 모두 별로 도움이 못되니 손으로 끄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들어서 동아줄을 길게 매고 수천명이 달려들어 끌기 시작, 이렇게 해서 만 3일 만에야 목적지에 달하였다. 그리고는 아주 묵은 배 한척에다 바퀴를 달고 굴뚝을 해꽂아 세우고 물에 띄운 뒤에 국왕 앞에서 불을 지르니 묵은 배는 타기시작하여 점점 가라앉으니 대원군은 이를 보고 『여바라들! 이제는 서양오랑캐 배가 또 다시 오게되면 어떤 모양으로 처치하면 될 것인가를 잘 알아두어라』했다고한다.
아직까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돛도 돛대도 없이 연기를 뿜으면서 물속에 바퀴를 달고 비호같이 움직이는 불란서군함에 매우 놀랐으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지 그런 배를 만들었는데 또다시 침입하면 대항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만들었던 병선3척은 병선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못했을 것은 말할것도 없다. 보고만 앉았을 수 없어 그해 여름에 미국함대가 강화도에 오게되어 직접 그 3척을 해구에까지 끌어옮기라는 국령이 내려서 백리수로를 3개월만에 겨우 끌고간 즉, 때는 이미 미국함대가 떠난뒤이었다고 한다.
◊기사중 총융청(總戎廳)이라함은 1866년 10월경 천주학군으로 인하여 서양 오랑캐가 이곳까지 와서 우리의 맑은 강물을 더렵혔으니 불가불 서학군의 피로 그 더럽힌 것을 씻어야 하겠다고해서 이 진을 양화진에 세우고 5백인의 군대로 하여금 지키게하는 동시에 그때부터 거기서도 많은 신자들을 육시처참하던 곳임.